천풍전설 23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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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5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232화
232화
걸음을 옮기려던 풍천은 백리진학 등이 멀뚱히 서 있자 눈을 흘기며 말했다.
“뭐하쇼? 안 갈 거요?”
백리진학이 침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월산장으로 갈 생각인가?”
“아뇨. 그냥 길목만 살펴볼 생각이우. 그들이 이곳으로 오지 않고 철목보로 곧장 갔을지도 모르니까. 왜요, 내가 대월산장으로 쳐들어갈까 봐 겁나요?”
“누가 겁난다고 했나?”
“그럼 됐네요 뭐. 초웅, 너는 어때?”
“나는 겁 안나, 형!”
풍천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모두들 그의 뒤를 따라갔다. 따라가지 않으면 영락없이 겁쟁이 취급받을 판이었다.
일행 중 적어도 서너 명은 풍천에게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이 죽기보다 더 싫었다.
대월산장 쪽으로 향하던 풍천 일행은 산장을 십 리쯤 남겨놓고 격전의 흔적을 발견했다.
낮은 언덕 사이의 야트막한 구릉에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다. 모두 이십여 구, 죽은 지 얼마 안 된 듯 아직도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문제는 시신 대부분이 삼파의 무사들이라는 것이었다.
시신들 중 검각과 경천산장의 무사를 발견한 구양종과 칠성검위, 곽인청은 달려가서 시신을 살펴보았다.
배가 갈라지고, 목이 반쯤 잘리고, 사지가 덜렁거리고…….
뒤틀리고 꼬꾸라진 채 제멋대로 나뒹구는 시신을 보고 네 사람은 입술을 깨물며 분노를 씹었다.
그들은 검붉은 핏물로 뒤엉킨 시신을 반듯하게 눕히고, 눈을 부릅뜬 채 죽은 시신은 눈을 감겨 주었다.
풍천은 시신을 살펴보고 그들이 죽은 시각을 유추해냈다.
“이각 정도 지났군.”
이각.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다. 무인들이 달렸으면 지금쯤 이십 리 이상 이동했을 시간이다.
몸을 일으킨 풍천은 냉정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죽은 사람들 중에는 신검문의 사람도 여섯이나 되었다. 하지만 이 시간에도 적은 삼파의 무사들을 추격하고 있을 터, 그들을 살펴보기 위해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대월산장에서부터 계속 추격을 당했수.”
난잡한 발자국이 대월산장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발자국을 따라서 간간이 한두 구씩 시신이 보였다.
대월산장을 나와서 추격을 계속한다는 것.
풍천은 무엇보다 그 점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삼파의 무사들뿐만 아니라 다른 곳도 마찬가지 사정일 것이었다.
‘작정하고 계획을 짰군.’
천룡회 일천오백 무사 중에는 주요고수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 중 다수를 제거한다면, 그동안 천룡회의 우세로 진행되던 전쟁이 일거에 전세가 뒤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공손무백이 늙은 여우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었군.’
그때 그의 옆에 서 있던 백리진학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흔적을 쫓아갈 건가?”
풍천은 냉소를 베어 문 채 나직이 대답했다.
“물론이죠. 이번에는 우리가 놈들의 뒤통수를 치는 겁니다.”
풍천은 흔적을 쫓아 빠르게 북상했다.
삼파의 무사들과 마도연합세력의 격전이 목격된 것은 철목보를 삼십여 리 남겨 놓았을 때였다.
그들은 갈대가 우거진 호숫가에서 싸우고 있었다.
삼파 무사들의 숫자는 일백 오십 정도, 처음에 비해서 절반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반면 마도연합세력의 무사들은 이백 명가량 되었는데, 고수의 숫자는 운조평과 등청이 이끌고 있던 자들에 비해서 반도 안 되었다.
“적당하군.”
풍천은 의미 모를 말을 뇌까리며 걸음을 빨리했다.
너무 많아도 걱정이었다. 그들을 제거하면 신마성 쪽의 힘이 약화되고 천외천이 다시 득세할 테니까. 그런데 이백이면 균형을 맞추기에 적당해 보였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 말을, 상대하기 적당하다는 뜻으로[을] 해석했지만.
풍천은 적과의 거리가 이십여 장으로 줄어들자 간단한 지시를 내렸다.
“부상이 심한 분들은 뒤로 처져서 방어나 하쇼. 괜히 나서서 다른 사람 방해하지 말고. 초웅, 길을 뚫어라!”
“알았어, 형!”
초웅은 큰 목소리로 대답하고 성큼성큼 뛰어갔다.
거대한 체구의 초웅이 무지막지하게 큰 칼을 들고 뛰어가자, 마도연합세력 무사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저 새낀 뭐야?”
“덩치 하나는 겁나게 크군.”
“저 칼 좀 봐. 곰 잡는데 쓰면 딱 좋겠는데?”
그 사이 마도연합세력 무사들 바로 뒤까지 다가간 초웅이 칼을 휘두르며 뛰어들었다.
“으라차차차차차!”
그때부터 공포가 호숫가를 뒤덮었다.
일도에 서너 명씩 튕겨지고 죽어갔다. 도검으로 막아봐야 소용이 없었다.
파천의 패기는 막는 것이 무엇이든 부수고 튕겨냈다.
처절한 비명과 공포에 찬 고함소리가 파란 천공을 뒤흔들었다.
“으아악!”
“놈에게서 멀어져라! 피해!”
초웅이 벼락이라면 풍천은 바람이었다.
풍천은 초웅이 흘리고(?) 간 자들을 깨끗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적들을 혼란으로 빠뜨렸다.
바람이 스쳐가는 곳에선 여지없이 피바람이 불고, 피안개가 자욱했다.
소름끼치는 광경!
마도연합세력 무사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뒤로 물러서기에 바빴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으로는 풍천의 살수를 피할 수 없었다.
“이노오오옴!”
“이 괴물 같은 놈아! 내 검을 받아봐라!”
마도연합세력 무사들 중 두 중년인이 풍천과 초웅을 향해 몸을 날렸다.
풍천은 상대가 절정고수이며 이곳에 있는 마도연합세력 무사들 중 가장 강한 자들임을 알고 눈빛을 빛냈다.
그는 다른 자들은 제쳐두고서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중년인을 상대했다.
시간을 끌어봐야 희생만 커질 터. 천풍무영류를 펼친 그는 비월신검과 낙성천류검으로 삼 초 만에 상대의 목을 잘라버렸다.
그 사이 백리진학 일행과, 일명 단천문 사람들도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마도연합세력의 무사들은 그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순식간에 오십여 명이 죽어갔다.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하는 호숫가가 공포에 휩싸였다.
마도연합세력의 무사들은 죽은 사람의 숫자가 백 명을 넘어서자 싸울 의욕을 잃고 정신없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풍천 일행이 뛰어든 지 일각 만이었다.
삼파의 무사들은 호숫가에서 부상을 치료했다.
그동안 쫓기면서 몸도 정신도 한계에 이른 상태였다. 하지만 풍천 일행이 적을 일순간에 몰살시키자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
그 광경이 하도 엄청나서 자신들의 눈으로 봤으면서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 것이다.
특히 초웅의 위세는 가히 천둥벼락이 따로 없었다.
거대한 덩치. 거대한 칼. 그리고 파천의 도세!
초웅의 칼 휘두르는 모습이 어찌나 강렬했는지, 누군가가 벌써 초웅에게 별호를 붙여줄 정도였다.
거령파천도(巨靈破天刀)!
마도연합세력에게는 지옥사자였고, 삼파의 무사들에게는 하늘을 지키는 천장처럼 느껴진 사람이 바로 초웅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실은 다름 아닌 풍천의 강함이었다.
강하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설마 서천무련의 장로인 구자숭의 목을 단 삼 초 만에 잘라버릴 줄이야!
어디 그뿐인가?
다른 사람들 역시 하나하나가 절정의 고수들이었다. 그중에는 어디선가 들어본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도 있었다.
진대원도 풍천 일행의 뒤쪽에 처져있는 백리진학을 바라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는데 확실치가 않은 것이다.
그는 궁금함을 도저히 못 참겠는지 풍천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풍 조장, 혹시 저분은 천중수가 아닌가?”
진대원의 입에서 난데없이 칠절의 별호가 나오자, 곽인효와 구양진을 비롯한 삼파의 간부들이 눈을 크게 뜨고 풍천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분은…….”
풍천은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어차피 백리진학 일행은 세상에 다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자신이 말하지 않는다 해도 곧 밝혀질 것이었다.
그의 입에서 네 사람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주위에 서있던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천중수 백리진학과 육자귀, 오광문, 홍자성, 냉양이 풍천의 조에 속해 있다니!
풍천은 저런 자들을 어떻게 끌어들인 걸까?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런 강자들이 곁에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마음이 편해졌다.
진대원은 한참이 지나서야 경악한 마음을 추스르고는, 이전보다 훨씬 조심스러워진 어조로 풍천에게 물었다.
“풍 조장, 다른 곳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가?”
“자세히 알아봐야 알겠습니다만, 이곳과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싶네요.”
석초산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놈들이 철목보까지 쫓아갔을 거라고 보나?”
“저라면 그랬을 겁니다. 기회란 쉽게 오지 않는 거니까요.”
“으으음…….”
진대원과 석초산이 침음을 흘리며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풍천은 그 틈을 이용해서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런데 왜 늦은 겁니까? 일각만 공격하고 빠져나오라고 했는데요.”
진대원이 씁쓸한 표정만 지을 뿐 바로 대답을 못했다. 그때 곽인효와 나란히 서있던 구양진이 말했다.
“다른 쪽의 동료들이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네. 그들을 놔둔 채 우리만 도망갈 순 없지 않은가?”
풍천은 삼파의 실질적인 수장인 진대원과 곽인효, 구양진을 번갈아보고 상황을 짐작했다.
“아하, 그래서 후퇴하는 걸 반대하셨나 보군요.”
“나는 동료의 어려움을 눈앞에 두고 돌아설 만큼 냉정하지 못하네.”
“물론 그러셨겠죠. 그래서 백 명이 넘는 동료를 죽게 만들었을 테고요.”
구양진은 발끈해서 반박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게 어째서 내 잘못이란 말인가?”
“바로 빠져나왔으면 적들도 추격을 쉽게 못 했을 겁니다. 그럼 동료들도 무의미하게 죽지 않았겠죠.”
“대신 그들은 다른 쪽을 공격했을 거네.”
“아니죠. 그들은 지원무사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그곳을 벗어날 수 없었을 거요. 왜? 그게 그들에게 내려진 명령일 테니까요.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는 철저히 방어만 하라. 지원군이 도착하면 반격해서 적을 몰살시켜라. 뭐 그런 명령 말이죠. 남쪽의 지원군은 우리 때문에 일각 이상 늦어져서 얼굴도 보지 못했겠지만 말입니다.”
얼굴이 벌게진 구양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곽인효가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생각하네. 구양 공자도 동료를 돕고자 하는 마음에서 한 말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그만 하세.”
풍천도 그쯤에서 더 이상 구양진을 다그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하긴 뭐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니까요.”
왠지 삐딱하게 느껴지는 말투.
곽인효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풍천에게 질문을 던졌다.
“만약 철목보가 공격당했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는가?”
“높으신 분들끼리 상의해 보쇼. 나 같은 조장이 뭘 알겠수.”
풍천은 툭 쏘듯이 말하고 몸을 돌렸다.
석초산은 그런 풍천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그나마 그가 풍천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아닌가.
그는 풍천이 돈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는 걸 알기에 넌지시 제안했다.
“자네가 충실하게 도와준다면, 그만한 대가를 받을 수 있을 거네.”
풍천의 몸이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동작이 어찌나 빠른지 처음부터 돌아서지도 않은 것 같았다.
“뭐 그렇다면 생각해 보죠.”
해결사의 본능이랄까?
‘대가만 마음에 든다면 못할 것도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