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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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07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7화
17화
대충 빗물을 털고 방 안으로 들어간 북궁천은 장만호와 마주 앉았다.
장만호는 웃는 얼굴로 북궁천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물어볼 것이 있다고?”
“여긴 차도 안 주나 보군요.”
북궁천의 딴소리에 장만호의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어졌다.
“곧 내올 거네.”
“그럼 본론은 입을 먼저 적시고 이야기하지요.”
기선을 제압당한 장만호는 웃음을 지우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급할 것 하나도 없다는 투로 툭 쏘아붙이고.
“그럴까?”
북궁천도 방 안을 둘러보며 여유를 부렸다.
“방음이 잘 된 방이군요. 어지간한 소리는 밖으로 새어 나가지도 않겠는데요?”
“돈 좀 들였지.”
“진 노인의 말로는, 장 의원께서 태원의 일을 모두 꿰고 있다고 하던데, 정말입니까?”
“알만큼은 알지. 믿지 못할 거면 뭐하러 왔나?”
“지나가는 길에 들러 본 겁니다. 알면 좋고, 모르면 어쩔 수 없고…….”
장만호의 가늘어진 눈에서 옅은 열기가 새어 나왔다.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지?’
그때 뒤쪽의 문이 열리더니, 열댓 살가량의 소년이 차를 들고 들어왔다.
북궁천은 소년이 차를 따르고 나갈 때까지 기다린 다음, 찻잔을 잡고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느긋이 향기를 음미했다.
“호, 향이 좋은데요?”
장만호는 헛기침을 하며 치미는 열기를 가라앉혔다.
“커험, 차야 최고급을 쓰니 당연히 좋지.”
북궁천은 일단 차를 한 모금 마셔서 입술을 축이고 입을 열었다.
“사람을 하나 찾으려 하는데, 장 의원께서 제가 원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왠지 못 미덥다는 투.
순간, 장만호의 목소리가 까칠해졌다.
“누구를 찾는데?”
북궁천은 찻잔을 다시 입으로 가져가며 슬쩍 몇 마디 던졌다.
“헌원려려라고, 응원 검원장 헌원가의 여주인인데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장만호는 잠시 머리를 굴리더니 그녀의 이름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헌원가의 여주인? 아, 그 아가씨?”
하지만 곧 자책하는 표정으로 멈칫하더니, 슬쩍 북궁천의 눈치를 살폈다.
‘제길, 실수했군.’
크든 작든 정보는 곧 돈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돈을 땅바닥에 내팽개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시나 보군요. 하긴 태원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안다 하셨으니 모를 리가 없지요.”
“험, 아는 것과 찾는 것은 다르다네.”
장만호는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최대한 말을 비비 꼬았다.
하지만 북궁천이 누군가? 한때 북천을 다스리던 마제가 아닌가!
비록 여인과 술 때문에 한동안 방황하긴 했지만, 장만호 정도는 그의 상대가 아니었다.
여자 문제라면 몰라도.
“그래도 대상에 대해서 알고 있으면 찾기가 좀 더 수월하겠지요.”
“그, 그건 그렇지.”
“일 년 육 개월 전인가? 그녀를 용천보에서 봤다는 사람을 만났는데, 장 의원님도 알고 계십니까?”
제대로 거래를 하려면 한 가지라도 더 비밀로 감춰야 한다.
그런데 몰랐다고 하면, 그것도 몰랐냐며 자신의 능력을 의심할 놈 같다.
“그 정도야 기본이 아니겠나? 커험!”
장만호는 큰기침까지 하며 대답했지만 속이 무척 쓰렸다.
“그 후 어디로 갔습니까?”
묻는 투가 워낙 자연스러워서 장만호는 무심결에 입을 열었다.
“남쪽으로 내려가 황하를…….”
하지만 곧바로 뒤를 흐리고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뜻밖의 성과를 얻은 북궁천은 다시 한번 찔러 보았다.
“황하를 건넜으면 정주나 낙양, 개봉 쪽으로 갔을 확률이 높겠군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전열을 가다듬은 장만호는 몇 가닥 있지도 않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황하를 건넜다고 해서 꼭 그쪽으로 가란 법은 없지.”
“어쨌든 황하를 건넜으면, 장 의원께서는 찾을 수 없겠군요.”
“그렇다고만은 볼 수 없지.”
“그녀가 황하를 건넜는데도 찾을 수 있단 말입니까?”
“돈만 많이 준다면야…….”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최소 석 달은 걸릴 거네.”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군요.”
“그것도 나니까 그 정도 걸리는 거네.”
“으음, 그럼 황하를 건너가 낙양이나 정주에서 알아보는 게 빠를지도 모르겠군요.”
“사람을 한둘 더 쓴다면 두 달 안에도 가능하지. 원한다면 정주에서 소식을 전해 줄 수도 있네. 그럼 그곳까지 가서 사람을 쓰는 것보다 시간을 많이 앞당길 수 있을 거네.”
“돈은 얼마 정도 들 것 같습니까?”
“은자 백 냥 정도는…….”
장만호는 북궁천의 눈치를 보며 넌지시 가격을 이야기했다.
순간, 북궁천은 더 들어 볼 것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만호는 슬쩍 말꼬리를 틀어서 가격을 조정했다.
“원래는 그 정도 드는데, 진가가 보낸 사람에게 다 받을 순 없고, 팔십 냥만…… 아니, 칠십 냥만 내게나.”
몸을 반쯤 돌리는 것으로 열 냥을 더 깎은 북궁천은 고개만 돌려서 장만호를 바라보았다.
“오십 냥으로 결정하고, 일단 선불로 스물다섯 냥을 내지요.”
장만호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언제라도 돌아설 것 같은 북궁천을 보고 더 이상의 흥정을 포기했다.
“그렇게 하세. 그런데 왜 헌원려려를 찾으려고 하는 거지?”
북궁천은 씁쓸한 표정으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오래전에 보고 못 봐서, 얼굴이라도 한번 보려고 찾는 겁니다.”
지붕을 적시는 빗방울 소리와 어울린 그 모습이 어찌나 애절해 보이는지 장만호는 더 이상 묻지 못했다.
‘혼자 좋아했나 보군. 쯔쯔쯔…… 그러게 못 오를 나무를 왜 쳐다봐?’
* * *
용천보는 서문을 나가서 남쪽으로 십 리쯤 내려간 곳의 야산 자락에 지어져 있었다.
동쪽에 태원성을, 서쪽에 분하를 낀 용천보는 산서오호 중 하나답게 수많은 무사가 들락거렸다.
북궁천은 용천보의 정문 위사에게 보따리 속에 든 서찰을 꺼내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서 기세가 실린 목소리로 정문 위사를 내리눌렀다.
“보주께 직접 전달하라는 명을 받고 왔소. 어디로 가야 하오?”
북궁천의 기세에 눌린 정문 위사는 서찰에 쓰인 백풍문주의 이름을 보고 그들을 용무전까지 직접 안내했다.
거대한 삼 층 전각 입구에 서 있던 경비무사 중 하나가 위사장의 말을 듣고 안으로 들어갔다.
북궁천과 이정한 등은 안으로 들어간 경비무사가 나오길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밖으로 나온 경비무사가 그들을 데리고 용무전 안으로 들어갔다.
용무전 안은 넓은 회의실이 전면에 있고, 후면은 내실인 듯했다.
그들이 들어가자 사십 대 초반의 청의중년인이 다가오더니 위압적인 태도로 물었다.
“나는 용호단주 사운도네. 자네들이 고 문주께서 전하는 물건을 가져왔다고?”
북궁천이 아닌 이정한이 서찰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전면에 나서기 싫은 북궁천이 용무전으로 오면서 보따리와 서찰을 그에게 맡긴 것이다.
“그렇습니다. 물건은 보주께 직접 전하라 했으니 저희의 사정을 이해해 주십시오.”
사운도는 그가 내민 서찰을 받아서 겉봉을 살펴보고는, 고개를 들어 이정한의 뒤를 바라보았다.
“모두 일행인가?”
“예, 사 단주.”
북궁천에게 잠시 시선을 준 그는 몸을 돌렸다.
“여기서 잠깐 기다리게. 보주님께 다녀올 테니까.”
잠시 후.
칠순 정도로 보이는 노인이 네 명의 호위를 거느리고 사운도와 함께 이 층에서 내려왔다.
가슴까지 자란 탐스런 백염. 노인답지 않게 형형한 안광. 그가 바로 용천보의 보주인 용뢰검(龍雷劍) 사마주광이었다.
태사의에 몸을 묻은 그는 이정한 등을 훑어보며 칼칼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위가 물건을 보냈다고?”
이정한은 황급히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숙였다.
“예, 보주님.”
“어디 가져와 봐라.”
이정한은 보따리를 꺼내들고 사마주광에게 다가갔다.
그때 사운도가 그의 앞을 막았다.
“이리 주게.”
이정한은 보따리를 그에게 넘겼다.
서신을 먼저 읽은 사마주광은 상자 안에 든 흑옥불상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고정명은 상자 안의 물건을 잠시 보관해 달라고 했다. 나중에 자신이 와서 자세한 것을 말해 준다면서.
하기에 매우 귀한 물건인 줄 알았거늘, 너무 오래되어서 색마저 탁해진 한 뼘 길이의 흑옥불상이 아닌가.
불상의 조각이 섬세하고 흑옥으로 만들어진 게 특이하긴 했지만 보물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어쨌든 고정명이 귀도맹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맡겼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사마주광은 상자의 뚜껑을 닫고 이정한을 바라보았다.
“수고가 많았다. 그런데 왜 너희가 이걸 가져왔지?”
이정한은 오면서 벌어진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오면서 귀도맹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 바람에 상 당주님과 위 부당주님이 큰 부상을 입으셔서 어쩔 수 없이…….”
그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사마주광은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운도와 곁에 있던 세 명의 호위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정한의 이야기가 끝나자, 사운도가 의아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상 당주와 위 부당주가 중상을 입을 정도라 했는데, 그대들은 그리 다친 곳이 없는 것 같군.”
약간의 의심이 깃든 질문.
이정한은 침착하게 그의 의심을 벗어났다.
“저희는 뒤로 처져서 추혈대의 발을 늦추는 임무를 맡는 바람에 적혈대와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럼 추혈대는 어떻게 되었지?”
“거리가 너무 벌어져서 바로 쫓아오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해서 그들이 오기 전에 부상당한 상 당주님과 위 부당주님을 급히 원평으로 모셨지요.”
사운도가 자꾸 이정한을 추궁하자, 사마주광이 손을 저었다.
“그만해라. 이들이 이런 일을 속일 이유가 없지 않느냐?”
사운도도 모르지 않았다. 다만 상우군과 위조현이 중상을 입었는데,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자들이 멀쩡하다는 게 이상했을 뿐.
그는 북궁천을 다시 한번 바라본 다음 이정한에게 말했다.
“어쨌든 수고가 많았군. 이제 그만 가 보도록 하게.”
그때 북궁천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소만.”
사운도가 칼날 같은 눈빛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 말하는 자넨 누군가?”
“단화린이라 하오.”
처음 듣는 이름. 뭔가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알 수가 없다. 사운도는 자신의 신경이 너무 예민해졌나 보다 생각하며 말했다.
“뭘 물어보겠다는 거지?”
“헌원가의 여주인인 헌원려려 소저가 이곳에 머문 적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혹시 아는 바 없소?”
사운도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헌원 소저? 왜 그녀에 대해서 묻는 거지?”
“같은 고향 사람으로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여인이오. 집안이 몰락한 후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그러는 거요. 우리가 수고한 것을 인정하신다면, 대가라 생각하고 말씀해 주시오.”
사운도의 시선이 사마주광을 향했다.
사마주광은 탐색하듯이 단화린을 살펴보았다.
십 개월 전쯤, 북천궁에서 사람이 온 이후로 그녀를 찾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정말 단순히 궁금해서 찾는 것일까?
‘말투로 봐서는 그쪽 사람이 분명한 것 같은데…… 하긴 저 나이에 그 아이를 보고 혹하지 않으면 이상하지. 허허허.’
잠시 단화린을 살펴보던 그는 별다른 점을 발견하지 못하자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