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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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6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1화
11화
“스물일곱이오.”
“어머, 그럼 대사형하고 나이가 같네요? 생일은 언제예요?”
“시월이오.”
“대사형은 십이월인데…….”
이정한마저 강소하를 째려보았다.
‘으이그, 주책. 그건 왜 말해? 저 친구는 내 나이가 더 많은 줄 아는데.’
그러든 말든 강소하는 궁금한 것이 많았다.
“여기에는 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세요?”
“허락된다면 보름 정도 더 머물렀으면 하오. 그때쯤이면 몸이 어느 정도 나을 것 같소.”
“정말요? 그럼 저희하고 비슷한 시기에 나가시겠군요. 저희도 그때쯤 되면 다시 나갈 생각인데.”
강소하가 활짝 웃으며 반색하자, 더는 못 보겠는지 동호량이 끼어들었다.
“단 형, 사매 말에 너무 신경 쓰지 마쇼. 우리가 언제 나갈 것인지 아직 정해진 계획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진자방이 한술 더 떴다.
“단 공자도 태원에 가야 한다는구나. 길을 잘 모르는 것 같으니, 기왕이면 함께 나가서 동행하도록 해라.”
동호량의 어깨가 축 처졌다.
함께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동행까지 해야 하다니.
그때 진자방이 빙그레 웃으며 북궁천에게 말했다.
“그런데 말이네, 그때까지 지내려면 한 조각 더 줘야 할 것 같은데…… 뭐, 없으면 말고.”
* * *
태극당에서의 생활은 단조로우면서도 편했다.
북궁천이 운기조식을 행하거나 북두패왕권을 수련할 때는 누구도 방해하지 않았고, 이런저런 잡일도 시키지 않았으며, 하루 세 끼 식사는 꼬박꼬박 챙겨 주었다.
물론 그 모두가 북천령의 귀퉁이를 한 조각 더 떼어 준 덕분이었지만, 어쨌든 덕분에 그의 몸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그렇게 진자방의 세 제자가 돌아온 지 사흘째 되던 날.
북궁천이 북두패왕권을 다섯 번 연속으로 펼친 후 숨을 고르고 있는데 초강이 다가왔다.
그는 이마를 잔뜩 찌푸리고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단 형, 실례되지 않는다면, 조금 전에 펼친 권법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만.”
북두패왕권의 이름을 밝히면 자신의 정체를 눈치챌지도 모르는 일. 북궁천은 대충 둘러댔다.
“북패권이오.”
“처음 듣는 권법이군요. 투로가 단순하게 보이면서도 묘한 현기가 느껴지는데, 괜찮다면 저하고 간단하게 몇 수 나눠 보지 않겠습니까?”
다른 세 사람은 검법을 주 무공으로 삼고 권장법을 부수적으로 수련했다.
반면 그는 권장법을 주 무공으로 택했다. 하기에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본 듯했다.
북궁천은 초강의 마음을 짐작하고 담담히 응낙했다.
“내공을 쓰지 않고 간단하게 겨루는 거라면 나도 좋소.”
그가 초강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일단 겨뤄보면서 결정할 일이지만.
두 사람이 일 장의 거리를 두고 마주서자, 진자방은 물론이고 이정한과 동호량, 강소하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반짝였다.
먼저 초강이 느릿하게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고는, 두 손의 손바닥을 쫙 펴서 앞으로 뻗었다.
북궁천도 정자(丁字)로 서서 좌수는 가슴 앞에 세우고, 우수는 사선으로 뻗으며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게 바로 북두패왕권의 기수식이었다.
순간, 초강이 두 발을 번갈아 옮기며 두 손으로 둥글게 원을 그렸다.
한순간에 두 사람의 간격이 넉 자로 줄어들었다.
빈틈만 보이면 곧바로 쇄도해서 몸을 가격할 수 있는 거리.
공력을 쓴다면야 넉 자가 아니라 사 장 거리에서도 상대에게 위협적인 공격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온전히 초식으로만 겨루어야 하기에 직접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타다다닥.
눈 깜짝할 사이, 두 사람의 손이 얽혀 들며 십여 번에 걸쳐 타격음이 일었다.
초강은 삼초 십이식의 태극일원장을 펼치고 뒤로 물러났다.
상대는 단순하게 뻗고 휘감고 당기면서 막을 뿐인데, 마치 바위에 박혀 있는 철 기둥을 혼자서 때리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오기가 생긴 그는 좀 더 변화가 심한 공격을 펼치기로 작정하고 북궁천을 향해 쇄도했다.
북궁천은 처음과 똑같은 자세에서 손을 뻗었다.
눈썹 한 올 움직이지 않고 상대 공격의 결을 파고드는 손짓은 초강에게 섬뜩함마저 안겨 주었다.
하지만 시작했으니 결과는 봐야 할 터. 초강은 자신의 모든 재주를 다 발휘해서 북궁천을 몰아붙였다.
그의 공격이 강력해질수록 구경하는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
완벽에 가까운 태극일원장이었다. 그런데 왜 삼류 권법처럼 보이는 단화린의 단순한 방어를 뚫지 못하는 걸까?
그들이 답답해하던 순간!
타닥!
북궁천과 초강의 손이 얽히는가 싶더니, 초강이 주르륵 세 걸음을 물러섰다.
평소보다 더 딱딱하게 굳은 표정, 흔들리는 눈빛.
아무래도 그가 손해를 본 듯하자, 구경하던 태극문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주시했다.
그때 입술을 잘근 깨문 초강이 두 손을 맞잡고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제가 졌습니다.”
북궁천도 가볍게 포권을 취해서 상대의 패배를 받아 주고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잘 생각해 보면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알게 될 거요.”
초강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북궁천만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머릿속에 의문이 쌓여 있는데, 그 말을 들으니 더 혼란스러웠다.
바로 그때, 북궁천이 천천히 손을 뻗어서 허공을 움켜쥐었다.
순간, 뭘 봤는지 초강의 눈이 한껏 커졌다.
‘파리가 날아가지 못하고 갇혔다. 단 형의 손은 한없이 느렸는데, 왜?’
“당장은 힘들 거요. 하지만 부단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이처럼 할 수 있을 거요.”
북궁천은 혼란에 휩싸인 초강에게 한마디 더 해 주고 몸을 돌렸다.
북궁천이 방으로 들어가자 진자방과 그의 제자들이 우르르 초강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거냐? 왜 패배를 시인했지? 우리가 봐선 네가 더 나았던 것 같던데.”
이정한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진자방과 동호량, 강소하도 궁금하다는 듯 초강의 입만 바라보았다.
초강은 그 말을 듣고 더 어깨가 늘어졌다.
바로 옆에서 보고도 알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의 수가 높다는 말이었다.
하긴 직접 손을 나눈 그조차 확실한 것을 알지 못하는데 구경한 사람들이 얼마나 알 것인가.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생각을 간단하게 말했다.
“저와 단 형은 수준이 다릅니다. 죄송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렇게밖에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 대사형.”
진자방 등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궁금증만 더 커졌다.
“조금 전에 단 공자가 손을 뻗었을 때, 왜 그렇게 놀랐어요?”
이번에는 강소하가 물었다.
초강은 자신이 본 대로 대답했다.
“그가 손을 뻗어 파리를 잡았다, 사매.”
동호량이 피식 웃었다.
“난 또. 뭐 그런 걸 가지고 놀라? 여기서 날아가는 파리를 손으로 못 잡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나는 한 번에 세 마리를 잡을 수도 있는데.”
“그냥 손을 천천히 뻗어서 잡았습니다. 파리는 병 안에 갇힌 것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했고요. 저는 절대 파리를 그렇게 잡을 수 없습니다, 사형.”
초강뿐만 아니라 태극문의 그 누구도 파리를 그렇게 잡을 수 없었다.
하기에 태극문의 다섯 사제는 파리에 대해서 고민하느라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이정한이 북궁천의 방을 힐끔거리며 투덜거릴 때까지.
“십칠 년 동안 저 권법을 수련했다더니, 별 요상한 재주를 다 익혔군.”
* * *
태극문의 제자들이 돌아온 지 닷새째.
북궁천은 석양빛을 받으며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앞쪽 공터에서 태극문의 제자들이 수련에 열중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본 북궁천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무공의 수준이 자질을 채워 주지 못하고 있어.’
태극문의 무공이 형편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초강과 간단히 대련하면서 느낀 바지만, 태극문의 무공은 능히 절정의 공부였다.
문제는 무공의 해석이 잘못되었든지, 아니면 가르침이 잘못되어서 저들이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먼저 나서서 잘못된 점을 지적해 줄 수도 없었다. 나름대로 포부를 갖고 있는 진자방이 자존심 상할지도 모르니까.
북궁천이 태극문 제자들의 수련을 지켜보고 있는데 진자방이 뒤로 다가오며 물었다.
“어떤가?”
“말씀대로 뛰어난 제자들이군요.”
진자방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그렇지? 허허허, 저 아이들이 조사님의 무공을 되찾았으면 좋겠는데…….”
현재 상태로는 쉬운 일이 아니다. 출발이 잘못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진자방의 말투로 봐서 그는 아직 모르고 있는 듯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북궁천이 진자방에게 물었다.
“제가 함께 수련해도 괜찮겠습니까?”
초강의 말을 듣고 나름대로 생각한 것이 있던 터라 진자방도 거부하지 않았다.
“좋을 대로 하게. 서로 도움을 주다 보면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겠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그래? 뭔지 몰라도 물어보게. 내가 아는 거라면 대답해 주지.”
“태극문의 선조 한 분이 사라지면서 무공에 문제가 생겼다 하셨는데, 연유를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진자방은 사문의 일을 남에게 말한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비사(秘事)라 할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또한 초강의 말이 사실이라면 뭔가 신비한 구석이 있는 청년이었다.
잘하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 그는 약간의 기대감을 가지고 입을 열었다.
“뭐, 어려울 것도 없지. 그러니까 말이야…….”
태극신검이 실종된 후 태극문 대부분의 무공은 구전(口傳)으로 이어졌다.
그로 인해 태극심법(太極心法)을 제외한 절기들은 절전되다시피 했다.
그나마도 태극심법은 구결이 워낙 오묘해서 후대의 문주들이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이 사람 저 사람 풀이하는 이에 따라 내용이 달라졌다.
그동안 문주들이 태극심법을 풀이해 놓은 책자만 스물네 권.
그 바람에 무공이 정립되기는커녕 혼란만 가중되면서 수백 년 동안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억지로 풀이하려 하지 않고 그중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을 택했네. 그 본질은 같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 대신 초식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는데, 내 능력이 따르지 않아서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 그 일은 아무래도 제자들에게 맡겨야 할 것 같아. 나보다 훨씬 총명하고 몸도 좋으니까 말이야.”
진자방은 솔직하게 태극문이 처한 입장을 설명해 주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웃음에는 능력이 없어서 제자들에게 더 많은 것을 전해 주지 못한 노사부의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북궁천은 진자방에게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왜 태극문 제자들이 익힌 무공에 허점이 많은지 이해되었다.
‘열흘 동안 얼마나 깨달을지 모르겠군.’
열흘 후에는 떠나야 한다. 그때까지 저들의 무공을 교정해 줄 생각인데, 얼마를 깨닫든 그것은 저들의 복이었다.
* * *
북궁천이 수련에 합류하자 태극문의 네 제자들 반응이 둘로 갈라졌다.
이정한은 떨떠름한 눈치였고, 동호량은 불편한 마음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다.
반면 초강은 들뜬 표정이었고, 강소하는 그저 즐거워서 웃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동호량은 강소하의 반응 때문에 더 기분이 상했다.
‘키만 컸지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저자가 뭐 좋다고…… 쳇.’
북궁천이 수련에 합류하자 대뜸 대결을 신청한 것도 그러한 마음 때문이었다.
“나하고 가볍게 한번 붙어 보지 않겠수?”
북궁천은 마다하지 않았다. 어차피 때가 되면 그가 요구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리고 잠시 후.
“져, 졌수!”
동호량은 목검에 서른여덟 대를 얻어맞고 패배를 선언했다.
처음에는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상대가 지나가듯이 던지는 한 마디 한 마디에 묘한 느낌이 들어서 악착같이 버텼다.
하지만 이제는 서 있기조차 힘들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상황을 봐서 자신도 한번 나서 보려던 이정한은 물먹은 솜처럼 늘어진 동호량을 보고 생각을 거두었다.
초강과 비무할 때도 묘하게 이기더니 동호량과의 비무에서도 뭔가 이상했다.
막상막하처럼 보이던 상황이 어느 순간부터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단화린의 단순한 공격에 동호량은 허둥댔고, 동호량의 날카로운 공격은 단화린의 간단한 손짓을 뚫지 못했다.
더 이상한 것은, 엄살이 심한 동호량이 그 지경이 되도록 버티면서도 눈빛이 초롱초롱하다는 점이었다.
‘이번 표행이 유난히 힘들었다더니, 그 때문에 참을성이 많이 늘었나?’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당장은 다른 이유를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동호량이 생각도 못 한 말을 해서 그를 더 곤혹스럽게 했다.
“내일 다시 붙읍시다. 그때까지는 막을 방법을 생각해 보겠수.”
‘응? 동 사제에게 저런 끈기가 있었던가?’
이정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북궁천과 동호량을 번갈아 보았다.
그때 북궁천이 그를 보며 말했다.
“이 형도 한번 해보지 않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