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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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7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9화
9화
지난 상황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단무영이 쓰러져 있는 자신을 보고 치료했을 것이다.
몸속에서 발화된 열양진기는 그를 기절시킬 만큼 강력했다. 단무영의 능력으로 그 기운을 다스리려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쏟아부었어야 할 것이다.
심지어 선천진기까지!
북궁천은 옷자락을 와락 움켜쥐고 질끈 눈을 감았다.
단무영에 대한 미안함과 오랜 벗을 잃은 허전함이 동시에 밀려들면서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멍청한 단숙! 그렇게 떠나면 내가 잘했다고 할 줄 알았어?’
단무영은 자신에게 짐이 될까 봐 떠나갔을 것이다.
그걸 알기에 더 미안하고 가슴이 아팠다.
빗소리가 점점 약해졌다.
낙엽에 맺힌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들릴 즈음, 북궁천은 마음을 다스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가로 희미한 물기가 비쳤다.
‘그래, 반드시 려려를 찾아내고 세상도 실컷 구경할 거야. 단숙이 바라는 대로……. 대신 단숙도 죽으면 안 돼. 염라대왕이 불러도 절대 가지 마. 마제가 안 보내 줘서 못 간다고 해. 그럼 내가 나중에 찾아낼 테니까!’
* * *
북궁천은 이틀을 꼬박 운기조식으로 보냈다.
정체불명의 알 덕분인지 단무영의 선천진기 덕분인지, 약화된 경맥이 빠르게 회복되었다.
근육과 신경의 통증은 모두 사라져서 걷고 뛰는 데 지장이 없었다.
경맥도 공력을 삼성까지는 무난히 받아 주었다.
다음 날 아침.
통나무집을 떠나기로 작정한 북궁천은 구석에 세워져 있는 묵혼을 옆구리에 매달고 통나무집을 나섰다.
“훗…….”
백 장을 걷기도 전에 그의 입술 사이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사방이 거산준봉으로 둘러싸여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방향도 제대로 못 잡고 길 잃은 염소처럼 헤매는 놈이 마제는 무슨…….’
그는 일단 근처의 높은 봉우리 위로 올라갔다.
좌우를 둘러보자 울울창창한 숲, 끝도 없이 펼쳐진 수많은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고 흰 구름이 산허리를 감은 채 흐르고 있었다.
‘태행산 줄기일 가능성이 크군.’
바로 그때, 안개가 흘러가는 사이로 뱀처럼 구불구불한 계곡길이 보였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산을 내려갔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딘가 나오겠지.’
일각 후.
계곡길에 도착한 그는 해가 떠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기면 그만큼 헌원려려와의 거리가 가까워질 터. 몸은 엉망이어도 기분은 좋았다.
‘그런데 려려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혹시 혼인을 한 것은 아닐까?’
벌써 이 년이 지났다. 그럴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문득 그 생각이 들자 북궁천의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만약 너의 남자가 진정한 대협이라면 돌아서마.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는 절대 너를 포기하지 않을 거다, 려려.’
속이 좁다 해도 할 수 없었다. 그도 오기가 있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런 일이 없기만을 바랐다.
만약 헌원려려가 다른 남자의 여인이 된 걸 보면 무슨 일을 벌일지 자신조차 몰랐다.
* * *
산은 깊고 깊었다. 종일 걸었는데도 민가를 만나기는커녕 여전히 산속이었다.
지난 사흘 동안 먹은 것이라곤 정체 모를 알 하나였다.
뱃속에선 천둥이 치다 못해 무엇이든 넣어 달라고 하소연하고 있었다.
그런데 석양이 질 무렵이었다. 열심히 길을 따라 걷는데 우측으로 깊숙이 뻗은 계곡 안쪽에서 전각이 두어 채 보였다.
건물이 있으면 사람이 있을 터.
‘일단 저곳으로 가 보자.’
눈빛을 반짝인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전각이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갔다.
설령 그곳이 도둑놈 소굴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전각은 모두 세 채였는데, 단애의 튀어나온 부분에 위태롭게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중 중앙의 전각에 낡아서 금방 부스러질 것 같은 현판이 달려 있었다.
기대감에 찬 북궁천이 절벽 아래에 도착하자 위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누군데 이렇게 외진 곳까지 들어온 거요?”
북궁천은 고개를 들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전각이 세워진 절벽 위에 텁수룩한 수염을 기른 장한이 서 있었다.
“나는 북…….”
북궁천은 버릇처럼 아랫사람에게 하는 오만한 말투로 입을 열다 재빨리 멈췄다.
자신은 지금 북천의 주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북천의 주인이라는 것을 숨겨야 할 처지.
그는 오만함을 누그러뜨리고 목소리를 보다 부드럽게, 그리고 이름도 바꾸어서 말했다.
단무영의 본명으로.
“본인은 북쪽에서 온 단화린이라 하오. 길을 잃고 헤매다 건물을 발견하고 찾아왔소.”
그럼에도 그간의 성격을 단숨에 바꿀 수는 없어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장한은 그의 그런 말투가 마음에 안 들었다.
게다가 흐트러진 머리, 찢어진 옷자락, 옆구리에서 덜렁거리는 시커먼 검. 모든 게 눈에 걸린 장한은 톡 쏘는 어조로 답했다.
“이곳은 손님을 받는 곳이 아니오. 그러니 길을 따라서 내려가시오. 오십 리 정도 내려가면 화전민촌이 하나 나올 것이니 그곳에 부탁해 보시오.”
냉정한 축객령.
자신이 이런 대접을 받을 거라 언제 상상이나 했던가.
북궁천은 이마를 찌푸렸다.
‘인정머리도 없군.’
북천궁이 패를 중시해서 마도로 낙인찍혔다 해도, 찾아온 손님을 이렇게 냉정하게 쫓아내지는 않는다.
손님이 찾아왔으면 말이라도 쉬었다 가라고 하는 게 사람 사는 세상의 인정 아닌가?
그런데 세상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각박하고 냉정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일. 그는 한 번 더 부탁해 봤다.
조금 더 부드럽게.
“하루만 쉬었다 가게 해 주시오.”
“글쎄, 안 된다고 했잖소. 사부님이 아시면…….”
그가 손을 저으며 귀찮다는 투로 말할 때였다.
“내가 알면 뭐가 어때서?”
태극당(太極堂)이라는 현판이 매달린 가운데 건물에서 한 사람이 방문을 열고 나오며 그의 말을 잘라먹었다.
희끗한 수염이 가슴까지 길게 늘어진 노인이었다.
노인은 장한의 입을 막고 절벽 쪽으로 걸어와서 북궁천을 내려다봤다.
“어디서 왔는가?”
북궁천은 상대가 노인인 만큼 좀 더 예의를 갖춰서 대충 둘러댔다.
“집은 상곡입니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중인데 길을 잘못 들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허, 멀리서도 왔군. 내 솔직히 말하겠네. 먼 곳을 가던 길이면 노자가 제법 있을 것 같은데, 객잔에서 쉬는 셈 치고 조금만 기부하게. 보다시피 이렇게 깊은 곳에 살다 보니 이래저래 모자란 것이 많구먼.”
노인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당당한 말투로 북궁천에게 돈을 요구했다.
북궁천은 난감했다.
쉬려면 돈을 내라, 그 말이었다.
표정으로 봐선 돈을 내지 않으면 장한보다 더 냉정하게 거절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에게는 줄 돈이 없었다.
노인은 그의 표정만 보고도 사정을 눈치챘다.
“험, 미안하네만 사정이 안 되면 나도 별수 없다네. 인정을 베풀고 싶어도 당장 우리가 힘들어서 말이야.”
북궁천은 냉정하게 돌아서는 노인을 보며 허리춤의 검을 만지작거렸다.
묵혼은 명검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것이면 돈 대신 노인을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단화린의 마지막 흔적을 그렇게 넘겨줄 수는 없는 일.
‘후우, 어떻게 오늘 밤만 견뎌 보자. 민가가 오십 리 밖에 있다 했으니 내일이면 찾을 수 있겠지.’
한숨을 쉰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 문득 품속에 든 물건 하나가 떠올랐다.
술 마실 때는 물론이고 잠잘 때조차 그 물건은 항상 그의 품속 깊숙이 들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품속 깊숙이 손을 넣어 그 물건을 꺼냈다.
손바닥 크기. 몸체는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고, 둘레에 푸른색 보석이 촘촘히 박혀 있는 영패 하나.
그것은 다름 아닌, 북천궁의 주인을 상징하는 북천령(北天令)이었다.
지금은 그저 금덩어리에 보석이 박힌 값비싼 물건일 뿐이지만.
‘내가 뭘 하려는지 그 노인네들이 알면 난리 나겠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매단 그는 허리춤에서 검을 빼들었다. 그리고 북천령을 바위 위에 올려놓고서 귀퉁이를 내리쳤다.
손톱만 한 조각 하나가 북천령에서 떨어졌다.
그는 노란 금 쪼가리를 집어 들고 전각 쪽으로 내밀었다.
“이거면 되겠습니까?”
돌아섰던 노인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석양빛을 받아서 더욱 노랗게 빛나는 금 쪼가리를 본 그는 눈이 동그래졌다.
“저, 정한아, 네가 내려가서 확인해 봐라.”
나 몰라라 하고 있던 장한도 절벽 가장자리까지 바짝 와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노인의 명령이 떨어지자 줄사다리를 내리고는 밑으로 내려왔다.
잠시 후, 금 쪼가리를 이로 깨물어 본 장한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노인에게 소리쳤다.
“사부님! 진짠데요? 족히 반 냥은 될 것 같습니다!”
“그래? 뭐 해, 그럼! 어서 모시고 올라와야지!”
금쪼가리 반 냥이 모든 상황을 바꾸어 놓았다. 어쩌면 그보다 더 큰 금덩이가 있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허허허, 나는 진자방이라 하네. 그런데 정말 훤칠하게 생긴 공자군.”
노인, 진자방은 세상에서 가장 인심 좋은 사람처럼 웃으며 차를 권했다.
“마셔 보게. 이곳에서만 나는 특산차지. 마침 우리도 저녁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네. 곧 식사를 내올 것이니 마음껏 먹고 편히 쉬게나.”
북천령 조각과 바꾼 평온.
엄청나게 비싼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북궁천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두 분만 사십니까?”
“아니네. 노부의 제자는 모두 넷인데, 셋은 지금 강호 경험을 쌓기 위해 밖에 나가 있다네. 아마 닷새 정도 지나면 돌아올 거야.”
북궁천이 그런 질문을 한 것은, 이곳에서 요상을 하며 머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노인의 대답대로라면 닷새 동안은 둘밖에 없다는 말 아닌가.
“괜찮으시다면 며칠간 머물고 싶습니다만.”
금덩이를 들고 온 복덩이다. 며칠이 아니라 몇 달이라도 괜찮았다.
물론 그러려면 한 조각 더 받아야겠지만.
“허허허허, 걱정 말게. 나도 그리 야박한 사람은 아니라네. 지내고 싶은 만큼 지내게나.”
진자방은 냉정하게 축객령을 내렸던 때가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걸 다 잊었다는 듯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북궁천은 그런 진자방이 싫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다 드러내는 그가, 속에 독을 품고 있는 자들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신세는 무슨, 허허허. 정한아! 식사 준비 아직 멀었느냐? 손님 것까지 함께 차리도록 해라.”
4장. 태극문의 제자들
문틈을 뚫고 쏘아진 아침 햇살이 화살처럼 얼굴에 꽂혔다.
북궁천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전날보다 몸이 훨씬 편하게 느껴졌다.
‘며칠만 더 하면 공력을 오성까지는 받아들이겠군.’
공력의 오성만 움직일 수 있어도 회복 속도가 빨라질 것이다.
‘급하게 마음먹지 말자. 그 사이 려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진 않겠지.’
그는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대주천을 시작했다.
이정한이 그를 부른 것은 그로부터 한 시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이보쇼, 식사하쇼.”
아침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던 중 진자방에게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은 항산 북쪽 자락이었다. 서쪽으로 백오십 리 떨어진 곳에 대동이 있다고 했으니, 장성을 넘어 백 리 이상 남하한 셈이었다.
진자방과 네 명의 제자는 천 년 전통을 자랑하는 역사 깊은 문파, 태극문(太極門)의 제자라고 했다.
진자방은 삼십팔 대 문주고.
“오백 년 전만 해도 꽤나 유명했다네. 태극신검이라 불리던 십팔 대 문주께서 중원으로 떠난 후 돌아오지 않는 바람에 비전의 신공들이 절전되어서 지금은 이렇게 초라하게 명맥만 이어 오지만 말이야. 그래도 우리는 실망하지 않고 예전의 신공들을 되살리려고 노력하고 있지.”
진자방이 아득한 과거를 되새기며 꿈꾸는 어조로 말했다.
노력을 했는데도 수백 년 동안 이런 상태라니. 그렇다면 그전에도 그다지 대단할 것은 없었나 보다.
하지만 북궁천은 진자방의 말에 장단을 맞춰 주었다.
“부디 신공을 되찾아서 번창하시기 바랍니다.”
“허허허, 되찾아야지. 반드시 되찾아서 다시 일어날 거네. 제자가 비록 네 명밖에 안되지만, 모두 괜찮은 자질을 가지고 있거든.”
그것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말이었다.
다른 사람은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이정한은 자신이 봐도 상승무공을 익히기에 아주 좋은 신체조건이었다.
그런데 희망과 아쉬움이 뒤섞인 어조로 한참 말을 이어 가던 진자방이 느닷없이 북궁천에게 물었다.
“자넨 사문이 어떻게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