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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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6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8화
8화
색이 변하는 곳은 그가 혀를 댄 곳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사이, 하얗게 변해 가던 곳이 서서히 녹더니 작은 구멍이 생겼다.
그리고 그 구멍 속에서 붉고 끈적끈적하게 보이는 액체가 조금씩 흘러나왔다.
점점 커지는 구멍. 갈수록 흘러나오는 양이 많아지는 액체.
어떻게 할까?
복용해? 참아?
잠시 망설이던 그는 의견을 묻기 위해 단무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단무영은 무아의 경지에 들어서 있는 듯 호흡조차 거의 멎어 있었다.
북궁천은 다시 알을 바라보며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알에서 액체가 이 할가량 빠져나온 상태, 탱탱하던 알이 쪼그라들고 있다. 이대로 놔두면 곧 알에 든 모든 액체가 빠져나올 것 같다.
그는 손가락으로 액체를 찍어서 입에 넣어 봤다.
그 상태에서 속으로 열을 세었다.
극독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열을 세도록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화령금각사의 내단은 아니더라도 몸에 해가 되는 물건은 아닌 듯하다.
‘훗, 이런 알 하나 때문에 갈등을 하다니. 나답지 않군.’
결심을 굳힌 그는 알을 집어서 입안에 넣고 삼켰다.
제법 커다란 알이 미끄러지듯 목구멍을 통과했다.
그는 단무영의 운공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구석으로 자리를 옮긴 후 가부좌를 틀었다.
잠시 후, 뱃속에서 꾸르륵거리며 거품이 이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은은한 열기가 피어났다.
그는 단전의 진기를 움직여서 신(身)과 기(氣)를 일치시키고 열기를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열기가 부드러워서 받아들이는 데 지장이 없었다.
포근한 열기, 기분 좋은 느낌. 마음마저 평온해졌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열기가 점점 거세졌다.
그리고 얼마가 지나자 견디기 힘들 정도로 뜨거워졌다. 단순히 뜨거운 것이 아니라 숫제 불붙은 숯덩이를 삼킨 것 같았다.
‘뭐, 뭐야? 이거 왜 이래? 흐읍!’
온몸이 불에 타는 것 같은 극렬한 고통!
이를 악문 북궁천의 몸이 덜덜 떨렸다.
이제는 중단할 수도 없는 상황. 그는 지옥 불에 던져진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운기했다.
생사의 외줄타기를 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온몸이 시뻘게지며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뿌연 김이 땀구멍을 통해서 흘러나와 안개처럼 그의 몸을 뒤덮었다.
고통이 한계를 넘어선 순간.
‘끄윽!’
그는 이를 악문 채 정신을 잃었다.
무아지경에서 깨어난 단무영은 느닷없이 느껴지는 열기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떴다.
‘왜 이리 따뜻하지?’
가을의 아침은 따뜻하지 않다. 산속은 더하다. 그런데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다니.
그는 열기의 근원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북궁천이 한쪽 구석에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열기의 근원은 바로 그곳이었다.
“주군?”
단무영은 북궁천을 부르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 바닥에 놓인 빈 상자가 보였다.
‘저건 육대기가 주군께 던져 준 것인데?’
안이 비었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 안의 물건을 취했다는 말.
단무영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하고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주군께서 저 안에 든 것을?’
급히 북궁천에게 다가간 그는 축 늘어진 손을 잡고 상태를 살펴보았다.
후끈한 열기가 몸 안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절대 정상적인 열기는 아니었다.
그는 맥문을 통해 자신의 진기를 밀어 넣고 전체적인 상황을 알아보았다.
곧 그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너무 강한 기운에 충격을 받아서 내상이 더 악화되었어. 도대체 뭘 복용하신 거지? 저 안에 뭐가 들어 있었던 거야?’
의문을 풀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맥문을 놓고 북궁천의 뒤로 돌아간 그는 북궁천의 명문혈에 두 손을 포개어서 얹었다.
이대로 놔두면 경맥이 터져 버릴지 모른다. 잘못되면 반신불수, 최악의 경우 목숨마저 위험해질 수 있다.
‘그리되도록 놔둘 순 없어!’
그는 자신의 진기를 흘려 넣어서 북궁천의 주요 경맥을 감싸고 열기에서 보호했다.
그러한 일은 경맥에 진기를 잔류시켜야 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진기 요상과 달리 엄청난 공력이 필요했다.
단무영의 공력이 절대지경에 근접할 정도로 고강하다 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그 역시 내상을 입은 상태가 아닌가. 자칫 잘못하면 북궁천을 구하려다가 자신의 공력이 영원히 소실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공력을 쏟아부었다. 만약 그것으로도 모자란다면 선천진기를 끌어내서라도 북궁천을 구해야 했다.
단무영이 북궁천의 명문혈에서 손을 뗀 것은 만 하루가 흐른 후였다.
웩!
핏덩이를 한 움큼 토한 그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백짓장보다 더 창백한 얼굴. 그러나 그의 눈빛만은 그 어느 때보다 만족감에 차 있었다.
‘됐어. 이제 위기는 넘겼다.’
북궁천을 눕혀 놓은 그는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힘겹게 두 자가량 뒤로 물러났다.
선천진기를 바닥까지 모조리 쏟아 내서 일어날 기운도 없었다. 그나마 그 정도로 그친 것이 다행이었다.
만약의 경우, 최후에는 목숨을 내놓고 잠력까지 폭주시킬 각오였으니까.
북궁천에게서 떨어진 그는 눈을 감고 운공을 행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씁쓸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공력이 모이지 않았다.
예상 못한 바는 아니지만 막상 공력 소실이 현실로 드러나자 마음이 착잡했다.
한참 동안 허공을 바라보던 그는 이를 지그시 악물고 북궁천의 옷자락을 찢었다. 자신의 옷은 검어서 글을 쓸 수가 없으니까.
그는 자신이 토해 낸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서 그 위에 몇 자 적었다.
조금만 있으면 북궁천이 깨어날 것이다.
지금의 자신은 북궁천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도움은커녕 커다란 짐만 될 터, 그가 깨어나기 전에 이곳을 떠날 작정이었다.
옷자락에 몇 마디 말을 남긴 그는 옆구리의 검을 풀어서 북궁천의 머리맡에 세워 놓았다.
그 검은 자신의 목숨과 같았다. 검을 놓고 간다는 것은 목숨을 놓고 간다는 뜻.
북궁천이라면 자신이 검을 놓고 가는 이유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떠날 준비를 마친 그는 북궁천을 내려다보았다.
‘주군은 모를 거요. 내가 주군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북궁천이 걸음마를 시작할 때 지옥 수련을 위해서 수련동에 들어갔다.
북궁천이 목검을 처음으로 잡은 세 살 때 수련동을 나와서 그의 그림자가 되었다.
그 후 고독한 그림자 생활 이십여 년. 북궁천의 삶은 곧 자신의 삶이었다.
북궁천이 즐거우면 자신도 즐거웠고, 북궁천이 가슴 아파하면 자신도 가슴이 아팠다.
자신에게 북궁천은 주인이며, 동생이며, 조카였다.
모든 것을 줘도 아깝지 않은 이 세상의 오직 한 사람.
‘주군은 내 모든 것이라오.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되어도 미안해하지 마시구려.’
언뜻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고백하는데, 사실 그날 일은 나 때문이라오. 내가 원로들의 말을 듣고 주군의 술에 장난을 쳤소. 그동안 미안해서 들 낯이 없었는데, 이렇게라도 빚을 갚게 되어 정말 다행이오.’
그는 벽을 짚고 힘겹게 일어났다. 그리고 통나무를 붙여 만든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짙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아무래도 가을비가 내릴 것 같았다.
‘비 피할 곳을 찾으려면 서둘러야 할 것 같군.’
* * *
사람들이 다 아버지를 비웃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밝게 웃으며 사랑을, 어머니를 택했다.
천년만년 누릴 것도 아닌 제왕의 권력 따위, 영원히 간직할 사랑에 비하면 태양 아래 날아다니는 반딧불밖에 안 된다면서.
조부의 협박 섞인 반대가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태어났다.
나는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절대 아버지를 닮지 않을 거라 결심했다.
―나는 아버지와 달라! 북천의 패왕으로 우뚝 서고 말 거야! 사랑 따위가 무슨 소용이야!
말끝마다 그렇게 외쳤다.
그런데 아니었다.
얼마 전에서야 깨달았다.
나 역시 아버지의 자식이란 걸.
세상에는 천하보다, 권력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걸.
“려려…….”
북궁천은 잠꼬대처럼 헌원려려를 부르다 말고 차가운 느낌에 실눈을 떴다.
툭! 툭!
빗방울이 이마를 때리고 있었다.
머리를 흔든 그는 떨어지는 빗물을 피해서 몸을 옆으로 굴렸다.
쏴아아아아.
통나무집의 지붕을 사정없이 두들기는 가을비 소리가 고막을 울린다.
그제야 북궁천은 자신이 살아 있으며, 지옥과 같은 열기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래, 살았군!’
회심의 미소를 지은 그는 몸을 일으켰다.
몸이 전보다 부드러웠다. 고통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충격을 받아 갈기갈기 찢긴 근육과 신경이 뜨거운 열기에 녹아서 원상태로 달라붙은 듯했다.
만족한 그는 운기를 해 보았다.
엉망일 정도로 약화되었던 경맥이 전보다 훨씬 강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직 완전치는 않아서 삼성의 진기를 움직이자 미미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한 달 이상 요상에 집중해도 이 이상의 회복을 바라기 힘들 거라 생각했거늘.
“그런데 단숙은 어딜 갔지? 먹을 것을 구하러 갔나? 주위를 둘러보러 갔나?”
북궁천은 중얼거리며 안을 둘러보았다. 그때 벽에 기대어 놓은 검이 보였다.
눈에 익은 검. 단무영의 묵혼(墨魂)이었다.
한참 동안 묵혼을 바라보던 북궁천의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자신이 그의 존재를 안 이십여 년 동안 그는 몸에서 검을 떼어 놓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묵혼은 단무영의 가문인 단가장의 신물이자, 단무영의 생명이었다.
검을 놓고 갔다는 것은 그의 모든 것을 놓고 갔다는 뜻.
급히 몸을 일으킨 그는 문을 열어 보았다.
가을비에 온 산이 다 젖어 있었다.
북궁천은 초조한 마음으로 소리쳐 불렀다.
“단숙!”
그의 목소리는 곧 빗소리 속에 파묻혀 버렸다.
그는 두어 번 더 불러 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홱, 고개를 돌린 그는 벽에 세워져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그가 찢어진 옷자락을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안으로 들어간 그는 옷자락을 낚아채듯이 집어 들었다.
가로세로 한 자 넓이의 옷자락에는 검붉은 빛이 도는 글자가 빽빽이 쓰여 있었다.
세상은 주군께서 아시는 것보다 훨씬 넓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만끽하십시오. 그리고 그녀도 꼭 찾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물 맑고 경치 좋은 곳으로 놀러가니 찾지 마십시오. 검은 제 선물입니다. 아, 그리고 제 본명은 단화린입니다. 강호행에 필요하면 주군께서 사용하십시오. 이 세상에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북궁천의 눈빛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정말, 정말 내 곁을 떠난 건가?’
어릴 적, 단무영은 어둠 속에서 항상 자신을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자신의 마음을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애처로운 듯했다.
몇 달 전쯤에는 술에 취한 자신을 안아서 침상으로 옮긴 적도 있었다.
정신이 들었으면서도 모른 척했다.
어릴 때는 무공을 수련하다 지쳐서 쓰러지면 단무영이 가끔 안아서 침상으로 옮기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열 살 이전까지의 일. 열 살 이후 그의 품에 안겨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때 그가 들릴 듯 말듯 중얼거렸다.
“저는 너무 완벽한 주군보다 지금과 같은 주군이 더 좋습니다.”
그는 패왕, 마제보다 순수한 북궁천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북궁천의 가슴이 차갑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사람.
그런데 그가 떠났다.
왜?
정말로 물 맑고 경치 좋은 곳으로 놀러갔을 리는 없었다.
단무영이 그를 아는 만큼 그도 단무영을 알았다. 그는 정신을 잃은 자신을 놔두고 놀러 갈 사람이 아니었다.
문득 어떤 생각이 든 북궁천은 급히 진기를 움직여 봤다.
몸속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진다.
자신의 기운은 극강의 패왕지력. 그런데 그 안에 극유의 기운이 섞여 있다.
단무영의 기운!
그제야 모든 것을 깨달은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런 멍청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