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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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7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7화
7화
한편.
북궁천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빤히 바라보며 땅에 박힌 발을 빼냈다.
퉤!
입안에 고인 피를 뱉어 낸 그는 진기를 일주천시켰다.
역류하는 기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긴 했지만 혈도 몇 군데의 경맥이 엉망이었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심각한 내상을 입다니.
아무리 몸 상태가 엉망이라 해도, 상대가 금황신군 관호명이라 해도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대원로가 알면 방방 뜨겠군. 아니지, 좋아하려나?’
자신의 무단외출을 수습하면서 이를 갈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마 자신의 지금 상황을 알면, 그러게 누가 술독에 빠져 살라고 했냐면서 꼴좋다고 할지 몰랐다.
아니면 팔다리가 부러지지 않은 걸 아쉬워할지도 모르고.
그래도 한 가지는 배웠다.
세상이 결코 만만한 곳은 아니라는 걸.
‘하긴 만만한 곳이면 재미가 없지.’
그때 흑포복면인, 단무영이 북궁천에게 다가갔다.
“저는 육대기의 혈도를 풀어 줬을 뿐입니다. 뭐라고 하지 마십시오.”
북궁천은 그를 째려보았다.
그의 간섭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장기를 버리고 정면으로 붙으면 어쩌자는 거야? 그가 나와 싸우느라 내상을 입었기에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잖아?”
단무영도 모르지 않았다. 자신의 신법이라면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정면으로 붙은 것은, 자신이 조금이라도 관호명에게 충격을 주면 북궁천이 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무영은 굳이 변명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제가 부축하겠습니다, 주군. 가시지요.”
자존심이 상한 북궁천은 손을 흔들어 단무영의 도움을 거절했다.
“괜찮아. 이 정도로는 끄떡없어. 제길, 나오자마자 이게 무슨 꼴이야.”
“독한 술을 너무 오랫동안 마셨습니다. 그러게 제가 술 좀 적당히…….”
“잔소리 그만하고 가.”
툭 쏘아붙인 북궁천은 어깨를 펴고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속이 울렁거리고 전신이 저릿저릿했다. 하지만 단무영에게 잔소리를 듣기 싫어서 꾹 참고 걸었다.
‘다른 건 다 좋은데, 잔소리가 많단 말이야.’
그 즈음, 육대기는 관호명이 쫓아오는 모습을 보고 모든 것을 포기했다.
십오륙 장에 이르던 거리가 순식간에 삼 장으로 좁혀진 상태였다. 더 가 봐야 몇 발짝 못 가고 잡힐 터.
“여기 있소! 이게 진짜요! 그러니 그만 나를 놔 주시오!”
그는 북궁천에게 던져 주었던 것과 비슷한 상자 하나를 뒤로 던지고는 전력을 다해서 달렸다.
관호명은 날아드는 상자를 낚아챈 후 재빨리 열어 보았다.
오리알 크기의 알 하나가 은은한 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풍기는 기운으로 보아 사중지왕(蛇中之王)이라는 화령금각사의 내단이 분명해 보였다.
“진짜로 이놈이 갖고 있었군. 하마터면 속을 뻔했어.”
조금 전 육대기의 연기는 완벽했다. 그 상황에서 설마 거짓말을 할 줄 누가 알았으랴.
‘이제 그 아이를 살릴 세 가지 영약을 모두 구한 건가?’
관호명은 안도하며 조심스럽게 상자를 품속에 넣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자신을 곤경으로 몰아넣은 청년이 흑포인과 함께 숲 사이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관호명의 눈빛이 잘게 떨렸다.
최근 오 년 내에 가장 힘든 싸움이었다. 몸을 원상태로 되돌리려면 한 달 이상 정양해야 할 듯했다.
‘누군지 모르겠군. 이제 이십 대로 보이는데 나와 비등한 실력이라니.’
말투로 봐서는 산서 북부나 관외의 사람이 분명했다.
관외에 젊은 고수가 두엇 있다는 소문을 듣긴 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대세력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자들. 혼자서 외진 곳을 돌아다닐 리 없었다.
더구나 행색을 봐도 그들과 일치하지 않고, 펼친 무공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특별할 게 없는 겉모습과 달리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 성격을 지닌 청년.
삼십 년 강호를 종횡한 그로 하여금 판단에 혼란을 주는 저 청년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궁금함을 참지 못한 그가 소리쳐 물었다.
“그대 정도의 실력이면 이름이 알려져 있을 터, 정말 이름을 알려 주지 않을 생각인가!”
막 숲 속으로 들어가던 북궁천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삼십여 걸음을 걷다 보니 속이 울렁거렸다. 그래도 자존심 때문에 꾹 참고 걸었는데, 덕분에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쉬게 해줘서 고맙긴 한데, 이름을 아는 건 포기하셔.’
그는 이름을 알려 주는 대신 그저 씩 웃어 주었다.
관호명은 그 웃음을 보고 미간을 찡그렸다.
‘젊었을 때의 나보다 더 오만한 놈이군.’
목적을 완수한 이상 더 이상의 다툼은 무의미한 일. 또 다른 자가 나타나기 전에 떠나야 했다.
“중원에 올 일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라! 오늘 못 다한 승부는 그때 가리도록 하지!”
그는 북궁천을 향해 냉랭히 말하고는 몸을 날렸다.
그 말에 북궁천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야. 그때 가서 오늘 한 말을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숲 속으로 들어간 북궁천은 이를 악물고 백여 장을 걸어갔다.
그 정도가 한계였다.
걸음을 멈춘 그는 허리를 숙이고 입을 벌렸다.
웩!
시커먼 죽은피가 한 움큼 쏟아졌다.
속이 시원하긴 한데 기운이 쭉 빠졌다.
게다가 온몸의 근육과 신경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 대고, 손가락 끝은 주독이 오른 사람처럼 잘게 떨렸다.
‘빌어먹을, 생각보다 더 심하군.’
소매로 입술에 묻은 피를 쓱 닦은 그는 단무영을 돌아다보았다.
“단숙, 나 좀 부축해 줘.”
“괜찮다면서요?”
“그땐 관호명이 보고 있었잖아. 숲 속에서 훔쳐보는 자들도 있었고.”
단무영의 검은 복면 속 눈 옆에 주름이 그어졌다.
그걸 본 북궁천이 눈을 치켜떴다.
“지금 나를 비웃는 거야?”
“제가 어찌 감히! 슬픈데 울지는 못하고 참는 겁니다. 마제께서 남의 눈치를 보시다니, 참으로…….”
“뭐?”
“가시지요.”
단무영은 재빨리 북궁천의 옆구리를 붙잡고 몸을 날렸다.
3장. 떠나고 만나고
어둠이 밀려들 무렵.
단무영과 북궁천은 썩어서 금방 무너질 것 같은 통나무집을 하나 찾아냈다.
단무영은 북궁천을 부축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무 썩는 퀴퀴한 냄새, 짐승의 배설물이 후각을 자극했다.
서너 사람이 누우면 꽉 찰 정도로 좁은 공간. 바닥도 반쯤 썩어 있어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부석거리며 부서졌다.
하지만 두 사람은 실망하지 않았다.
이슬과 바람을 피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어딘가.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그는 북궁천을 벽에 기댈 수 있도록 앉혔다.
북궁천은 식은땀을 흘리며 벽에 등을 기댔다.
안기다시피 해서 이동했는데도 근육과 신경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는 듯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신음 한 마디 내뱉지 않았다.
잔소리를 듣기도 싫었고, 그 정도 고통은 어릴 때 숱하게 겪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어느 정도 요상을 하면 나을 수 있으니 걱정할 것도 없었고.
그가 정말로 우려하는 문제는 경맥이었다.
십이경맥과 기경팔맥은 술독에 빠져 사는 동안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관호명과 겨루며 강력한 진기를 무리하게 유동시켰으니 당연히 이상이 있을 수밖에.
아니, 이상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엉망진창이었다. 자칫하면 상당한 공력 손실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를 정도의 내상.
자존심을 지킨 대가치고는 너무 큰 손실이었다.
“제가 도와 드릴 테니 운공을 해 보십시오, 주군.”
단무영이 넌지시 북궁천에게 말했다.
그는 부축한 상태에서 이미 북궁천의 몸 상태를 살펴본 터였다.
내상이 겉보기보다 훨씬 심각했다.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
북궁천은 거부하지 않고 몸을 돌려 가부좌를 틀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마다하겠지만 단무영만은 예외였다.
그는 자신이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부터 그림자처럼 살아온 사람이다.
이인일체, 마제의 몸에 손을 댈 수 있는 유일무이한 사람.
단무영은 북궁천이 운기행공을 시작하자 명문혈에 우수를 얹었다.
운기행공은 날이 샐 때까지 계속되었다.
동이 틀 무렵.
“후우우우우우.”
두 차례의 대주천을 끝낸 북궁천이 길게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눈빛이 잘게 떨렸다.
예상대로였다. 단무영이 도와주었는데도 운기행공이 쉽지 않았다.
밤새 대주천을 겨우 두 차례 했을 뿐. 그 정도만으로도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었다.
그나마도 단무영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대주천 자체도 어려웠을지 몰랐다.
‘나으려면 적어도 한 달은 걸리겠군.’
북궁천은 착잡한 표정으로 단무영을 돌아다보았다.
단무영도 관호명과의 삼초 대결로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 상태로 자신을 안고 삼십 리 산길을 달렸다.
그리고 밤새 자신을 도와준 후 이제야 운기행공을 하고 있었다.
‘단숙, 나를 이해해줘서 고마워.’
단무영의 말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북천궁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을 것이다.
어제 같은 경우만 해도, 그가 곁에 있었기에 이 정도로 그칠 수 있었다.
‘려려를 찾게 되면 운명의 굴레를 풀어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
잔잔한 눈빛으로 단무영을 바라본 그는 볼일을 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전신이 저릿저릿했다. 그래도 밤새 대주천을 하며 몸을 다스린 덕분인지 움직이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그런데 그가 일어나기 위해 몸을 숙였을 때였다.
툭.
뭔가가 바닥에 떨어지더니 두어 바퀴 굴러서 통나무와 통나무 사이에 박혔다.
북궁천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떨어진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겉에 기름 먹인 가죽을 덧댄 작은 상자. 육대기가 그에게 던져 준 상자였다.
다시 주저앉은 그는 그 상자를 집어 들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육대기는 도주하면서 관호명에게 또 하나의 상자를 던져 주었다. 그리고 그게 진짜 화령금각사의 내단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상자 안에는 내단이 없다는 말.
한데도 상자 안의 물건에 묘한 흥미가 일었다.
상자 안에 쓸모없는 물건이 들어 있다면 육대기가 왜 가지고 다녔을까?
더구나 그는 다급한 표정으로 안에 든 것이 깨질 수 있다고 했다.
그때의 그 표정만큼은 절대 거짓이 아니었다. 그가 천하제일의 거짓말쟁이라면 몰라도.
아마 그때의 그 말이 거짓이라면, 그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속일 수 있는 사기꾼이 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결국 이 상자 안에는 그가 걱정할 만한 뭔가가 들어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물건은 강한 충격을 받으면 파손되는 것임이 분명했다.
북궁천은 상자를 흔들어 봤다.
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무게로 봐서 빈 상자는 아니었다.
잠시 상자를 내려다본 그는 고리를 묶어 놓은 매듭을 풀었다. 그리고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을 반짝이며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깨끗한 천으로 감싼 뭔가가 들어 있었다. 그 물건의 주위는 솜으로 채워져 있어서 어지간한 충격에도 끄떡없을 듯했다.
북궁천은 엄지와 검지로 조심스럽게 천을 벗겼다.
한 겹 한 겹 벗겨지며 물건이 점점 작아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다섯 번째 천을 벗기자, 은은하게 붉은빛이 도는 알 하나가 나타났다.
크기는 크지 않아서 꿩알만 했다. 반투명한 겉은 단단하지 않고 부드러웠다.
북궁천은 붉은빛이 도는 알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대체 이게 무슨 알일까?
‘설마 이게 진짜 화령금각사의 내단?’
아닐 확률이 더 컸다.
관호명은 육대기가 준 상자 안의 물건을 확인하고 더 이상 육대기를 쫓지 않았다.
자신보다 화령금각사의 내단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아는 그가 말이다.
그럼 이것은 뭘까?
북궁천은 알을 코 가까이 대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비릿함 속에 약간 구수한 향기가 섞여 있었다.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알을 눌러 보았다.
알은 아주 단단하지도, 물렁하지도 않았다. 손을 떼자 살짝 눌렸던 곳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마지막으로 혀를 내밀어서 혀끝으로 알을 살짝 핥아 보았다.
비린 맛이 나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시큼한 맛이 났다. 마치 덜 익은 매실을 깨문 것처럼.
‘대체 이게 뭐지?’
북궁천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알을 쳐다보았다.
평범한 알을 이렇게 다섯 겹의 천으로 싸고 솜으로 보호하진 않았을 터. 예사롭지 않은 것임은 분명한데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궁금하다고 해서 당장 알아낼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도 그가 미련을 가지고 계속 쳐다보는 이유는 자신의 몸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치료에 도움이 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언제까지 바라보고만 있을 순 없는 일. 그는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궁금증을 접었다.
그런데 그가 알을 다시 싸려고 천을 잡았을 때였다.
알의 한쪽이 점점 하얗게 변해갔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