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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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27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3화
3화
다음 날 새벽.
술이 깬 북궁천은 헌원려려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처연한 눈빛으로 찢어진 옷을 추스르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있는 그녀의 다리 밑에 번져 있는 옅은 핏기.
말라붙은 눈물로 범벅된 얼굴은 너무 고요해서 겁이 날 정도다.
‘이런, 빌어먹을!’
북궁천은 머리를 움켜쥐고 이를 악물었다.
헌원려려의 몸과 마음을 모두 얻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그것은 마제의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하룻밤 만에 모든 것이 무너졌다.
술기운에 사랑하는 여인을 강제로 취한 놈이 마제는 무슨!
자괴감이 든 그는 모든 결정을 헌원려려에게 맡겼다.
“려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남고 싶으면 남고…… 가고 싶으면 가고.”
마음은 붙잡고 싶었다. 미안하다며 사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북천의 패왕, 마제니까.
마제는 천하의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여선 안 되니까!
그날 오후.
헌원려려는 조용히 북천궁을 떠나갔다.
* * *
헌원려려가 떠나자 북궁천은 매일 술을 친구 삼으며 그녀를 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잊으려 하면 할수록 그녀를 갈구하는 마음은 더욱 강해졌다.
그 바람에 단무영만 고달팠다. 하루도 빼지 않고 그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으니까.
“단숙이라도 말렸어야지!”
“단둘이 있을 때는 피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이상하다 싶으면 들어왔어야 할 거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남자와 여자가 이상한 일을 하는 곳에 들어갔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라고?
‘다음에는 필히 들어가죠.’
단무영은 속으로만 다짐하고 대충 둘러댔다.
“옆 건물에 있는 음혼선자의 방에서 나는 소린 줄 알았습니다.”
북궁천은 허공을 한 번 째려보고 잔에 술을 채웠다. 거짓말이라는 걸 뻔히 알지만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단무영은 독한 술을 쉴 새 없이 목구멍에 털어 넣는 북궁천을 보고 넌지시 말했다.
“술을 좀 약한 걸로 드십시오, 주군. 안주도 좀 드시고. 그렇게 독한 술만 드시다가는 몸 상합니다.”
“걱정 마! 이 정도로 죽진 않으니까. 왜 이리 술이 물 같아? 좀 더 독한 술 없나? 그날 마신 술은 정말 독하던데.”
흠칫한 단무영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날 마신 술이 유난히 독했던 이유를. 북궁천의 부동심이 흔들린 까닭을.
‘제길, 그 영감들을 끝까지 말렸어야 했는데…….’
* * *
술독에 빠진 지 일 년이 지나자, 북궁천의 몸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이 피폐해졌다.
절대지경의 고수가 그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이 불가사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대호처럼 당당한 체구였던 그는 몸과 볼이 홀쭉해졌다. 두 눈도 휑하니 들어가서 일 년 만에 본 사람은 못 알아볼 정도였다.
북천의 대지를 폭풍처럼 휩쓸던 북천마제의 위용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상태.
야망도, 패기도 사라져 버린 그의 모습은 많은 사람을 실망시켰다.
그때부터 북천궁 내부 깊숙한 곳에서 그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세상에! 마제께서 약도 없다는 상사병에 걸리다니.
― 정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군. 역시 아직은 어려.
― 나 원, 창피해서. 마제께서 저러면 본 궁의 체면이 뭐가 되나?
하지만 북궁천의 곁에 북천사룡이 눈을 부릅뜨고 있어서 대놓고 말하진 못했다.
북천궁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사대원로는 검원장으로 사람을 보냈다.
“가서 헌원려려를 데려와! 빨리!”
하지만 헌원려려는 오래전에 남쪽으로 떠나가서 태원 이후로는 정확한 행적을 알 수가 없었다.
황하를 건너간 것 같다는데, 그곳까지 사람을 보내기도 마땅치가 않았다.
어차피 헌원려려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사대원로는 그녀를 애써 찾지 않았다.
대신 경국지색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여인들을 데려와 북궁천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북궁천은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을 데려다 줘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에겐 그 어떤 여인도 헌원려려일 수 없었다.
그렇게 여름이 깊어 가던 어느 날.
사대원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를 찾아가 마지막 통보를 하듯이 다그쳤다.
“궁주! 궁주의 체면은 곧 본 궁의 체면이외다! 대체 언제까지 이러실 거요? 계속 이러신다면 우리 원로들도 더 이상 참고만 있지 않을 거요!”
사대원로 중 가장 연장자인 음령노조(陰靈老祖)가 먼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았다.
북궁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술잔만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귀천도(歸天刀) 악사종과 북령일노(北靈一老) 갈태경도 한숨을 쉴 것 같은 표정으로 북궁천을 압박했다.
“숨죽이고 있던 자들이 호시탐탐(虎視眈眈) 본 궁을 노리며 야심을 키우고 있는데, 궁주가 이러시면 어쩌란 말이오?”
“제발 정신 좀 차리시오. 세상에 여자가 어디 헌원려려뿐이오?”
천수마종(千手魔宗)은 용기를 내서 좀 더 강하게 그를 몰아붙였다.
“정 이럴 거면 차라리 궁주 자리를 내놓고 그녀를 찾아서 떠나시구려!”
북궁천은 술잔을 내려놓고 반쯤 열린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에잉, 이거 참…… 여자 하나 때문에 천하의 마제께서 이게 무슨 꼴이오?”
“명심하시오, 궁주. 계속 이러시면 이 늙은이들도 더 이상 궁주를 감쌀 수 없소이다.”
“서시 때문에 망한 오왕(吳王) 부차가 따로 없구려. 그렇게 좋으면 그때 왜 보낸 것인지…….”
사대원로는 짓누르듯 몇 마디 더 하고는 ‘아무리 여자에 미쳤어도 이 정도 했으면 알아들었겠지.’하는 마음으로 궁주전을 나갔다.
그래도 사대원로가 떠난 뒤 찾아온 북천사룡은 젊은 사람들답게 북궁천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가릉효는 유예 기간을 줬다.
“주군,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너무 오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지요?”
냉호는 북궁천의 기분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기분도 풀 겸 요동에서 설친다는 흑사방이나 부수고 올까요?”
그때 장추람이 넌지시 말했다.
“정 뭐하시면, 저희가 가서 헌원 소저를 찾아보겠습니다.”
북궁천이 반응을 보인 것은 장추람의 말이 떨어진 후였다.
고개를 든 그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놔둬.”
북궁천이라 해서 어찌 찾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찾아서 뭐라고 한단 말인가?
몸뚱이만 데려와서 뭐한단 말인가?
“그만 가 봐. 쉬고 싶으니까.”
북천사룡은 착잡한 표정으로 북성전을 나갔다.
북궁천은 그들이 다 나갈 때까지 허공만 바라보았다.
― 그녀를 찾아서 떠나시구려!
천수마종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종소리처럼 울렸다.
하지만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찾아가도 반기지 않을 거야.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왜 왔냐고 하면 뭐라고 하지? 아니, 쳐다보지도 않으면…….’
북궁천이 자신의 마음을 단무영에게 말한 것은 그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가을날이었다.
“단숙, 려려를 만나면 그녀가 어떻게 나올 것 같아?”
“그거야 만나 보면 알겠지요.”
여자와 말도 제대로 나누어 보지 못한 사람에게 물어본 게 잘못이었다.
그래도 자신은, 사정이야 어쨌든 딱지는 뗐는데 말이다.
그 일 때문에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지만.
“만약에 말이야, 내가 궁을 떠난다고 하면 궁주로서 잘못하는 걸까?”
이번에는 바로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북궁천은 허공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열을 셀 즈음 단무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그녀를 찾으러 가고 싶습니까?”
“……그래.”
“그럼 뜻대로 하십시오. 북천에서 마제의 뜻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 * *
선선한 바람이 부는 아침.
온 세상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가을 햇살이 북천궁 서른여덟 채의 전각 지붕을 황금빛으로 뒤덮었다.
어제에 아무리 기분 나쁜 일이 있었어도 오늘의 아침 햇살을 대하면 모든 것이 풀어질 것 같은 싱그러운 날씨.
궁주의 처소인 북성전(北星殿)의 시비 요화도 싱그러운 표정을 지은 채 북성전으로 갔다.
그녀가 북성전에 시비로 배정된 것은 삼 년 전.
당시만 해도 북성전에는 북천을 짓누르는 패왕, 마제가 기거했다.
체구는 마치 음산(陰山)에 산다는 대호처럼 당당했고, 기세는 음산의 대호가 꼬리를 말고 강아지처럼 굴 정도로 위압적이었다.
그런데 이 년 전부터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표정도 부드러워지고, 시녀들에게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우스갯소리도 곧잘 했다. 본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을까 생각될 정도로.
요화는 사실 그때가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 달을 굶어서 비쩍 마른 호랑이처럼 호리호리한 체구, 휑한 눈. 고뇌가 가득 찬 눈빛이 심해처럼 깊긴 해도 전과 같은 위압감을 느낄 수 없었다.
여자가 원수인지, 술이 원수인지…….
‘둘 다 웬수지, 뭐.’
요화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런 궁주를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자를 그리워해서 그렇게 된 궁주를 안타깝게 생각했다.
‘여자를 노리개 취급 하는 놈들은 궁주님을 본받아야 돼.’
그녀는 헌원려려를 시기할 정도로 부러워했으며, 한편으로는 남몰래 매일 꿈꾸었다.
‘혹시 알아? 술에 취한 궁주께서 나를 덮칠지.’
스물다섯 살의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할 자격이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사대원로가 요화를 시비로 뽑은 이유도 그녀가 아름답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녀는 궁주가 손을 내밀기만 하면 언제든지 달려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한 번쯤은 슬쩍 빼는 척해야지. 아냐, 그러다 술이 깨서 돌아서면 어떡해?’
삼 년째 매일 아침이 되면 반복되는 상상을 하며 요화는 북성전 앞에서 옷을 가다듬었다.
경비무사가 쳐다보자 가볍게 엉덩이를 흔들어 준 그녀는 방문에 대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궁주님, 요화이옵니다.”
평소라면 술을 더 가져오라고 하든가, 아니면 코고는 소리가 대답 대신 들려왔다.
가끔은 코 고는 소리 대신 누군가의 이름을 되뇌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고.
려려. 천하의 북천마제를 홀렸다고 소문난 헌원려려의 이름이.
그럼 자신은 술을 더 가져오든지, 아니면 조용히 들어가서 방 안을 치우면 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조용했다. 너무나 조용해서 자신도 모르게 귀를 방문에 가져다 댈 정도였다.
‘어디 가셨나?’
몸이 기울어지며 박처럼 둥근 엉덩이가 완연히 드러났다.
한쪽에 서 있던 경비무사가 그녀의 엉덩이를 가자미눈으로 훔쳐보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요화도 명색이 무공을 익힌 여인. 그녀는 경비무사가 훔쳐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오히려 몸을 더 숙였다.
그리고 경비무사의 가자미눈이 찢어지기 직전, 엉덩이를 씰룩거려서 경비무사를 뒤로 넘어가게 만들고는 방문을 열었다.
‘호호호호, 꼴에 여자 보는 눈은 있어서…….’
자신 있게 엉덩이를 흔들며 안으로 들어간 요화는 궁주의 침상이 있는 곳으로 갔다.
“궁주님, 주무시옵니까?”
하지만 몇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멈칫했다.
이전과 조금 다른 분위기.
뭔가가 이상하다. 침상 위에 궁주가 보이지 않는다.
‘볼일 보러 가셨나?’
그때 문득, 궁주가 항상 질펀하게 술을 마시던 탁자가 눈에 들어왔다.
항상 있어야 할 술병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있긴 했는데 달랑 하나뿐이었다. 최소 열 병은 넘어야 하거늘.
저녁 담당 시비인 소소가 벌써 치웠을 리는 없었다. 그년은 게으른데다가, 얼마 전 괜찮게 생긴 무사 하나를 건져서 매일 밤 천당 구경 가기에 바쁘니까.
물론 자신도 그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보다 큰 꿈을 위해서 꾹 참고 있는 중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그녀가 의아해하며 탁자로 다가가는데 술병에 눌려 있는 하얀 뭔가가 보였다.
반듯하게 접힌 종이. 누군가가 보길 바란 듯 탁자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요화는 무심코 손을 뻗어서 술병을 치우고 서신을 들었다.
그리고 혹시 자신에게 남긴 연서가 아닐까 하는 허황된 꿈을 꾸면서 서신을 펴 보았다.
‘말로 하기 힘드니까 글로 남길 수도 있잖아?’
그럼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녀는 서신을 편 순간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사대원로 보시오.
술을 끊기로 했소. 대신 일 년 정도 바깥바람 좀 쐬고 올 테니 찾으려 하지 마시오.
기다리기 싫으면 궁주를 새로 뽑으시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