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2화
무료소설 마정록: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2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2화
2화
* * *
아침부터 시작된 잔치는 밤이 늦어서야 끝이 났다.
거처인 북성전으로 돌아간 북궁천은 한참 동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헌원려려뿐이었다.
그녀가 처음 인사를 올리던 때부터, 잔치가 끝난 후 조용히 일어나 북천전을 나서던 때까지의 모습이 모두 담겨 있었다.
“단숙은 어떻게 생각해?”
북궁천이 혼잣말을 하듯이 허공을 향해 물었다.
허공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좋아하는 남자가 있을지 모릅니다.”
“상관없어.”
누가 감히 북천마제의 뜻을 어긴단 말인가?
더구나 그녀는 몰락한 가문의 주인. 북천마제의 부인이 되면 가문의 위상이 하늘 끝까지 솟구칠 텐데 왜 거부하겠는가?
“결정하셨다면 뜻대로 하십시오.”
“고마워, 단숙.”
다음 날 아침.
북궁천은 헌원려려를 집무실인 북천전으로 불러들였다.
두 사람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북궁천은 단둘이 마주 앉게 되자 나름대로 그녀를 위한답시고 말을 건넸다.
“어제 음산문의 호우량이 너를 모욕했다고 들었다. 무섭지 않았느냐?”
헌원려려는 담담하게 답했다.
“무서웠습니다. 앉았는데 다리가 막 떨리더군요.”
북궁천은 솔직한 그녀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보통 여자들은 무섭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며 애걸한다. 그런데 헌원려려는 그런 여자들과는 달랐다.
그는 더 시간을 끌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려려, 본 궁주는 너를 부인으로 맞이하겠다. 앞으로 나를 위해 웃고, 나를 위해 차를 따라 주고, 내 아기를 열만 낳아 다오. 그럼 앞으로 음산문 따위는 감히 네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할 거다.”
그는 헌원려려가 거부하리라고는 티끌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마제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
감동을 받아서 눈물을 글썽거리진 않아도, 저 아름다운 눈꺼풀을 바람이 일어날 정도로 파르르 떨며 고마워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아주 담담하게, 그의 명령이나 다름없는 청을 거절했다.
“죄송해요. 저는 궁주의 아내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생각지 못한 대답.
충격을 받은 북궁천은 눈을 부라렸다.
“감히 본 궁주의 뜻을 거역하겠다는 거냐?”
“저는 제 삶을 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의미하게 살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무의미한 삶?
권력을 누리며 즐겁게 살면 됐지, 삶의 의미가 꼭 필요한가?
북궁천은 입을 꾹 닫고 그 말을 곱씹어 봤다.
화가 나지는 않았다. 화가 나기보다는 오기가 고개를 내밀었다.
감히 마제의 청을 거부하다니!
‘좋아, 어디 얼마나 버티나 보자.’
그는 그녀가 거부했다고 해서 그냥 놓아줄 마음이 눈곱반쪽만큼도 없었다.
“당분간 이곳에 머물며 어떤 결정이 너에게 이득인지 잘 생각해 봐라.”
* * *
헌원려려를 붙잡아 둔 북궁천은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서 그녀를 설득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온갖 보석과 산더미 같은 황금조차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고, 북천마제의 정실 자리 약속도 그녀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했다.
검원장의 번영을 약속해도 쓴웃음만 지었고, 은근한 협박에는 오히려 눈빛만 싸늘해졌다.
북궁천은 그럴수록 그녀에게 더 집착했다.
강제로 그녀를 취한다 한들 마제에게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그녀를 아끼는 사람들조차 그러기를 은근히 바랄지도 몰랐다. 권력의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그래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
마음과 몸 모두!
명예와 부귀영화로는 그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안 북궁천은 결국 도움을 청했다.
“단숙,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허공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북천궁에 온 것이 열두 살 때이고, 지옥 수련에 들어간 것이 열여덟 살 때입니다. 그리고 지옥 수련이 끝나자마자 지금까지 궁주의 그림자가 되어 살았지요.”
그런데 뭘 알겠냐는 뜻.
북궁천은 눈을 치켜떴다.
“그래도 나보다 오래 살았으니 보고 들은 것이 있을 것 아냐?”
대답은 한참 뒤에 흘러나왔다.
“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면 어떻겠습니까?”
“음, 그것도 괜찮겠군. 그리고 또?”
“말할 때 얼굴 좀 펴십시오. 어깨의 힘도 좀 빼시고. 인상 써 봐야 기죽을 여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
북궁천은 자신의 비밀 호법이자 그림자인 단무영의 말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녀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 패기도 감추고, 웃음도 짓고, 간부들에게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하하하! 려려, 궁산에 사는 비적 열두 놈이 겁도 없이 청마귀를 털려다가 모두 목이 잘렸다는구나. 그런데 잘린 머리가 절벽에서 떨어지며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는데, 그 소리가 마치 청마귀를 욕하는 소리처럼 들렸다지 뭐냐. 정말 웃긴 이야기지?”
헌원려려가 웃지 않으면 간부들을 닦달해서 또 다른 이야기를 들고 왔다.
“려려, 말 타는 게 서툴다고 백마도가 음혼선자를 놀렸더니, 음혼선자가 뭐라고 한 줄 아느냐? 말은 많이 못 타 봤지만 남자는 많이 타 봤어요. 그러니 말 타는 것쯤은 금방 늘 거예요, 그랬다는구나.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어찌나 웃던지…… 우습지 않느냐? 다른 이야기 해 줄까?”
헌원려려는 여전히 웃지 않았다. 그저 그런 농담에 자신의 마음이 바뀌길 바라는 북궁천을 측은해하는 눈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
‘당신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건 좋아하는 여자에게 해 줄 이야기가 아닌 것 같군요.’
그녀도 북궁천의 노력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마제가 그렇게까지 할 거라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 본 터라 굳게 쌓인 마음의 벽에 그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금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인 듯, 북궁천이 아무리 두들겨도 금이 간 벽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결국 석 달 열흘을 노력하고도 그녀의 진심을 얻지 못한 북궁천은 답답한 마음에 그녀를 다그쳤다.
“려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네 마음을 얻을 수 있지? 나에게 뭘 원하는 거냐? 뭐든 말해 봐라!”
헌원려려는 북궁천의 눈을 바라보았다.
대호와 같은 눈에서 간절함이 느껴졌다.
‘당신이 마제인 한 당신과 나는 맺어질 수 없어요. 그러니 그냥 보내 주세요.’
그녀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그 말을 억지로 삼켰다.
북궁천은 절대 자신을 보내 주지 않을 것이다. 소용없는 말을 해 봐야 역효과만 발생할 뿐.
행여 기분이 상해서 분노라도 하게 되면 검원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녀는 흔들리는 눈빛을 추스르고 자신의 속마음을 내비쳤다.
“궁주께서 진정한 대협이 되신다면…… 뜻에 따르도록 하겠어요.”
“대협? 어떻게 해야 대협이 될 수 있지?”
“정을 가슴에 품고, 천하 만인의 아래에 서서 의와 협을 행하세요.”
북궁천은 패왕이 되는 법만 배웠으며, 패왕의 길만 지나온 사람이다.
적을 칠 때는 냉혹하게, 공포심을 느끼고 두 번 다시 고개를 들 수 없도록 완벽히 제압했다.
만인의 피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시산혈해를 넘고 건너면서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북천의 무인들이 벌벌 떨면서 그를 마제라 부르겠는가?
그렇게 살아온 그는 정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또한 어떻게 해야 의와 협을 행하는 것인지도 알지 못했다.
아니, 그 모든 걸 다 떠나서, 그는 북천의 주인 마제였다.
그가 마제인 한, 만인의 아래에 서라는 그녀의 요구는 하늘이 두 쪽 나도 들어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는 일단 그녀의 말에 고민하는 척하면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려 했다.
“한번 생각해 보지.”
달래도 보았다.
“그런데 꼭 대협이 되어야만 하느냐? 대협이 아니라고 해서 너를 사랑해 줄 수 없는 건 아니지 않느냐? 내가 마음을 바꾼다고 해서 누가 마제를 대협이라 불러 주지도 않을 것이고 말이다.”
“남들이 대협이라 불러 주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대협의 마음을 가지면 되는 거예요.”
“그게 그거 아니냐? 내가 너를 강제로 취하지 않는 것만 해도 내가 나쁜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니라는 증거가 아니냐?”
“궁주께서 원하시는 게 제 몸뚱이인가요?”
흠칫한 북궁천은 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 아니다. 나는 네 몸과 마음을 모두 얻길 바라는 거다.”
“북천궁은 지금까지 너무 많은 피를 대지에 적셨어요. 그 핏속에서 절규하는 사람들 때문에 제 마음이 북천궁에 머물지 못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궁주께서 북천궁을 포기하실 수도 없잖아요?”
“미쳤……? 음, 그거야 그렇지…….”
말솜씨로는 그녀를 이길 수 없었다.
* * *
그날 밤.
북궁천은 헌원려려의 말을 곱씹으며 술을 마셨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깊숙이 와 닿지는 않았다.
“빌어먹을. 싸우다 보면 피를 좀 흘릴 수도 있지, 그게 그렇게 심각한 문젠가? 우리가 죽이지 않으면 그놈들이 우리를 죽일 것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럼 대체 자신의 무엇이 못마땅해서 거부한단 말인가?
“안 되겠어! 오늘 담판을 짓고 말겠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몸이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따라 술맛이 달짝지근해서 평소보다 훨씬 많은 양을 마신 상태였다. 고민하다 보니 주정(酒精)을 배출하는 것도 잊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지나치게 취한 것 같았다.
‘이상하군. 왜 이렇게 취하지? 오늘 마신 술이 더 독한 것인가?’
하지만 그는 주정을 배출해서 술기운을 억누르지 않았다.
어차피 담판을 짓기로 작정한 터였다. 술기운을 빌려서라도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다 털어놓고 싶었다.
‘그래, 누가 이기나 오늘 끝장을 보자, 려려!’
잔뜩 취한 채 방을 나선 그는 곧장 헌원려려의 방으로 갔다.
“려려,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거냐?”
헌원려려는 씩씩거리는 북궁천을 흔들리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저도 당신이 싫진 않아요. 하지만 아버지의 유언을 어길 순 없어요. 미안해요.’
그녀도 여자다. 북궁천의 노력은 충분히 그녀의 마음을 흔들고도 남았다.
그러나 그녀에게 부친의 유언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사명이었다. 그녀와 북궁천 사이에 놓인 벽이 너무나 두껍고 높은 것이다.
“다 좋다, 다 좋아! 내가 너무 많은 사람을 죽여서 싫다는 말도 이해가 돼! 그래도 한 번쯤은 져 주는 척할 수 있는 것 아니냐?”
북궁천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헌원려려의 코앞까지 바짝 다가갔다.
그때였다.
은은한 향기가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너무나 확연하게 느껴지는 향기였다.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로 황홀한 향기.
순간 몸 깊은 곳에서 기이한 열기가 피어났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억눌러 놓았던 욕망이 걷잡을 수 없이 솟구쳤다.
북궁천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서 한 줌밖에 안 되는 헌원려려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진 듯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는 절대 너를 포기하지 않을 거다! 절대로!”
“스스로와의 약속을 저버리겠다는 건가요?”
“절대 포기 못 해! 너를 보내 주기 싫단 말이다!”
헌원려려는 몇 번 발버둥 치다가 힘을 빼고 눈을 감았다.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발버둥 치면 칠수록 북궁천의 욕망만 건드릴 뿐.
아니, 어쩌면 그녀의 마음 저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던 갈등이 그녀의 반발을 멈추게 했는지도 몰랐다.
‘그래요, 어쩌면 당신을 거부한 것도 제 이기심일지 모르겠네요. 당신도 할 만큼 했는데…… 정말 싫은 것은 당신이 아닌데…….’
북궁천은 솥뚜껑처럼 큰 손으로 그녀를 안아 들더니 침상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난생 처음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러니 너는 내 여자가 되어야만 해!”
그는 헌원려려를 침상 위에 던지듯이 내려놓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돌린 헌원려려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주르륵 흘렀다.
‘원하면 가져요. 원망하진 않겠어요. 대신…… 나를 놓아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