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화
무료소설 마정록: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7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화
1장. 선택
‘정말 아름답군.’
북궁천은 구석진 곳에 앉아 있는 여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처음 그녀와 마주한 순간 세상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졌다. 이 세상에서 움직이는 것은 오직 그녀뿐.
혼기가 찬 그를 위해 각 세력의 주인들이 데려온 미녀만 스물여덟 명.
그녀들조차 그 여인에 비하면 그저 화려하게 치장된 인형에 불과했다.
그녀는 수수한 옷을 입었지만, 화려한 옷과 장신구로 치장한 어떤 여인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녀는 자신의 배움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학식을 뽐내며 떠들어 대는 그 어떤 여인보다도 지적이었다.
그녀는 어느 여인보다 도도하면서도, 시비가 힘들어하면 스스로 나서서 도와줄 정도로 정이 넘쳤다.
그녀가 소리 없이 조용히 웃으면, 드넓은 대전을 밝히고 있는 수백 개의 등잔불이 몇 배나 더 밝게 느껴졌다.
그리고 북궁천의 입가에도 밝은 웃음이 떠올랐다.
‘이름이 헌원려려라 했지?’
백령선자(白怜仙子) 헌원려려.
그녀는 스물셋 나이에 몰락해 가는 검원장을 맡은 헌원가의 여주인이었다.
이번 잔치에는 장로 둘과 호위 넷만 데리고 왔는데, 그녀는 두 장로와 함께 구석진 곳에 앉아서 조용히 구경만 하고 있었다.
북궁천은 그녀만 구경하고 있고.
신시(申時:오후3시~5시)가 되자 잔치가 절정으로 치달았다.
술이 얼큰하게 취한 사람들은 호탕하게 웃으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무희들이 나비처럼 너울거리며 오가자 무사들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그때 마흔 살가량의 중년인 하나가 술잔을 들고 헌원려려 쪽으로 다가갔다.
철걱, 철걱, 철걱…….
그가 걸을 때마다 허리에 매달린 화려한 도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머리에는 보석을 박은 무사건을 두르고, 몸에는 값비싼 청색 비단 장포를 걸친 자였다.
튀어난 광대뼈, 살짝 치켜 올라간 눈초리, 얇은 입술.
독해보이는 인상을 지닌 그는 음산문(陰山門)의 부문주인 귀호도(鬼呼刀) 호우량이었다.
헌원려려 앞에 선 그는 불쑥 잔을 내밀었다.
“헌원 소저, 내 잔을 한 잔 받으시오.”
헌원려려는 조용한 어조로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술을 잘 못 마셔요. 죄송해요.”
“하하하! 헌원 소저의 아름다운 미색은 천 리 떨어진 곳까지 울릴 정도요. 그런데 오늘 보니 정말 아름답구려. 그대를 만난 기념으로 한 잔 나누고 싶으니 사양하지 마시고 드시구려.”
“정말 죄송해요. 술은 다른 분하고 마시세요.”
헌원려려가 거듭 사양하자, 호우량의 눈초리가 더 높이 올라갔다.
부인과 사별한 지 삼 년째. 헌원려려에 대한 소문을 들은 그는 매파를 톻해서 검원장에 서신을 보냈다.
[아름다운 그대를 내 부인으로 맞이하고자 하오. 부디 내 마음을 받아주시오.
그대가 내 마음을 받아준다면, 내 모든 힘을 다해 검원장을 지켜주리다!]
돌아온 것은 냉정한 거부.
자존심이 상한 그는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뜻을 밝힐 생각이었다.
그런데 권주를 마다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자신의 뜻을 이루기는 틀린 듯했다.
“훗, 정말 도도하군. 지금 처지면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매달려야 살아남을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도도해서야 어디 누가 도와주려고나 하겠나?”
“이보시게, 호 부문주! 이게 무슨 짓인가?”
헌원려려 옆에 앉아 있던 중년인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검원장의 두 장로 중 하나인 백양검객(白楊劍客) 거은문이었다.
또 다른 장로 유백초는 이를 악물고 호우량을 노려보기만 했다.
그때 헌원려려가 일어나서 손짓을 하며 그들을 말렸다.
“참으세요, 장로님.”
거은문은 분기를 삭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검원장의 주인은 헌원려려다. 주인의 말을 무시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얼굴에 침 뱉는 격.
분하지만 참는 수밖에.
그가 입을 다물자, 헌원려려가 호우량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적어도 음산문에 손을 내밀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그리고 문파와 관계된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문주께서 직접 오라고 하세요. 저는 부문주는 상대하지 않으니까요.”
호우량의 두 눈에서 서릿발 같은 한광이 흘러나왔다.
“꼴에 자존심은 있다, 이건가? 무사라고 해 봐야 오십 명도 남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뭘 믿고 그리 뻗대는 거냐?”
헌원려려의 입술이 가늘게 열리며 웃음이 떠올랐다.
“검원장의 주인에게 자존심 운운하다니, 음산문도 많이 컸군요.”
“뭐야? 이……!”
그때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소?”
낭랑한 목소리가 호우량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고개를 돌린 호우량은 상대의 정체를 알아보고는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순진한 인상, 맑은 눈빛. 거기다 덩치마저 작아서 어딜 봐도 사나운 구석을 찾기 힘든 서른 살가량의 서생.
상대는 바로 북천사룡(北天四龍) 중 하나이자 북천궁의 군사인 가릉효였다.
북천마제를 보좌하며 메마른 북천 땅을 질척한 핏물로 적신 자.
“아, 아니오. 그냥 헌원 소저에게 술 한 잔 따라 주려고 왔을 뿐이오.”
“헌원 장주께선 안 마신다고 하신 것 같은데, 그만 가셔서 즐기시지 그러시오?”
“하, 하. 그러잖아도 그럴 참이었소. 그럼 이만.”
호우량은 힐끔 헌원려려를 바라본 후 몸을 돌렸다.
가릉효는 그가 떠나는 걸 보지도 않고 헌원려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게 되었소이다. 모두 본 궁의 불찰이오.”
“아닙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럼 재미있게 지내십시오.”
가릉효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후 몸을 돌렸다. 그리고 북궁천이 앉아 있는 곳을 슬쩍 훔쳐보았다.
‘후우, 하마터면 뒤집어질 뻔했군.’
종일 한곳만 바라보던 궁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게다가 눈빛은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는 눈치 빠르게 나서서 궁주의 성질이 폭발하기 전에 원인을 가라앉혔다.
아마 조금만 늦게 눈치챘으면 잔치는 이 시간부로 끝났을 것이다.
‘그런 모습은 처음 보는군. 헌원려려가 마음에 들었나?’
헌원려려는 가릉효의 등을 보며 가만히 자리에 앉았다.
호우량과의 대치로 인해 기운이 쭉 빠졌지만 겉으로는 조금도 표를 내지 않았다.
검원장은 북천궁에 복속되기 전인 삼 년 전까지만 해도 정의를 추구하던 문파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검원장이 힘에 눌려서 변질될까 봐, 돌아가시기 전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유언을 남겼다.
“협의지심(俠義之心)을 잃지 말고 살아라. 힘들다 해서 마도와 타협하지 마라.”
자신 역시 같은 마음이었기에 이곳에 오는 것이 정말 싫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왔다. 북천궁에 밉보이면 그나마 유지되던 검원장도 그날로 끝장이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한편, 북궁천은 가릉효가 헌원려려에게서 살쾡이 같은 자를 떼어내자 담담히 입을 열었다.
“추람, 나는 저 여자가 마음에 드는데, 넌 어떠냐?”
대답은 뒤에 서 있는 세 사람 중 좌측에 있는 자가 했다. 매우 아쉬워하는 목소리로.
“솔직히 마음에 듭니다. 궁주님이라 해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시달리다 말라죽기는 더 싫으니 포기하겠습니다.”
북궁천의 체구는 강인한 대호처럼 우람했다. 키도 일반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그런데 대답한 자도 그 못지않았다.
흑룡대주(黑龍隊主) 장추람.
북천사룡 중 하나이자 북궁천의 왼팔.
북천궁의 청년 고수 중 북궁천을 제외하고 가장 강한 고수가 바로 그였다.
그가 마음에 있는데도 포기한다는 듯이 말하자, 냉랭한 목소리가 오른쪽에서 흘러나왔다.
“좋아하는 여자가 있으면 목숨을 걸고 달려들어야지, 그딴 이유로 포기해?”
빼빼 마른 몸에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운 청년.
한룡대주(寒龍隊主) 냉호.
그 역시 북천사룡 중 하나로 항상 북궁천의 오른쪽을 지키는 자였다.
장추람이 냉호를 노려보았다.
“그럼 너는 여자를 사이에 두고 궁주와 다투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나는 처음부터 궁주가 택하지 않을 여자를 찍을 것이니 그런 걱정이 없지.”
그때 가운데 서 있던 자가 말했다.
“궁주, 설마 헌원 소저를 부인으로 맞이하겠다는 건 아니겠지요?”
석상처럼 딱딱한 표정. 얼굴마저 거무스름해서 진짜 석상처럼 보이는 자.
비룡대주(秘龍隊主) 철교신.
북천사룡 중 하나이며 북궁천의 호위대 책임자가 바로 그였다.
북궁천은 그의 질문에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럴 생각이다. 아주 마음에 들어.”
모두가 북궁천을 바라보았다.
북천사룡만 바라보는 게 아니었다. 좌우에 앉아 있던 사대원로를 비롯한 북천궁의 간부들 중 그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응시했다.
― 드디어 궁주께 짝이 생기는 건가?
그런 표정들.
― 그런데 하필이면 왜 제일 힘이 없는 검원장의 장주지? 기왕이면 힘이 강력한 세력의 딸들 중 하나를 고르지.
대부분이 그런 마음이었다.
특히 사대원로는 북궁천의 결정이 무척이나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택할 여자가 없어서 정의가 밥 먹여 주는 줄 아는 고리타분한 계집을 택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