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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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9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31화
31화
암평도국은 미로와 같은 골목길 안에 있었다.
골목이 구불구불해서 찾기가 쉽지 않았는데, 황보청은 전에 와 보기라도 한 듯 잘도 찾아갔다.
“여기에 와 본 적이 있나 보군.”
“두어 번 와 봤습니다만, 별 재미는 보지 못했죠.”
황보청은 머리를 긁적이며 사실대로 털어놓고 도국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퀴퀴한 냄새와 뿌연 연기가 그들을 맞이했다.
“어떻게 오셨수?”
얼굴에 몇 줄기 선이 그어진 건달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며 물었다.
황보청의 커다란 덩치, 북궁천과 종리기진이 검을 차고 있는 것을 본 그는 평상시와 달리 고운 말투로 물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황보청이 더 건달다운 말투로 대답했다.
“도박하러 왔지, 뭐하러 왔겠냐? 비켜, 임마.”
기세에서 눌린 건달은 얼굴에 그어진 굵은 선을 몇 번 씰룩이고 한쪽으로 물러났다.
그의 곁을 지나가던 황보청이 손을 쑥 뻗어서 그자의 멱살을 잡아챘다.
“종두란 놈, 어디 있지?”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코앞까지 끌려간 건달은 순한 양처럼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있습니다요.”
황보청은 씩 웃으며, 그의 입에 반짝이는 작은 은자 조각 하나를 넣어 주었다.
“순순히 말해 준 대가야. 나중에 술이나 사 먹어.”
맛만 보고도 은자라는 걸 알아챈 건달은 순식간에 얼굴이 밝아졌다.
“재미있게 노십시요, 공자님!”
황보청은 허리를 꺾으며 인사하는 건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 북궁천에게 눈짓했다.
“가시죠.”
북궁천은 새삼 황보청의 사람 다루는 재주에 감탄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밑바닥 사람 다루는 기술만큼은 자신보다 고수였다.
황보청은 도박판을 기웃거리며 도종두라는 자가 있다는 곳으로 접근했다.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는 걸 보니 손이 근질거리는 모양이었다.
‘잠깐만 놀자고 할까?’
그는 힐끔 북궁천을 바라보았다.
북궁천의 무심한 눈은 도종두가 있다는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말해 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 같군.’
그는 입맛을 다시며 도종두가 있는 도박판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네 사람이 도박을 하고 있었다.
황보청이 그곳으로 다가가며 한마디 했다.
“어이구, 수고들 많으시구만. 종두, 돈 좀 땄는가?”
두 사람은 눈알만 돌려서 힐끔 쳐다보고는 시선을 돌리고, 한 사람은 고개를 돌려서 황보청을 올려다보았다.
“누구슈?”
“자네에게 볼일이 있어서 왔지.”
도종두는 황보청이 행여나 빚쟁이가 보낸 사람인 줄 알고 잔뜩 겁먹은 표정이었다.
“누, 누가 보내서 왔수?”
황보청이 씩 웃으며 말했다.
“우리 대형이. 잠깐 좀 볼까?”
도종두는 앞에 있는 두어 냥의 은자와 동전 몇 개를 움켜쥐고는 머뭇거렸다.
은자 두 냥을 잃은 그였다. 일어나기가 너무 아쉬웠다.
그가 망설이자 함께 도박하던 자들이 눈알을 부라렸다. 슬슬 운이 따라 주기 시작한 판에, 돈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호구를 데려가려는 북궁천 일행이 못마땅했다.
“이봐, 너희들 뭐야? 이제 패가 좀 나오려고 하는데 왜 방해하는 거야?”
“어이! 이 사람들이 판을 깨려고 하네!”
한 사람이 암평도국의 무사를 불렀다.
한쪽에 서서 팔짱을 끼고 있던 건달 둘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뭐야? 뭔데 소란이야?”
북궁천은 그들을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종리 아우, 그를 데리고 가세.”
종리기진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는 주춤거리는 도종두의 코앞까지 다가가서 나직이 말했다.
“대형께서 물어볼 것이 있으시다 하니, 잠깐 우리를 따라가야겠소.”
“저, 저는 아무 잘못도……….”
불안에 떨며 눈알을 굴리는 그에게 북궁천이 말했다.
“묻는 대로 대답을 잘하면 은자 이십 냥을 주겠다. 기억을 완벽하게 할 수 있다면 삼십 냥을 받을 수 있을 거고. 선택은 그대가 해라.”
도종두의 눈의 휘둥그레졌다.
그 돈이라면 목숨이라도 걸 수 있었다. 아마 이 도박장에 있는 사람 중 반 이상은 그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저, 정말 그 돈을 주신다면 어디든 따라 가겠습니다!”
그때 가까이 다가온 건달 둘이 턱을 치켜들고 종리기진에게 다가갔다.
“멈춰! 당신들이 뭔데 열심히 놀고 있는 사람을 데려가려고 하는 거지?”
황보청이 그들의 앞을 막으며 가볍게 손을 저었다.
“아아, 당신들은 상관할 것 없어.”
“뭐야? 이 새끼가!”
눈가에 칼자국이 깊게 파인 자가 눈을 부라리며 칼을 뽑았다.
“거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눈살을 찌푸린 황보청이 한 걸음 내딛으며 상대의 팔을 번개처럼 잡아서 비틀었다.
혈을 짚인 건달은 얼굴이 일그러지며 칼을 놓쳤다.
그러자 또 다른 자가 달려들며 주먹을 휘둘렀다.
턱!
황보청은 넓적한 손으로 상대의 주먹을 움켜쥐고 힘을 주었다.
“손가락이 다 부서지면 밥 먹기도 힘들 텐데?”
“으으윽!”
손가락뼈가 부서질 것처럼 짓눌리자 건달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때였다.
“멈춰라!”
냉랭한 외침과 함께 내실 쪽 회랑에서 네 사람이 도박장 안으로 들어왔다.
사십 대 중반의 중년인이 하나, 서른 전후의 장한이 셋.
그들 중 빼빼 마른 장한이 앞으로 나오며 비릿한 조소를 지었다.
“실력이 제법이군. 어디서 왔는지 몰라도 손님을 빼내가는 건 실례 아닌가? 좋은 말할 때 그 손님을 놓고 나가라. 그럼 용서해 주마.”
“용서?”
“원래 손님을 빼가는 놈은 팔다리 하나쯤 잘라야 하지만, 잘못을 인정하고 기어서 나간다면 그냥 보내 줄 수도 있지.”
빼빼 마른 장한은 거만하게 말하면서 칼을 움켜쥐었다.
“어이구, 대단한 곳이군. 그런데 그렇게 하기는 싫은데 어쩌지?”
“그럼 별 수 없지. 팔다리 중 하나를 잘라 주는 수밖에.”
황보청은 그 말에 씩 웃고는, 옆 탁자 위에 있는 동전을 하나 주워 들었다.
그리고 몽둥이 같은 손톱 사이에 끼운 후 툭 튕겼다.
퍽!
섬전처럼 날아간 동전은 조소를 짓던 자의 목을 스쳐서 기둥에 깊숙이 박혔다.
황보청은 다시 동전 하나를 손가락 사이에 끼며 아주 즐거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 팔다리를 자른다고? 네 이마에 구멍이 뚫릴지 내 팔다리가 잘릴지, 어디 내기 한번 해 볼까? 네가 이마에 구멍이 뚫리고도 살아난다면 내 너를 할아버지라고 불러 주지.”
안색이 하얗게 질린 장한은 칼을 한 뼘쯤 빼다 말고 석상처럼 몸이 굳었다.
그때 사십 대 중반의 중년인이 앞으로 나섰다.
“물러서라. 네가 상대할 공자들이 아닌 것 같다.”
그는 장한을 물러서게 하고 황보청을 노려보며 포권을 취했다.
“고수들이 왕림하셨는데 어리석은 수하들이 미처 몰라봤소이다. 나는 암평도국의 주인인 왕두평이라 하오. 어디에 계신 분들이신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소?”
황보청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에서 순간적으로 이채가 반짝였다.
일개 도박장의 주인치고는 제법 강한 기운을 지닌 자다.
암평도국이 왜 호황을 누리는지 그를 보니 알 것 같다.
“황보청이오.”
“황보청?”
이름을 되뇌던 중년인의 눈이 점점 커졌다.
“혹시 정주 황보세가의 삼공자?”
“그냥 남들처럼 도란공자라고 부르쇼.”
중년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단순한 날건달 정도로 여겼거늘, 저자가 정주의 말썽꾸러기로 유명한 도란공자라니.
“황보 공자께서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셨소?”
“대형께서 저자에게 볼일이 있다 하셔서 모시고 온 거요. 바쁘니까 간단하게 말하겠소. 계속 막을 거요?”
왕두평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왕모가 어찌 황보 공자의 앞을 막을 수 있겠소?”
“하하하, 정말 잘 생각하셨소. 사실 본 공자도 시끄러워지는 건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외다. 대형, 그만 가시지요.”
황보청이 고개를 돌리며 말하자, 북궁천이 내실 쪽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밖으로 나갈 것 없이 이곳에서 일을 마치는 게 나을 것 같네.”
그러고는 왕두평을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조용한 방이 있으면 좋겠는데, 혹시 안쪽에 조용한 곳이 있나 모르겠군.”
왕두평은 암평도국을 이루면서 수많은 난관을 거친 노회한 인물이었다.
남들이 아는 것보다 무공도 훨씬 강하고, 남양의 흑도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상당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북궁천과 눈이 마주친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맙소사. 저자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북궁천이 고의로 기세를 드러낸 것도 이유였지만, 그의 기세는 사마외도의 사람들에게 상대적으로 더 위협적이었다.
결국 북궁천의 기세를 견디지 못한 그는 호랑이 앞의 새끼 늑대처럼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있소이다. 제가 안내할 테니 따라오시구려.”
왕두평은 북궁천 일행을 도국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그의 방은 도박장 주인의 방치고는 화려하지 않았다.
화려하기는커녕 답답한 기분이 들 정도로 조용했고, 장식은 어두운 색 일색이어서 간이 작은 사람은 공포심을 느낄 정도였다.
그 때문인지 주눅이 든 도종두는 젖 먹던 시절의 기억까지 짜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러니까…… 그 가마를 본 것은 여름이었습니다요. 술이 취하긴 했지만 그날의 기억만큼은 선명합죠.”
북궁천은 듣기만 하고, 황보청이 그를 상대했다.
“듣자 하니 그날 처음 본 것이 아니라고 했다던데, 어디서 또 봤지?”
“그녀를 막 봤을 때는 처음 본 여자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전에 본 여자더라고요. 그렇게 많이 꾸미지도 않았는데 어찌나 달라 보이던지, 제 눈을 의심했다니까요?”
“잡소리 치우고, 어디서 봤냐니까?”
황보청이 다그치자 도종두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봄꽃이 만발할 때였으니까 일 년 육 개월쯤 된 것 같구먼요. 백부님을 만나 뵈려고 여양 가는 길이었는데, 여주에서 무사 몇 명의 호위를 받으며 마차 한 대가 지나가는 걸 봤습죠.”
기억이 선명해질수록 그의 눈빛은 몽롱해졌다.
“그런데 마차 안에 타고 있는 여인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한동안 다른 여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죠. 옆에 호위무사만 없었어도 어떻게든 붙잡고 이야기를 해 봤을 텐데…… 그 하얀 배꽃처럼 청초한 모습은 정말이지, 아…….”
몽롱해진 도종두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그 모습을 본 황보청이 탁자를 탕탕 두드리며 짜증내듯이 말했다.
“열 냥 깎아야겠군. 뭔 서두가 그리 길어?”
순간 도종두가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런데 마침 호위무사가 길거리에서 장사하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보지 뭡니까. 그래서 마차가 지나간 다음에 장사하는 사람에게 물어봤죠. 그 호위무사가 어디 가는 길을 물어봤냐고요.”
그때, 팔짱을 낀 채 묵묵히 듣고만 있던 북궁천이 나직이 물었다.
“그랬더니?”
도종두는 방금 전에 들은 말인 양 확신에 찬 어조로 답했다.
“노산으로 가는 길을 물어봤다더군요.”
북궁천은 서른 냥을 줘서 도종두를 내보내고 왕두평을 불러들였다.
“이 왕모에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소, 공자?”
방 안으로 들어온 왕두평은 조심스럽게 물으며 북궁천의 맞은편에 앉았다.
북궁천은 무심한 눈빛으로 그를 직시한 채 말했다.
“한 사람의 행방을 조사해 줘야겠소.”
왕두평은 탁자 밑의 두 손을 움켜쥐었다.
부탁이 아니었다.
명령,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그는 무의식중에 구부러지려는 허리를 가까스로 세우고 입을 열었다.
“누굴 찾으려고 하시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