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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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47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27화
27화
북궁천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왼손을 휘둘러서 낫을 움켜쥐었다.
덥석.
시퍼렇게 날이 선 낫을 맨손으로 움켜쥔 그가 매우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정보만 주면 봐주려고 했는데, 피를 보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
말을 하는 사이 손가락이 점점 더 목에 깊이 박혀 들고, 호방도의 안색은 썩은 돼지 간처럼 시커멓게 변했다.
“크윽, 컥, 컥…….”
퉁방울처럼 튀어나온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호방도는 온몸이 덜덜 떨렸다.
분명 삼류문파의 제자들이라 했다.
키만 클 뿐 자신이 봐도 그렇게 강한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강철 갈고리 같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을 번개처럼 움켜쥐고, 서슬 퍼런 낫을 맨손으로 가볍게 잡아내지 않는가 말이다.
목이 잡히면서 혈도까지 제압당한 듯 온몸의 힘이 쭉 빠진 그는 안간힘을 다해서 애원했다.
“케에, 케엑. 제, 제발…….”
“순순히 말할 의사가 있다는 뜻인가? 설마 내가 잘못 안 것은 아니겠지?”
호방도는 있는 힘을 다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있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영 세상구경을 못할 것 같았다.
북궁천은 좌수로 쥐고 있던 낫을 슬쩍 밀었다.
낫을 쥐고 있던 장한이 떡메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뒤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퍽!
다른 두 장한은 북궁천이 낫을 손으로 잡는 걸 본 후로 몸이 굳어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북궁천은 호방도의 목마저 풀어 주고 느긋이 찻잔을 잡았다.
“일단 목부터 축이고 말해. 그러잖아도 사투리 때문에 알아듣기가 힘든데, 발음마저 이상하면 내가 잘못 알아들을 수도 있으니까. 그럼 후회하게 될 거야.”
겨우 정신을 차린 호방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잡아 반쯤 남은 차를 목안에 털어 넣었다.
“헉, 헉, 후욱, 후욱…….”
지옥에 갔다 온 기분.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그는 숨결이 어느 정도 정상적으로 돌아온 후에야 입을 열었다.
“고, 공자께서 부탁한 헌원려려라는 여자는…….”
* * *
북궁천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무환루를 나섰다.
호방도는 자신이 아는 사실을 모두 털어놓았다.
헌원려려의 아름다운 모습에 눈이 먼 정주의 청년들이 악착같이 그녀의 정체를 캐려고 덤벼든 덕분에 제법 많은 정보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정주에 들어온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정주에 들어온 지 사흘 만에 남쪽으로 내려갔다고 했다.
그 후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그녀를 어떻게 해 보려 했던 자들 몇몇만이 술자리에서 간혹 꺼낼 뿐 관심거리 밖으로 밀려난 상태였다.
그런데 일 년 정도 지난 후, 약 육 개월 전쯤 남양에 갔던 자 하나가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고 한다.
“헌원 소저를 남양에서 봤네. 하얀색 가마에 타고 있었는데 정말 아름답더군. 반가워서 말을 붙여 볼까 했지만, 가마를 호위하는 자들이 워낙 싸늘해 보여서 가까이 가 보지도 못했네.”
호방도가 이십 냥을 더 달라고 우긴 것은 바로 그 말 때문이었다.
그 말을 한 자가 정주에서 행세깨나 하는 선풍장의 아들인데도 가까이 가는 것조차 힘들 정도라 했다.
그렇다면 헌원려려에 대한 정보를 넘겨주었다가 위험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걸 정보상인의 본능으로 느낀 것이다.
‘남양이라…….’
그녀를 호위하고 있다는 자들은 누구일까?
일개 호위무사가 중소문파의 소주인에게 위압감을 줄 정도라면 평범한 자들은 아니라는 말인데.
‘친척이 평범한 집안은 아니라 하더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힘 있는 집안인 것 같군.’
그래서 걱정이었다. 힘 있는 집안이라면 아름다운 그녀를 그냥 놔두지 않을 테니까.
만약 그녀가 지금은 혼자가 아니라면? 누군가의 여인이 된 상태라면?
그녀를 데리고 도망쳐야 하나?
그녀가 자신과 함께 도망치려 할까?
북궁천은 온갖 생각으로 마음이 심란했다.
‘후우우우,’
어쨌든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그녀의 흔적을 뒤쫓다 보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지 않겠는가.
일단은 남양으로 가 보는 수밖에.
어차피 최종 결정은 그녀를 만난 후에 내려야 할 테니까.
북궁천이 심란한 마음을 가슴 저 깊숙한 곳에 가라앉혔을 즈음, 이정한이 넌지시 말했다.
“대형, 어디 가서 식사라도 하시지요.”
마침 그들 앞에 객잔이 보였다. 다른 곳에 비해서 유난히 조용한 곳이었다.
“그럴까? 저리 들어가세.”
북궁천은 객잔 안으로 들어간 후에야 왜 그렇게 조용한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제법 넓은 객잔 안에는 손님이 달랑 둘밖에 없었다. 그것도 둘이서 탁자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주위에는 부서지거나 뒤집어진 탁자가 나뒹굴고 있었고, 그 사이에 대여섯 사람이 널브러져 있었다.
북궁천은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객잔의 살풍경은 말없이 술을 주고받는 그들의 작품인 듯했다.
그들 중 하나가 북궁천 일행을 보고 말했다.
“도정방에서 왔나?”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빼빼한 청년이었는데 눈빛이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도정방? 처음 듣는 이름이군. 우리는 조용한 곳에서 식사나 하려고 왔을 뿐이야. 이런 곳인 줄 알았으면 오지도 않았겠지만.”
북궁천은 담담히 말하고 돌아서려 했다.
그때 싸늘한 눈빛을 한 청년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덩치가 무척 컸는데, 둥근 얼굴에 눈썹이 짙어서 마치 눈사람의 눈 위에 숯으로 눈썹을 붙인 듯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조용하기로는 이만한 곳이 없지. 오는 손님까지 쫓아냈다는 소린 듣고 싶지 않으니 식사를 하려면 안으로 들어오쇼. 장사를 안 하는 것은 아니니까.”
하긴 조용한 것으로 따지면 정주성 내에서 이만한 곳도 없을 것이다. 난장판만 아니라면 말이다.
두 사람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북궁천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들어가세. 정주의 인심이 어떤지 한번 보고 싶군.”
이정한 등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를 따라갔다.
북궁천은 구석진 곳의 멀쩡한 탁자에 자리를 잡고 점소이를 불렀다.
“주문 안 받나?”
점소이는 미칠 것 같았다.
‘눈깔이 썩었나? 저걸 보고도 여기서 처먹고 싶어?’
하지만 한 푼이라도 더 벌 욕심에 차 있는 주인의 서슬 퍼런 눈초리에 어쩔 수 없이 행주와 찻주전자를 들고 북궁천 일행에게 다가갔다.
“뭘 드시겠습니까요?”
이정한이 나서서 두어 가지 요리를 주문했다.
그들의 태연한 행동을 보고 싸늘한 눈빛의 청년이 말했다.
“그래도 강단이 없는 자들은 아닌 것 같군.”
피식 웃은 북궁천이 턱짓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쓰레기통에서 술 마시는 게 취미가 아니라면 옆은 좀 치우고 먹지 그러나?”
덩치 큰 청년은 좌우를 둘러보더니 주인과 점소이를 불렀다.
“여태 안 치우고 뭐하는 거야? 본 공자에게 이런 곳에서 술을 마시란 말이냐?”
주인과 점소이가 달려왔다. 그들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임에도 겉으로는 표현을 못했다.
“죄송합니다요, 삼 공자님. 금방 치우도록 하겠습니다요.”
“그런데 패거리를 데리러 간 놈들은 왜 안 오는 거지?”
주인이 딱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놈들도 공자님이 황보세가 분이란 걸 알았는데 오겠습니까요?”
“뭐야? 그럼 우리가 헛수고를 하고 있단 말이야? 이런, 빌어먹을!”
헛수고는 아니었다. 술을 공짜로 마시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술이 왜 이리 싱거워? 혹시 물을 몽땅 타는 것 아냐?”
공짜로 마시면서 술맛 타령을 하다니.
주인은 청년의 목덜미를 잡아서 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그랬다가는 밖으로 던지기 전에 자신이 누워있는 도정방 패거리들 꼴이 될 테니까.
“저희 집 술을 처음 마셔 보는 것도 아니시면서 왜 그러십니까요. 더 좋은 술을 드시고 싶으면 황보세가에서 운영하는 대화루로 가서 마시는 게…….”
주인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청년은 황보세가에 대한 말을 꺼내는 걸 무척 싫어했다. 자신이 황보세가의 사람이면서도.
아니나 다를까, 청년은 주인을 노려보며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기둥 다 뽑아 버리기 전에 제대로 된 술을 가져와. 얼마 전에 좋은 술이 들어왔다는 걸 내가 모르는 줄 알아?”
주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끄응, 황보세가의 주귀가 언제 또 냄새를 맡았지?’
그런 술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소량이어서 중요한 단골손님에게만 조금씩 팔고 있었다.
저 곰 같은 주귀가 한 병에 만족하진 않을 터, 적어도 세 병은 내주어야 했다. 그 정도면 오늘 장사는 완전히 공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저 인간 덕분에 흑도 건달들을 처리했으니 손해라 할 것은 없지만.
“알겠습니다요. 조금만 기다리십쇼. 이것부터 치우고 가져오겠습니다요.”
북궁천은 사정이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다르다는 걸 느끼고 두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삼 공자와 황보세가? 그럼 저자가 황보세가의 삼 공자란 말인가?’
그때 삼 공자라 불렸던 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북궁천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일어서니 앉아 있을 때보다 덩치가 더 크게 보였다.
“말투를 들어 보니 이곳 분들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온 분들이오?”
“태원에서 왔소.”
“태원? 멀리서도 오셨군. 나는 황보청이라 하오.”
“단화린이오.”
“손님이라곤 우리뿐인데, 함께 마시면 어떻겠소?”
의외로 북궁천은 황보청의 제의를 마다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하남의 상황을 듣고 싶었다. 황보세가의 아들인 황보청이라면 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저분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소.”
황보청이 씩 웃더니 고개를 돌려서 동료를 불렀다.
“종리 아우, 이리 오게.”
이정한 등은 상대가 황보세가의 삼 공자라는 사실을 알고 반대 의사를 표명할 생각도 못했다.
천사(天邪)의 난(亂)으로 무림맹이 유명무실해졌다곤 하나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힘마저 약해진 것은 아니었다.
이런 괴이한 경우만 아니라면, 황보세가의 셋째 공자와 한자리에 앉아 술을 마신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릴 일이었다.
“종리기진이오.”
싸늘한 눈빛의 청년은 합석하는 게 못마땅한지 건성으로 포권을 취했다.
“하하하, 일단 앉게. 오늘 괜찮은 술친구를 만났는데 얼굴 좀 펴게나.”
황보청은 웃음을 터트리며 종리기진을 앉혔다.
곧 주인이 무척 아까운 표정으로 술을 가져왔다. 표정을 보니 황보청이 말한 그 귀한 술인 듯했다.
“자, 단 형부터 한 잔 받으시오.”
황보청이 먼저 북궁천에게 술을 권했다.
하지만 북궁천은 그의 권주를 사양하고 손을 뻗어 술병을 잡았다.
“나는 괜찮으니 황보 형이 먼저 받으시오.”
황보청은 고집을 쉽게 굽히지 않았다.
“그런 경우가 어디 있소? 이곳 정주에선 내가 주인이고 단 형이 손님 아니오? 손님이 주인에게 먼저 술을 권하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이오? 사양하지 마시고 한 잔 받으시오.”
그런데 술병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황보청이 위를 잡은 상태.
같은 힘을 써도 위를 잡은 사람이 훨씬 유리한 상황이다. 게다가 순수한 힘 하나만큼은 정주 제일로 불리는 그였다.
술병이 바위에 박힌 듯 꿈쩍도 않자 황보청도 은근히 오기가 생겼다.
‘제법인데?’
은근슬쩍 공력을 주입한 그는 북궁천의 고집을 꺾으려 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힘을 써도 술병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감탄과 오기가 섞인 감정으로 공력을 더욱 강하게 끌어 올렸다.
북궁천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벌어졌지만 굳이 피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황보세가의 아들이라는 황보청의 능력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시험해 봤다.
스으으으으.
두 사람의 공력이 술병에 집중되자 술병에서 기이한 소음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