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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정록 21화

무료소설 마정록: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213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마정록 21화

 

21화

 

 

 

 

 

 

 

그때 북궁천이 입을 열었다.

 

“나는 단화린이라 하오. 저분들의 이름은 어떻게 되오? 저분들도 내 이름을 알았으니 나도 저분들이 누군지 알아야 할 것 아니요?”

 

엽청문은 조금 전의 복수를 하듯 냉랭히 말하며 돌아섰다.

 

“그건 알 것 없다.”

 

가마에 타고 있던 소녀가 그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엽 아저씨, 그만 가요.”

 

잠시나마 수심이 걷힌 그녀의 모습은 지나가던 새들이 고개를 돌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북궁천은 그런 소녀를 보고 더욱 더 헌원려려가 떠올라 가슴이 아릿했다.

 

그녀의 어렸을 때 모습이 저러지 않았을까?

 

‘려려도 가끔 저렇게 웃을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세상이 정지되기만 바랐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뿐, 그녀는 곧 깊게 가라앉아 그를 하염없이 기다리게 했었다.

 

지금은 그조차도 볼 수가 없지만.

 

북궁천은 입가에 쓴웃음을 매단 채 시선을 돌렸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애송이.”

 

엽청문은 혼을 내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투로 말하고 소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곧 서른가량의 여인이 휘장을 내리고, 기다렸다는 듯 두 장한이 가마를 들었다.

 

그런데 두 장한이 두어 걸음 옮겼을 때, 소녀가 가마에 처진 휘장을 젖히고 불쑥 말했다.

 

“제 이름은 공손설이에요.”

 

“저 사람보다 훨씬 좋은 이름이군.”

 

북궁천의 말에 소녀는 큭 소리를 내며 웃더니 휘장을 내렸다.

 

반면 엽청문은 죽일 듯이 북궁천을 노려보며 떠나갔다.

 

 

 

공손설을 태운 가마가 까마득히 멀어질 즈음, 이정한이 굳은 표정을 풀고 물었다.

 

“대형, 방금 그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한 사람은 엽청문이고, 꼬마 계집애는 공손설이라는군.”

 

너무 태연한 대답에 이정한은 북궁천을 빤히 바라보았다.

 

“구전도(九電刀) 엽청문이라는 이름 못 들어 봤어요?”

 

“처음 듣는데?”

 

“백혼일관(百魂一貫) 양태규는요?”

 

“모르는데?”

 

“후우, 그럼 공손설은요?”

 

“그 꼬마 계집아이?”

 

‘억! 공손설에게 꼬마 계집애라니!’

 

이정한은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헌원려려가 가슴에 가득 들어차 있는 북궁천에게는 그저 예쁜 꼬마 계집아이일 뿐이었다.

 

“그 아이 이름도 오늘 처음 들었네.”

 

처음 들었다는데 뭐라고 하랴.

 

이정한과 동호량, 초강은 한숨이 연이어 나왔다. 아무래도 이러다가 제 명에 죽지 못할 것 같았다.

 

아무리 북궁천을 존경한다지만, 염라사자가 내민 밧줄을 목에 걸고 다닌다는 것은 심각하게 고민해 볼 일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저기, 대형. 엽청문과 양태규는 철군성주 철혈검군의 호법무사인 철군십위(鐵君十衛) 중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도 철군십위에 속한 백화선자 같았고요.”

 

북궁천은 철군성이라는 말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래? 그럼 공손설은?”

 

“그녀는 철혈검군(鐵血劍君) 공손무극의 막내딸입니다.”

 

그제야 북궁천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딸? 공손무극은 환갑이 넘었다고 들었는데, 그럼 언제 낳은 거야? 오십이 다 되어서 낳았단 말이잖아?”

 

놀란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나? 공손무극의 뛰어난 정력에 감동해서?

 

“칠십에 자식을 본 사람도 있는데요, 뭐.”

 

이정한은 불퉁거리듯이 대답하고 말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떡하긴? 저 위로 올라가서 주위를 좀 둘러보자고.”

 

 

 

북궁천은 잔도를 통해 정상까지 올라갔다.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면산의 장대한 능선을 바라보던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수색을 포기하기로 했다.

 

대충 뒤진다 해도 몇 달은 걸릴 것 같았다. 게다가 능선은 수백 리나 뻗어 있었다.

 

태행산과 왕옥산까지 모두 뒤질 수는 없는 일. 대협 소리를 듣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산속에서 몇 년씩이나 썩을 수는 없었다.

 

‘천하의 어떤 대협도 이 넓은 산중을 모두 뒤져 보지는 못 하겠군.’

 

나름대로 정당성을 내세운 그는 이정한 등에게 말했다.

 

“굴속에 숨은 너구리도 언젠가는 밖으로 기어 나오는 법이지. 놈이 누군지 대충 짐작하고 있으니 일단 내 일을 먼저 처리하고, 그자가 밖으로 나왔다는 소문이 들리면 그때 다시 잡는 게 낫겠네.”

 

이번에는 초강도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이정한과 동호량이 노려보는데 고집을 피우면 당장 주먹이 날아들 것 같았다.

 

“그게 낫겠습니다, 대형.”

 

이정한은 내심 안도하며 북궁천에게 물었다.

 

“짐작되는 사람이 누굽니까?”

 

“만수종 육대기.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추룡당 무사들이 말한 인상착의가 그자와 비슷하네.”

 

“만수종이라면 동물과 이야기도 할 수 있다는 괴인이 아닙니까?”

 

“그래, 그래서 포기하는 거네. 그자가 이렇게 넓은 산속에 숨으면 천하의 누구도 잡을 수 없을 거야. 짐승들이 다 그자의 귀와 눈이 될 테니까.”

 

“아, 어쩌면 그래서 이곳으로 도망친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 일단 평요에 가서 추룡당 사람들에게 육대기에 대해서 말해 줘야겠네. 범인을 잡지는 못 했지만 용의자만 알려 줘도 성의는 보인 셈이 되겠지.”

 

“옳은 말씀입니다. 그럼 산을 내려가시죠.”

 

고개를 끄덕인 북궁천은 면산의 깊은 계곡을 향해 소리쳤다.

 

“언제까지 숨어 있나 보자, 육?대?기!”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며 면산을 뒤흔들었다.

 

그런데 메아리가 스러질 즈음, 저 아래쪽에서 격렬하게 싸우는 소리가 꼬리를 물고 들려왔다.

 

 

 

한편, 육대기는 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계곡에서 양념이 잘된 육포를 느긋이 씹으며 흑옥불상을 구경했다.

 

‘이게 뭔데 귀도맹주 복화가 그렇게 욕심을 내는 거지? 골동품에 일가견이 있는 자이니 분명 뭔가 있어서 욕심을 내는 걸 텐데…….’

 

부상을 치료하고 내려오던 중에 귀도맹 무사들을 만났다.

 

모두 십여 명이었는데, 희한하게도 전부 팔다리가 부러져서 제대로 걷지 못하는 자가 태반이었다.

 

그중 한 사람인 조곡은 안면이 있는 자여서 그에게 사정을 물었다. 조곡은 그에게 원기를 북돋는 단환을 하나 얻는 대가로 일의 전후사정을 몰래 말해 주었다.

 

태행산 끝자락까지 가서 얻은 화령금각사의 내단을 뺏긴 것에 잔뜩 약이 올라 있던 그는 그것이라도 취하기로 작정했다. 귀도맹주 복화가 욕심을 내는 거라면 상당한 값어치가 있는 보물일 테니까.

 

상대가 용천보라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안 되겠다 싶거든 포기하면 그만 아닌가.

 

그런데 다행히 그 물건은 방치되다시피 한 상태여서 빼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쾌재를 부른 그는 용천보의 추적도 피할 겸 곧장 친구가 살고 있는 면산까지 내려왔다.

 

일단 면산에 들어온 이상 용천보의 무사들이 모두 몰려온다 해도 걱정할 것이 없었다.

 

‘낙양의 고금당에 가서 팔아야겠어. 송가라면 나를 속이진 않겠지. 백 냥만 받아도 경비는…….’

 

그때였다.

 

육…… 대…… 기……!

 

육대기는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에 목뼈가 부러질 정도로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헉! 저 목소리는!”

 

안색이 창백해진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들어 본 목소리다. 그것도 두 번이나.

 

한 번은 화령금각사를 쫓던 중에. 또 한 번은 내단을 가지고 도망치던 중에.

 

‘저 씹어 먹을 놈은 나와 무슨 원수가 졌다고 여기까지 쫓아온 거야?’

 

상대는 관호명과 막상막하로 싸운 절대고수.

 

그는 원수 같은 그자를 대신해서 육포를 잘근잘근 씹으며 더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 새끼가 아무리 끈질겨도 침매곡까지 오지는 않겠지.’

 

 

 

* * *

 

 

 

싸우는 소리를 듣고 한달음에 운봉사로 내려온 북궁천 일행은 곧장 절벽 길을 따라 내려갔다.

 

싸우는 소리는 아래쪽에서 들리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내려가던 북궁천은 소리가 점점 급박해지자 이십여 장 아래쪽 길로 뛰어내렸다.

 

뒤따라가던 이정한 등은 그 모습을 보고 기겁해서 급박하게 멈춰 섰다.

 

“헉, 대형!”

 

하지만 북궁천은 그들의 염려가 무색하게 깎아지른 절벽을 몇 번 툭툭 차더니 순식간에 아래쪽 길에 내려섰다.

 

그 광경을 보고 혀를 내두른 이정한 등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간 떨어질 뻔했네.”

 

“좌우간 사람 놀라게 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분이라니까.”

 

“빨리 쫓아가죠.”

 

 

 

한편, 공손설은 마차 안에서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밖의 상황을 주시했다.

 

기습은 절벽 길을 거의 다 내려왔을 때 시작되었다.

 

오 장 높이의 절벽 위에서 뛰어내린 복면인들은 일언반구도 없이 공격해 왔다.

 

청의를 입은 자들의 숫자는 스무 명 정도. 그들의 공격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며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가마를 맸던 두 무사는 이미 피를 흘리며 쓰러진 상태.

 

엽청문과 양태규, 백화선자는 전력을 다한 반격으로 세 명을 쓰러뜨렸지만 적의 공격은 약화될 줄 모르고 점점 더 거세졌다.

 

서너 명의 합공으로 절정고수인 철군십위를 궁지로 몰아넣는 실력.

 

한 점 동요도 없는 얼음 구슬처럼 싸늘한 눈빛.

 

엽청문의 폭풍 같은 도세도, 양태규의 만변하는 창도 그들을 물러서게 하지 못했다.

 

“으윽, 빌어먹을!”

 

제일 먼저 백화선자가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갈라진 어깨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녀의 백의 경장을 적시고 다리까지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 와중에도 연검을 가슴 높이로 들고서 가마에 바짝 붙어 섰다.

 

“아가씨, 나오지 말고 안에 계세요!”

 

마음이 다급해진 엽청문은 풍차처럼 도를 휘돌리며 적을 물러서게 하고는 악을 쓰며 다그쳤다.

 

“이놈들! 이 가마에 타고 있는 분이 누군 줄 알고 공격하느냐!”

 

그러나 적도 가마의 주인이 누군 줄 알기에 공격하는 것이었다.

 

“공손 늙은이의 딸이라는 사실쯤은 알고 있으니 소리 지를 것 없다, 엽청문.”

 

복면인 중 하나가 조소에 가까운 어조로 말했다.

 

장대한 체구, 오만한 눈빛.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지켜보는 것이 그가 복면인들 중 수장인 듯했다.

 

엽청문은 그의 말을 듣고 가슴이 섬뜩했다.

 

자신들을 알고 공격했다는 것은 그만한 목적이 있다는 뜻.

 

“네놈들은 누구냐?”

 

“그건 지옥에 가서 알아봐라. 뭐하느냐? 계집을 잡아라.”

 

순간, 잠시 주춤했던 복면인들이 세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또다시 필사의 격전이 벌어졌다.

 

쉬아아악!

 

엽청문의 도가 기음을 일으키며 대기를 갈랐다.

 

슈슈슈슉! 촤르르륵!

 

양태규의 장창이 허공에 구멍을 숭숭 뚫으며 복면인들을 몰아쳤다.

 

복면인들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두 사람의 공세 속으로 뛰어들었다.

 

쩌저저정! 촤르릉!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절벽을 울리며 메아리치고,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엽청문은 복면인들 중 하나의 허리를 가르는 대가로 허벅지가 갈라졌다. 뒤이어 날아든 검은 그의 팔뚝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이를 부서지도록 악물고 혼신의 힘을 다해 도를 휘둘렀다.

 

시퍼렇게 뻗어 나간 도기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복면인들의 공세를 차단했다.

 

그러나 복면인들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빈틈을 노리며 더욱 강하게 압박했다.

 

‘젠장! 대체 어떤 놈들이……!’

 

그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며 양태규의 상황을 슬쩍 살펴보았다.

 

양태규의 상황은 더욱 급박했다.

 

섬전처럼 뻗어 간 창이 복면인의 가슴을 꿰뚫은 순간, 복면인은 자신의 가슴을 뚫은 창을 붙잡고 괴이하게 웃었다.

 

동시에 또 다른 복면인 둘이 좌우에서 달려들며 양태규의 목과 가슴을 노렸다.

 

양태규는 교묘하게 몸을 틀며 양쪽의 공격을 피했다.

 

그때 간발의 시간차를 두고 검 한 자루가 등으로 날아들었다.

 

피할 틈도 없이 등에 틀어박히는 시퍼런 검첨!

 

“크억!”

 

억눌린 신음을 토해낸 양태규는 복면인을 꿴 채 창을 휘둘렀다.

 

핏줄기가 호선을 그리며 허공에 뿌려지고, 창에 꿰뚫렸던 자가 한쪽으로 날아갔다.

 

그때였다.

 

서걱!

 

골육의 절단음과 함께 양태규의 왼팔이 어깨에서 떨어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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