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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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5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20화
20화
적의중년인은 눈을 치켜뜨고 냉랭히 코웃음 쳤다.
“흥!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 놈이군!”
양쪽에 늘어서 있던 자들 중 하나가 칼을 빼 들고 나섰다.
“기주, 속하가 놈의 다리를 잘라 꿇리겠습니다.”
하지만 적의중년인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아니다. 저놈은 내가 직접 다스리겠다.”
이를 갈듯이 냉랭히 말한 그는 유유자적한 걸음걸이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세 걸음. 선을 막 넘어서려던 그의 몸이 석상처럼 굳었다.
언제 쳐들었는지 부지깽이 막대가 그를 가리키고 있었다.
뒤이어 흘러나오는 나직한 목소리.
“넘어와 봐. 이마에 구멍이 뚫리면 머릿속이 시원해질 거야.”
적의중년인은 오기로라도 발을 옮기고 싶었다. 그런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막대와 떨어진 거리는 일 장이나 되거늘 이마가 시큰거린다.
잘 벼려진 창날이 이마에 맞닿아 있는 기분.
걸음을 옮기면 이마가 뚫릴 것 같은 느낌.
이를 악문 그는 눈빛을 파르르 떨며 두 손을 움켜쥐었다.
“이, 이런 개 같은…….”
“그래도 철군성 사람이라고 해서 참고 있는 거야. 시끄러워지는 건 싫거든.”
무심한 어조로 나직이 말한 북궁천은 시선을 적의중년인의 뒤로 옮겼다.
“귀하가 등씨요?”
적의중년인의 뒤쪽에 서 있던 자들 중 하나가 두 눈에서 기광을 반짝였다.
그는 적의중년인보다 키가 한 뼘은 작았는데, 뒷짐 지고 서 있는 그의 자세는 만근 바위를 깎아 만든 것처럼 묵직했다.
“맞네. 내가 등경이네.”
“양무겸이라는 사람이 그럽디다. 등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말이 통할 거라고 말이오.”
“흠. 어쩐지 무조건 내뺀다 했더니, 내가 나섰다는 걸 알고 있었나 보군.”
철무검(鐵武劍) 등경. 철군성의 금사령주(金蛇令主).
그는 철군성의 주인인 철혈검군(鐵血劍君)의 제자로, 철군성 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고수였다.
그리고 양무겸의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지금은 완전히 등을 돌린 상태지만.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니 그만 가 보시오. 그를 잡으려면 조금이라도 빨리 쫓아가야 하지 않겠소?”
북궁천은 말을 맺고 부지깽이 막대를 내렸다.
언뜻 등경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야겠지. 하지만 그전에 먼저…… 자네에 대해서 알아봐야겠네.”
찰나였다. 석상처럼 굳어 있던 적의중년인이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튕겨 나가며 칼을 잡았다.
쐐애액!
벼락같은 도광이 허리춤에서 솟구치고, 모닥불로 인해 붉어진 어둠이 찰나간에 여덟 조각으로 갈라졌다.
절정의 쾌도!
하지만 북궁천은 눈썹 한 올 흔들리지 않고, 밀려드는 도광을 바라보며 부지깽이 막대를 불쑥 내밀었다.
“후회한다니까!”
막대가 작은 원을 그리며 휘돌자, 사발만 한 공간이 이지러지고, 당장 그를 여덟 조각으로 갈라 버릴 것 같던 광채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떠더덩!
동시에 막대의 끝은 섬전이 되어 적의중년인의 목을 향해 뻗어 갔다.
적의중년인은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목을 보호했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적의중년인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떼굴떼굴 서너 바퀴를 구른 그는 손을 가슴 위로 올린 채 신음을 흘렸다.
“크으으윽.”
막대를 막은 그의 손은 살점이 너덜너덜해진 채 뼈가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그나마 손으로 막아서 목이 터져 나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스르릉. 채챙!
철군성 무사들이 무기를 빼 들었다.
잔뜩 긴장한 이정한 등도 검을 빼 들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북궁천은 남의 일이라도 되는 듯, 그 자리에 오연히 서서 무심한 눈빛으로 등경을 응시했다.
“해도 될 것인지, 안 될 것인지 정도는 알 분 같소만.”
“모두 물러서라!”
차갑게 소리친 등경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조금 전의 막대로 펼친 일 검.
과연 자신이었다면 저자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었을까?
막대가 아닌 검을 썼다면?
더구나 철군성 무사들의 포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한 점 흔들림 없는 눈빛은 두려움이 일 정도다.
“자넨 누군가?”
“단화린이라 하오. 쉬고 싶으니 그만 가 보시오.”
등경의 눈이 가늘어졌다. 손안에 땀이 찼다. 검병에 댄 엄지손가락이 잘게 떨렸다.
엄지를 밀어 올려 검을 튕긴 후에는 멈추지 못한다.
자존심을 생각하면 그리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싸우기에는 부담이 너무 크다.
하찮은 막대에 자신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금혼기주가 일패도지(一敗塗地)한 상태.
하물며 옆구리에 매달려 있는 검을 쓴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그조차 짐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보다 큰 꿈이 있는 그로서는 한순간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모험을 할 수 없었다.
‘이겨도 이익될 게 없다. 지면 개망신이고.’
냉정하게 결론을 내린 그는 북궁천을 노려보며 엄지의 힘을 뺐다.
“오늘 좋은 구경을 했네. 청산이 푸른 한 언젠가는 오늘의 빚을 갚을 날이 있겠지.”
“좋을 대로 생각하시오.”
변함없이 담담한 말투. 패배감이 밀려든다.
등경은 이를 지그시 악물고 몸을 돌렸다.
“적 기주는 돌아가라. 나머지는 양무겸을 쫓는다.”
이정한 등은 등경과 철군성 무사들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때까지도 두근거리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대형이 강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철군성 금사령주까지 돌아서게 만들 줄은 생각도 못 한 터였다.
그들은 그제야 양무겸의 말이 겉치레가 아니었음을 깨닫고 존경의 눈빛으로 북궁천을 바라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북궁천이 세 사람의 달아오른 눈빛을 보고 피식 웃으며 묻자, 이정한이 자신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대체 대형은 누구십니까?”
“나? 단화린.”
“그게 아니라…….”
“지금은 그렇게만 알아두게. 여기서 더 쉬기도 그런데, 내려가면서 마을이 있는 지 찾아보세.”
8장. 면산풍운
다음 날.
오시(午時:오전11시~오후1시) 무렵 기현에 도착한 북궁천 일행은 용천보의 기현 지부인 신가장을 찾아갔다.
신가장은 인원이 사오십 명에 불과한 작은 장원이었는데, 마침 어제 만났던 추룡당 무사들이 아직까지 그곳에 있었다.
“범인의 정체는 밝혀졌소?”
북궁천이 묻자 어제의 삼십 대 장한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알아내지 못했소.”
북궁천은 만수종 육대기에 대해 말할까 하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아직 범인이 그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확실치 않은 정보는 자칫 혼란을 초래할 뿐.
“범인의 행방은 찾았소?”
장한은 대답을 머뭇거렸다. 하지만 북궁천이 빤히 바라보자, 더는 숨기지 못하고 사실대로 말했다.
“오늘 아침부터 흔적이 끊겼소. 지금 수하들이 흩어져서 찾고 있는데, 어디에서도 그를 봤다는 사람이 없소.”
추적을 눈치챈 건가?
그렇다면 잡기가 그만큼 어려워진다.
“마지막으로 봤다는 곳이 어디요?”
“평요 쪽이오.”
“여기서 얼마나 되오?”
“남쪽으로 오십 리 정도 되오. 아무래도 놈이 면산(綿山)으로 들어간 것 같소.”
북궁천은 이정한 등을 바라보았다.
“면산 쪽 지리에 대해서 알고 있나?”
초강이 대답했다.
“예, 대형. 몇 번 지나다닌 적이 있어서 그쪽 지리는 대충 압니다.”
“그래? 그럼 가 볼까?”
북궁천은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당장 쫓아갈 것처럼 서두르자 동호량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 대형. 식사를 하고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침에 산 육포 남았지? 가면서 그거나 먹지 뭐.”
의협을 행하는 자는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지 않던가.
범인이 면산으로 들어갔다면 식사할 시간도 아껴야 했다.
신가장을 나선 북궁천은 곧장 평요로 향했다.
그는 초강에게서 면산에 대한 설명을 듣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직접 면산을 본 후 고개를 흔들었다.
진문공(晉文公)이 지른 불에 개자추가 어머니와 함께 타 죽었다는 면산은 너무나 넓고 험했다.
게다가 서쪽으로는 태행산과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 오백 리나 뻗어 나간 산맥은 왕옥산까지 이어져 있다지 않은가.
만약 만수종 육대기가 추적을 눈치채고 산속으로 들어갔다면 잡기 어렵다고 봐야 했다.
그에게 만수종이라는 별호가 생긴 것은 그가 그만큼 동물을 잘 다루기 때문이다.
잘 다룬다는 것은 특징도 잘 안다는 말. 그렇다면 새의 울음소리, 하찮은 동물의 움직임을 보고도 그는 추적자의 행동을 모두 알게 될 것이 분명했다.
만약 그가 나오지 않고 숨어서 버틴다면 만인을 풀어도 잡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돌아설 수는 없는 일. 북궁천은 허탕 치는 셈 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면산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육대기를 잡지 못해도 손해 볼 일은 없을 듯했다.
깎아지른 바위 사이로 난 길은 보는 사람이 아찔할 정도고, 까마득한 높이에 지어진 사원(寺院)은 그야말로 신에 대한 구도(求道)의 욕망을 보는 듯했다.
‘이곳에 비하면 태극당은 애들 장난 수준이군.’
북궁천 일행은 일단 위로 올라가 봤다. 절벽 길을 따라 올라가자 협곡 아래쪽이 멀리까지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돌려 협곡을 둘러봐도 추룡당 무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운봉사까지 올라간 북궁천은 육대기나 추룡당 무사들을 찾지 못했지만 후회되지는 않았다.
‘정말 멋지군.’
면산의 협곡을 둘러본 그는 올라온 김에 부처상을 보고 소원을 빌었다.
제발 현원려려가 아직 혼자이기를. 자신을 잊지 않고 있기를…….
물론 이정한 등이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속으로만 빌었다.
그때 좌측에 있는 불전의 문이 열리더니, 몇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북궁천은 나오는 사람들을 보고 눈빛이 깊어졌다.
중년승 둘이 먼저 나오고, 뒤를 이어 노승과 네 명의 속인이 나오고 있었다.
속인 중 둘은 여자였고, 둘은 삼십 대 중후반의 중년 남자였다.
두 중년인은 도와 창을 지니고 있었는데, 범상치 않은 고수들이었다.
게다가 두 여인 중 하나는 서른 살쯤 되는 미인으로, 그녀 역시 고수라 할 만한 기운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여인. 그녀는 십 대 중반의 소녀였는데, 면산의 절세 풍광조차 퇴색될 정도로 아름다웠다.
‘누구지?’
밖으로 나오던 그들도 북궁천 일행을 발견하고 표정이 각양각색으로 변했다.
소녀는 키가 큰 북궁천이 신기한 듯 눈빛을 반짝이고, 서른가량의 여인과 두 중년인은 적을 맞이한 사람처럼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소녀는 곧 시선을 돌리고 중년승과 노승을 향해 합장을 했다.
“대사님, 그럼 다음에 뵐게요.”
“허허허, 멀리 가지 않겠소이다. 모친께서 건강을 빨리 되찾기를 이 늙은 땡초도 빌어 드리겠소이다.”
“고마워요.”
소녀는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지만, 억지로 밝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고 몸을 돌렸다.
“그만 가요.”
소녀의 말에 서른 살쯤의 여인이 한쪽을 향해 소리쳤다.
“아가씨께서 출발 하신다는데 뭐하고 있느냐?”
그녀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불전 뒤쪽에서 두 사람이 가마를 들고 뛰어나와 소녀 앞에 내려놓았다.
소녀는 붉게 칠해진 가마에 올라타고는, 힐끔 눈을 돌려 북궁천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꾸 북궁천 일행에게 신경을 쓰자, 중년인 중 도를 찬 자가 동료에게 눈짓을 보내고 북궁천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는 북궁천과 이정한 등을 탐색하듯이 둘러보더니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자네들은 누군가? 이곳은 무사들이 자주 오는 곳이 아닌데, 무슨 일로 왔지?”
아랫사람처럼 대하는 그의 말투에 북궁천이 툭 쏘아붙였다.
“그러는 댁은 무사가 아니오?”
중년인은 느닷없이 한 방 맞은 사람처럼 눈을 치켜뜨고 북궁천을 노려보았다.
“젊은 친구의 입심이 보통이 아니군.”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고운 법이오.”
중년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좋아, 이곳은 다툴 만한 곳이 아니니 그에 대해선 더 이상 따지진 않겠다. 대신 네 이름을 말해 봐라.”
“귀하부터 말해 보시오.”
중년인의 가늘어진 눈에서 한광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말한 대로 이곳에서 싸울 수 없기에 꾹 참았다.
“나는 엽청문이라 한다. 강호의 친구들은 구전도(九電刀)라고 불러 주지.”
그가 별호까지 말해 줬건만, 북궁천은 고개를 돌려 소녀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중년인, 엽청문의 눈초리가 역팔자로 꺾어졌다. 금방이라도 귀에서 연기가 솟구칠 것 같았다.
‘이 자식이 나를 놀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