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5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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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1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59화
59화
구양우경은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겉으로는 미소를 지었다.
“자넨 내가 그녀를 함부로 대하는 줄 아나 보군.”
“무슨 말씀인지…… 나는 그냥 마음씨 고운 여자를 함부로 대하는 놈은 천벌을 받아도 싸다는 뜻으로 한 말인데, 소궁주께서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군요. 설마 그런 미친놈을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왜 그 말을 하면서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본단 말인가?
구양우경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상대의 말에서 꼬투리를 잡을 수 없으니 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죽일 놈!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마음껏 지껄여 봐라.’
심호흡을 해서 마음을 겨우 가라앉힌 그는 차가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용서하면 안 되지. 그리고 남의 여자를 함부로 입에 올려서 말장난하는 놈도 그냥 두면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네.”
구양우경이 나름대로 반격을 했지만 북궁천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런 자가 있으면 나에게 말하시오. 그 정도 일은 해 드릴 수 있으니까.”
‘이 사지를 찢어 죽일 놈이……! 오냐 이놈! 내 반드시 네놈의 팔다리를 토막 내고, 혀를 빼서 죽이리라!’
구양우경은 그렇게 다짐을 하며 북궁천을 노려보았다.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며 말했다.
“구양 형에게 이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군요.”
‘사공강후?’
목소리의 주인을 바로 알아챈 구양우경은 솟구친 분노를 억누르고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사공강후가 다가오고 있었다.
“사공 형이 어쩐 일이오?”
“천사교의 주력을 공격하기 전에 구양 형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왔지요. 싫다면 그냥 가리다.”
“하하하, 아니요. 잘 오셨소. 그러잖아도 저 역시 사공 형을 만나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많아서 망설였지요.”
“그리 생각하셨다니 잘됐군요. 그런데 무슨 일로 이곳에서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습니까?”
“별일 아니오. 대주 한 사람이 안 보여서 물어보려고 온 것뿐이오.”
결코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공강후는 그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랬군요. 전 또 무슨 일인가 했지요.”
그는 자연스럽게 구양우경의 말을 수긍하면서 북궁천을 살펴보았다.
‘호오, 저런 자가 말단 무사라니. 삼성궁이 위세를 떨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군.’
큰 키에 잘 발달된 신체, 흐트러짐 없는 자세,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어 보였다.
대체 저러한 자가 어떻게 말단 무사인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저 친구는 누구요, 구양 형?”
그는 참지 못하고 북궁천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구양우경은 그의 질문에 와락 짜증이 났지만 최대한 담담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회룡당의 무사인 단화린이라 하오.”
“그냥 일반 궁도요?”
“직위는 그렇소만, 일반적인 궁도와는 많이 다르지요.”
“많이 다르다면……?”
“저번에 검왕과 고검 대협을 따라가서 려매를 구한 사람이오.”
“아! 나도 그 이야기는 들어 봤소. 그때 천사교도 속으로 뛰어들어서 서문 소저를 구했다는 사람이 바로 저 사람이었구려.”
사공강후는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문려려를 구한 사람이라면 구양우경이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구양우경은 그런 사공강후의 반응에 눈살을 찌푸렸다.
‘괜히 말했군. 그냥 신경 쓰지 말라 하고 한쪽으로 데려갔어야 했는데. 제기랄!’
기분이 상한 구양우경이 입을 꾹 닫고 있는 사이, 사공강후가 북궁천에게 말을 걸었다.
“사공강후라 하오. 귀하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소. 만나서 반갑소.”
“단화린이오.”
“언제 한번 그 이야기 좀 들려주시오. 괜찮겠소?”
북궁천은 입술을 묘하게 비틀며 답했다.
“그 이야기라면 지금이라도 들려줄 수 있소.”
순간 구양우경이 눈을 부라렸다.
“자넨 그만 쉬게. 사공 형, 저쪽으로 갑시다. 우리 때문에 무사들이 쉬지 못하는 것 같소.”
“이런! 제가 마음만 앞서서 실수했군요.”
사공강후는 흔쾌히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북궁천을 바라보며 포권을 취했다.
“아쉽지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들어야 할 것 같소. 그럼 나중에 보겠소.”
북궁천은 구양우경과 함께 걸어가는 사공강후를 바라보았다.
‘구양우경과는 질적으로 다른 자군.’
구양우경을 더 이상 놀려 주지 못하게 된 것이 무척 아쉬웠지만, 사공강후와 안면을 텄다는 것은 괜찮은 소득이었다.
자신의 계획을 이행하는 데 한 발 다가갔다고 할 수 있었으니까.
* * *
잠은각의 무사가 연합 세력이 쉬고 있는 곳으로 찾아온 것은 휴식을 취한 지 반 시진쯤 지났을 때였다.
그 후 반 각이 지나자 이동 명령이 떨어졌다.
일천이 넘는 정예 무사의 이동은 조용하고도 신속했다.
철은보에서 후퇴한 자들이 모여 있는 장소가 발견되었다.
그곳까지 남은 거리는 오십 리. 이제 한 시진 후면 또다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마도를 물리치기 위해서!
하지만 어느 누구도 표정이 밝지 않았다.
승리가 예약된 싸움이라 해도 피를 보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북궁천은 묵묵히 뒤를 따라갔다.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았음에도 찝찝함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다른 의문을 만들어 냈다.
오십 리는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였다. 그런데 저들은 여전히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두려워서 나타나지 않는 걸까? 아니면 계속적인 공격을 예상치 못해서 감시에 소홀한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약할수록 감시를 더 철저히 하는 법이다. 그래야 공격을 받으면 적절히 대처해서 피해를 줄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러한 생각만으로는 현 상황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승리에 도취되어서 자신의 생각을 받아들일 사람도 없는 상황이고.
‘조금 있으면 알게 되겠지.’
선두가 걸음을 늦춘 것은 목적지를 십오 리 정도 남겨 놓았을 때였다.
“저 앞쪽 계곡 안으로 들어가서 십 리만 가면 산적들의 산채가 나옵니다. 바로 이곳인데…….”
잠은각의 대원은 땅에 지도를 그리며 계곡 안을 설명했다.
“이곳으로 해서 여길 넘어가면 바로 커다란 산채가 나옵니다. 두 방향으로 진입이 가능한데, 뒤쪽으로는 절벽이 워낙 높아서 침입하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위효릉은 잠은각 대원이 그린 지도와 산세를 번갈아 보더니 실소를 지었다.
“뒤로 해서 따로 침입할 것도 없겠군. 두 곳을 동시에 치고 들어가면 되겠어. 그래, 놈들의 숫자는 얼마나 되지?”
“저희가 파악한 바로는 천사교도만 일천 정도 됩니다. 산적과 그 가족까지 합하면 일천오백이 조금 넘을 겁니다.”
잠은각 대원의 말에 위효릉은 계곡을 바라보았다.
양쪽 산의 경사가 심하고 암벽이 많아서 산적들이 숨어 살기에 제격으로 보였다.
산적들이 사는 산채라면 별다른 위험은 없을 터. 더구나 잠은각의 대원들이 직접 들어가서 알아낸 정보가 아닌가.
그는 옆에 늘어선 각 세력의 수장들을 둘러보았다.
“놈들이 산적과 산적의 가족들 목숨을 이용해서 대항하려 할 거요. 어린아이나 부녀자, 노인은 최대한 보호하면서 싸우시오. 단, 사정이 정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천사교도를 죽이는 게 우선이라는 걸 생각하고 손을 쓰시오.”
수뇌부의 표정이 침중해졌다.
산적이야 문제될 게 없었다. 정작 문제는 그들의 가족이었다.
정파라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그들로서는 마도를 물리친다는 명분으로 어린아이와 부녀자, 노인을 죽음으로 내몬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특히 무림맹의 사람들 중 구대문파의 제자들은 나직이 불호를 외며 마음을 다스렸다.
구양우경은 그런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다.
적과 싸우기도 전에 마음이 약해지다니.
‘이래서 구대문파는 싫다니까. 산적들의 가족을 죽이는 것이 뭐가 어떻다고…….’
그때 위효릉이 다시 한번 강조했다.
“여러분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만, 마인 하나를 살려두면 수많은 양민이 죽는다는 걸 생각하십시오.”
“아미타불, 알겠소이다. 위 각주. 최선을 다해서 싸워 보리다. 빈승이 지옥에 가더라도 저 사악한 자들만 처리할 수 있다면야…….”
소림의 공한 대사가 염불을 외며 그리 말하자, 무당의 청명 도장도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험, 빈도도 마음을 정했으니 걱정 마시오.”
“좋습니다. 그럼 본 궁이 먼저 앞장서겠소이다.”
* * *
계곡의 입구는 그리 넓지 않았다.
더구나 양쪽 산 아래에는 집채만 한 바위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나무와 넝쿨이 뒤엉켜서 짐승조차 다니기 힘든 곳이었다.
절정 고수라면 힘들어도 그곳을 통해 진입할 수 있지만 현재로선 그럴 이유가 없었다.
선발대가 되어 먼저 계곡 안으로 들어간 삼성궁의 풍검당이 세 곳의 감시 초소를 박살 내며 길을 뚫어 놓은 상태. 나머지는 그들이 뚫어 놓은 길을 달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 와중에도 뒤처리 담당인 회룡당은 가장 뒤로 처졌다.
북궁천도 느긋한 마음으로 따라갔다.
이럴 때는 회룡당이 편했다. 회룡당을 선발로 내세우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천사교도가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별 볼 일 없다면 자신들이 싸움에 참여할 필요도 없이 상황이 끝날 것이고, 반면 천사교가 음흉한 수작을 부리고 있다면 상황을 봐서 그에 대처할 수 있을 터.
좌우간 어떤 식으로 진행되든 지금으로선 뒤로 처져 있는 것이 나았다.
본격적인 공격은 후미로 처진 회룡당이 계곡을 반쯤 들어갔을 때 시작되었다.
서쪽은 삼성궁이, 동쪽은 천무회와 무림맹이 맡았다.
그들은 바위를 타 넘고 나무를 날아 넘으며 산채를 향해 쇄도했다.
잠은각 대원의 보고는 완벽했다.
주위 상황은 그가 보고한 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산채는 아래쪽에서 오십 장 높이에 있었으며, 아름드리통나무로 만든 삼 장 높이의 이중벽이 드넓은 산채를 넓게 두르고 있었다.
쏴아아아아아!
해일처럼 밀려간 연합 세력의 무사들은 오십 장의 거리를 빠르게 좁히고 단숨에 통나무 벽을 뛰어넘었다.
독수리 떼가 날아오르듯 수백의 인원이 한꺼번에 날아서 통나무 벽을 넘는 광경은 가히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둥둥둥둥둥!
적의 공격을 알리는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적이다!”
“적이 서쪽 벽을 넘어서 쳐들어온다!”
연합 세력의 공격에 놀란 경비 무사들의 목소리가 북소리와 함께 산을 무너뜨릴 것처럼 메아리쳤다.
산채 깊숙한 곳. 아름드리통나무로 만들어진 거대한 건물 안에서 눈을 감고 있던 호연유는 그 소리를 듣고 천천히 눈을 떴다.
“후후후후, 드디어 왔군.”
나직한 웃음을 흘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전면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모두 일어섰다.
그들 중 핏빛 장포를 걸친 혈사령이 두 눈에서 시퍼런 살광을 흘리며 물었다.
“소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호연유는 소리 없는 살소를 지으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이 절벽 밑의 공터에 모이면 시작할 것이오. 혈사령, 일단 동굴을 개방하고 신호를 기다리시오.”
“예, 소존!”
통나무 벽을 넘은 연합 세력의 무사들은 파죽지세로 적을 쓰러뜨리며 전진했다.
예상했던 대로 적의 저항은 강하지 않았다.
산적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천사교도들조차 몇 초의 공격을 막아 내다가 겁에 질린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서기 바빴다.
“삼성궁 놈들이다! 물러서면서 막아라!”
“아, 안 돼! 으아악!”
“힘을 합쳐서 상대해!”
공포에 질린 목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일부는 정신없이 안쪽으로 도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