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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정록 57화

무료소설 마정록: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46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마정록 57화

 

57화

 

 

 

 

 

 

 

마지막 남은 진기로 최후의 한 수를 펼친 장호문은 비틀거리며 의자를 붙잡았다.

 

“최후까지 방심하지 말라고…… 그렇게 가르쳤는데도…… 너는…… 또 잊었구나, 구명.”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입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장호문은 입가의 피를 닦아냈다.

 

몸을 튼 덕분에 심장이 뚫리는 것은 겨우 면했다.

 

검을 천천히 뽑으라는 것도 자칫 심장이 다칠까 봐 한 말이었다.

 

하지만 심장이 뚫리지 않았다 해도 그의 상처가 치명적인 것만큼은 분명했다.

 

느릿하게 숨을 몰아쉬며 한 올, 한 올 진기를 모은 그는 관통 부위를 지혈했다. 그러고는 한때 아우라 불렀던 사구명의 옷을 찢어서 자신의 상처를 감쌌다.

 

얼마나 살 수 있을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

 

몇 걸음 걷다가 쓰러져 죽을 수도 있고, 운이 좋으면 며칠 버틸 수도 있을 것이다. 

 

신의를 만난다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르고.

 

대충 상처를 손본 그는 병기대에 세워져 있는 창을 지팡이처럼 이용해서 걸음을 옮겼다.

 

입구로 향하는데 자신의 손에 죽은 아우가 보였다.

 

흔들리는 등잔불 때문에 아우의 얼굴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장호문의 눈빛도 거세게 흔들렸다.

 

‘소궁주, 최소한 구명 아우를 이용하진 말았어야 했소. 당신 때문에 나는 하나 있는 의동생마저 마음에서 영원히 떠나보내고 말았소. 당신 때문에…….’

 

 

 

* * *

 

 

 

구양우경은 헌원려려를 보면서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녀가 시뻘게진 얼굴로 거친 몸짓을 하며 숨을 헐떡이는 걸 상상하니 황홀감마저 느껴졌다.

 

‘약만 떨어지지 않았으면 진즉 먹여놓고 즐겨 봤을 텐데. 제길, 그냥 강제로 하면 이 계집이 나를 완전히 거부할지도…… 아니지, 이 기회에 저질러 버려?’

 

그는 눈을 번들거리며 붉은 입술을 혀로 핥았다.

 

죽이지만 않는다면 누가 감히 자신을 뭐라 할 것인가.

 

‘피도 봤으면 좋겠는데…….’

 

새하얀 헌원려려의 목을 날카로운 손톱으로 살짝 그으면 핏방울이 맺힐 것이다.

 

남이 볼 수 없는 곳을 그으면 될 것 같다.

 

이 계집의 피 맛은 어떤 맛일까?

 

생각할수록 심장 박동이 더욱 거세지고 하체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였다.

 

“소궁주,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밖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초조감이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상상이 물거품처럼 흩어지자, 구양우경은 분노가 깃든 눈을 치켜뜨고 방문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사룡이 죽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구양우경은 와락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물었다.

 

“호문은?”

 

“사라졌습니다.”

 

“빌어먹을!”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 욕을 내뱉은 구양우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헌원려려는 그런 구양우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소리 나지 않게 숨을 내쉬었다.

 

탁자 밑에 있는 두 손이 잘게 떨렸다.

 

‘너무 무서운 눈빛이었어.’

 

구양우경과 시선이 마주친 것은 잠깐에 불과했다.

 

하지만 얼핏 본 그의 눈빛이 너무 두려워서 두 번 다시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그의 눈빛은 기이한 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단순한 욕정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저 사람은 자신에게 뭘 원하는 걸까? 왜 그런 눈빛으로 자신을 훔쳐본 걸까?

 

‘내가 너무 가볍게 생각한 걸까?’

 

구양우경의 성격이 알려진 것과 달리 냉혹하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의 것을 남에게 빼앗기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북궁천의 요구를 거절했던 것 아닌가?

 

자신이 북궁천에게 가면 구양우경은 진아를 순순히 내놓지 않을 테니까. 포원산장를 괴롭히는 것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그런 성격 외에 또 다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저 깊은 곳에, 생각하는 것조차 두려운 어떤 사실이 철저하게 숨겨져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잘게 떨리는 두 손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그걸 알아내야 돼. 진아를 위해서라도…….’

 

 

 

* * *

 

 

 

태양이 동천으로 떠오른 직후, 광원산장의 정문이 활짝 열렸다.

 

북궁천은 뒤쪽에 서서 쏟아져 나가는 무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철은보를 바로 칠 모양이군.’

 

아직 공격 방법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없었다. 정확한 계획은 회의에 참석했던 간부들만이 알고 있을 뿐.

 

믿었던 양고명마저 간세로 드러났거늘, 누가 또 간세인 줄 어찌 안단 말인가.

 

어쨌든 거의 전체라 할 수 있는 인원이 움직이는 걸 보면 철은보 공격이 확실한 듯했다.

 

“우리도 슬슬 뒤따라가 볼까? 송찬, 출발해.”

 

천광호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일대주 송찬에게 출발 명령을 내렸다.

 

일대는 바로 승룡당의 꼬리에 달라붙었다.

 

북궁천은 그들의 뒤를 따라가기 전 슬쩍 고개를 돌려서 별채 쪽을 바라보았다.

 

구양우경이 검신가의 장로들과 나란히 서 있고, 그 주위를 수룡위사대원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헌원려려가 보이지 않았다.

 

구양우경이 왜 그녀를 데리고 나오지 않은 걸까.

 

그녀는 왜 구양우경이 출정하는데 나오질 않았을까.

 

왜?

 

‘많이 아픈가?’

 

납치당했을 때의 후유증이 이제야 겉으로 드러났을 수도 있다.

 

그 당시 몸에 열이 있다고 했는데, 며칠간 밖으로 나오지 않은 걸 보면 병이 심해진 것일지도 모르는 일. 구양우경의 표정이 밝지 않은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이 크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그로선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제길, 그러게 왜 저놈에게 가?’

 

그때 구양우경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평소보다 싸늘한 눈빛. 독사의 눈빛이 저럴까 싶다.

 

헌원려려에 대해서 물어볼까 했는데, 그의 눈빛을 보니 물어본다 해서 알려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왜 그런 눈빛으로 쳐다봐? 내가 그렇게 싫은가? 웃기는 놈이군. 싫은 걸 따지면 내 마음이 너보다 몇 배는 더하다는 걸 알아라!’

 

“대형, 우리도 가지요.”

 

이정한이 부른 후에야 그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아프지 마라, 려려. 네가 그러면 내 마음도 아프니까.’

 

 

 

삼성궁 무사들을 필두로 천무회와 무림맹 무사들이 광원산장을 나와 서쪽으로 달려갔다.

 

그 무렵, 광원산장이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에서 누군가가 불을 피웠다.

 

젖은 나무 때문인지, 아니면 연기가 많이 나는 나무를 태워서 그런지 몰라도 불은 짙은 연기를 내며 타올랐다.

 

오늘처럼 맑은 날씨라면 수십 리 떨어진 곳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 * *

 

 

 

광원산장을 나선 지 두 시진 후.

 

연합 세력의 무사들은 상남에서 이십 리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이각가량 휴식을 취하며 다시 한번 공격 계획을 점검했다.

 

삼대 세력의 수뇌부는 그곳에 도착해서야 구체적인 공격 계획을 간부들에게 말해 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세 무리로 갈라진 연합 세력은 상남에서 남쪽으로 오 리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철은보를 향해 달려갔다.

 

삼성궁, 천무회, 무림맹.

 

일천삼백의 무사 누구도 망설이지 않았다.

 

약간 뒤로 처진 회룡당은 삼성궁과 무림맹 무사로 이루어진 중앙의 공격대를 따라갔다.

 

구양우경과 등조립, 백리진은 삼성궁 무사 오백을 이끌고 남쪽을, 사공강후는 천무회와 삼성궁 무사 이백이 합류한 인원을 이끌고 북쪽을 치기로 했다.

 

첫째, 천사교도들이 눈치채기 전에 최대한 빨리 접근한다.

 

둘째, 동시에 삼방을 포위공격하고 빠져나갈 곳을 하나만 열어 둔다. 빠져나갈 곳이 있으면 저항이 약해지는 법이니까.

 

셋째, 빠르고 강력한 공격으로 피해를 줄인다.

 

그것이 이번 공격의 기본 골격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공을 의심치 않았다.

 

현재까지 알려진 적의 숫자는 일천이 조금 넘는 정도. 숫자도 자신들이 많았고, 개개인의 무공도 자신들이 강했다. 

 

패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정예 무사들에게 이십 리는 먼 거리가 아니었다.

 

반 각이 지나자 상남이 보였고, 조금 더 가자 철은보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천사교도들이 그들을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경비를 서고 있던 천사교도들은 개미떼처럼 밀려드는 연합 세력의 무사들을 보고 고함을 질러 댔다.

 

“적이다! 적이 쳐들어온다!”

 

“비상! 비사아아앙!”

 

“적이 남쪽에서 쳐들어온다!”

 

“북쪽도 놈들이 오고 있다!”

 

“서쪽도 마찬가지다! 빨리 나와서 적을 막아라!”

 

둥둥둥둥둥!

 

연합 세력 무사들은 철은보에서 빠르게 울리는 북소리에 더욱 힘찬 걸음을 내딛었다.

 

스릉! 챙! 철걱, 철걱!

 

일천삼백 무사가 일제히 무기를 빼 들자 살기가 충천했다.

 

“정의를 위해, 놈들을 쳐라!”

 

“아수라의 추종자들을 지옥으로 보내라!”

 

“아미타불! 인과응보의 살계를 열리라!”

 

와아아아아!

 

그때 철은보 내에서 수백 명의 무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곧 연합 세력과 뒤엉켰다.

 

 

 

회룡당과 함께 약간 뒤로 처진 북궁천은 이마를 찌푸렸다.

 

마침내 선두가 적과 맞닥뜨렸다.

 

싸움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천사교도 수십 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진 상태. 모두가 예상한 대로 천사교도들은 연합 세력 정예 무사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북궁천이 의문을 품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너무 약해.’

 

광원산장에 무림맹과 천무회의 무사들이 합류했다는 것을 천사교 측에서 모를 리 없다.

 

당연히 공격을 예측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을 터.

 

그런데 고수라 할 만한 자는 소수고, 전면에 나선 자들은 대부분 일반 교도들이었다.

 

“우리도 합류하세!”

 

그가 고민하고 있는데 천광호가 소리쳤다.

 

적이 코앞까지 다가와서 더 이상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자신이 말한다 해도 바뀌지 않을 상황.

 

북궁천은 고민을 일단 제쳐 두고 적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싸움이 벌어진 지 일 각가량 지났을 때였다.

 

둥둥둥둥!

 

철은보에서 다시 북소리가 빠르게 울렸다.

 

천사교도들은 북소리가 울리자마자 정신없이 철은보 안으로 도주했다.

 

“놈들이 도망친다! 쫓아라!”

 

“놈들의 수괴를 찾아서 제거해라!”

 

승기를 잡은 연합 세력의 수장들은 무사들을 독려하며 철은보 안으로 진입했다.

 

북궁천은 뒤쫓지 않고 도주하는 자들의 등만 바라보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던 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도주한다. 

 

이미 약속이 되어 있다는 말.

 

무엇을 위해서 도주하는 걸까?

 

왠지 불길한 느낌. 

 

북궁천은 천광호에게 주의를 주었다.

 

“당주,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오.”

 

“뭐가 말인가?”

 

“놈들이 평소와 달리 너무 소극적이오. 서둘지 맙시다.”

 

“겁을 먹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당주는 천사교도들이 겁먹고 움츠리는 자들이라 생각하시오?”

 

그럴 놈들 같았으면 수뇌부의 지나친 자신감에 불만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그럴 놈들은 아니지. 그러고 보니 자네 말대로 조금 이상하군.”

 

그러나 의문을 풀 시간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 여유도 없었다.

 

잠깐 사이, 연합 세력의 무사들 태반이 철은보로 진입한 상태였다.

 

“일단 들어가 보세.”

 

 

 

철은보 내에서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쫓고 쫓기며 격전은 이어졌고, 죽어 가는 자들은 대부분 천사교도들이었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밖에서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저항한다는 것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이다.

 

미리 말을 들었음에도 상대를 얕본 일부 무사는 그 바람에 뜻하지 않은 부상을 입어야만 했다.

 

“놈들은 목숨이 붙어 있을 때까지 달려드는 자들이오! 쓰러뜨릴 때 확실히 처리하시오!”

 

“목을 쳐서 죽음을 확인해!”

 

여기저기서 인정을 베풀지 말라는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무림맹의 무사 중 불가와 도가에 속한 제자들은 연신 불호와 도호를 외며 적의 목숨을 끊었다.

 

중상을 입은 자를 죽인다는 것은 참으로 할 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 줌 숨결만 남아 있어도 도검을 들이미는 천사교도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죽고 죽이는 사이, 철은보를 피로 물들인 싸움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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