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5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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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3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55화
55화
표정이 굳어진 그는 숲 안으로 더욱 깊이 들어갔다.
곧 칼이나 검에 의해 덩굴과 잡목이 잘린 곳이 나왔다. 그 옆에는 핏방울이 사방으로 넓게 퍼져 있고, 잘린 화살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북궁천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가정이 그림처럼 이어졌다.
‘싸움이 벌어졌다. 쫓아가는 자는 검으로 공격했고, 도주하는 자는 활로 대응했다. 그리고…… 쫓아가던 자가 화살에 맞았다.’
설마 조관이 암습을 당해서……?
그러데 거기서 의문이 생겼다.
만약 조관이 활에 맞았다면 근처에 시신이 있던가, 아니면 돌아왔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 조관이 쫓기고 있다면 활로 공격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갑자기 어디서 활이 생겼단 말인가?
북궁천은 도주한 자의 흔적을 쫓을 것인지, 공격한 자의 흔적을 쫓을 것인지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조관은 돌아오지 않았다.
적어도 쫓다가 물러서지는 않았다는 뜻. 그렇다면 도주한 자를 쫓아가 보면 뭔가 해답이 나올 것이다.
해답은 이백여 장 전진했을 때 나왔다.
바닥에 찢어진 천 쪼가리가 떨어져 있었다. 짙은 청색. 회룡당 무사들의 복장과 같은 천이었다.
‘빌어먹을, 조 대주가 쫓긴 건가?’
짙은 청색 옷이 회룡당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그만큼 조관일 확률이 높았다.
어쨌든 옷을 찢어서 상처를 싸맬 정도라면 상당히 큰 부상을 입었다는 뜻.
더구나 이백여 장 이상 핏방울이 떨어져 있었지 않은가.
북궁천은 그때부터 핏방울이 아닌 발자국으로 뒤를 쫓아야 했다. 상처를 싸매서 더 이상은 핏방울이 보이지 않았다.
북궁천이 조관을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이십 리를 더 전진한 후였다.
조관은 세로로 길게 갈라진 바위틈에 몸을 숨기고 등을 벽에 기댄 채 앉아 있었다.
그는 한 손에 활을, 한 손에 화살을 쥐고 머리만 밖으로 내밀고서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한쪽에는 검이 검집째 뒹굴고 있었는데, 검집 끝에 흙이 잔뜩 묻은 걸 보니 중심을 잡기 위해서 지팡이처럼 사용한 듯했다.
북궁천은 급히 그의 맥을 살펴보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그의 살결은 창백하다 못해 하얗게 탈색된 상태였다. 맥이 너무 미약해서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다.
“조 대주!”
북궁천은 그를 부르며 바위에서 등을 뗐다.
그가 기댔던 바위는 온통 피로 범벅되어서, 등을 떼자 검붉은 덩어리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바위에서 등을 떼어 내자 상처를 대충 싸맨 천 사이로 쩍 갈라진 골짜기가 보였다.
북궁천은 명문혈에 우수를 대고 자신의 진기를 조관의 몸속에 주입했다.
반드시 살리겠다는 욕심은 부리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으로 살리기에는 너무 상처가 깊고 피를 많이 흘린 상태였다.
너무 냉정할지 모르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조관의 말 몇 마디였다.
그렇게 일 각가량 진기를 주입하자, 조관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조 대주, 정신 차리시오!”
진기가 실린 음성이 조관의 영혼을 흔들었다.
조관은 삶의 마지막 끈을 붙잡고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단화린이오. 내 말 들리오?”
북궁천의 진기가 실린 나직한 목소리는 조관의 귀를 통해 뇌리를 울렸다.
파르르 떨리던 조관의 눈꺼풀이 위로 올라간 것은 그때였다.
“다, 단화……린?”
“그렇소, 나요.”
조관의 비틀어진 입꼬리가 잘게 떨렸다.
그는 죽기 전에 한 마디라도 더 해야겠다는 듯 곧바로 자신의 가슴에 쌓인 것을 쏟아냈다.
“수룡…… 만가…… 여자를 사…… 놈…… 어깨에…… 화살…….”
들릴 듯 말듯 조관의 말이 이어졌다.
“나를…… 그냥…… 여기에…… 묻…… 놈들…… 의심할지…… 모르니…….”
그의 입가에는 웃음마저 떠올라 있었다. 자신의 가슴에 담긴 것을 저승으로 가져가지 않게 된 것이 기쁘다는 듯.
더구나 말을 전한 상대가 단화린 아닌가.
그 지독한 천사교 놈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 고수.
그렇게 목소리가 잦아들고, 그는 그 표정 그대로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는 뜨지 않았다.
북궁천은 그의 등에서 손을 떼고 조심스럽게 눕힌 다음, 만장해저처럼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정말 괜찮은 대주였소. 나 북궁천은 당신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거요, 조 대주.”
* * *
구양우경은 장호문을 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계획을 취소시켜라.”
장호문은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고 대답했다.
“예, 소궁주.”
“그자가 살아 있을 확률은?”
“검기에 등이 깊게 갈라져서 뼈와 내장까지 영향이 미쳤을 겁니다. 제가 지켜보던 반 시진 동안 돌아오지 않았으니 죽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
“흔적을 깨끗이 지우고 그자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봐. 주위까지 철저하게.”
“알겠습니다.”
“다시 한번 실수하면 용서치 않을 것이다.”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 봐.”
구양우경은 장호문이 나가는 걸 보며 찻잔을 들었다. 한 모금 차로 입술을 적신 그는 장호문이 나가고 방문이 닫히자 찻잔을 움켜쥐었다.
드드드득!
찻잔이 그의 손안에서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멍청한 놈!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그런 실수를 하다니!’
그는 붉은 입술을 잘근거리며 새파란 눈빛을 번뜩였다.
‘내가 너무 오랫동안 믿었어. 일을 잘해서 그냥 놔두었더니, 연거푸 실수를 하는군.’
손을 탈탈 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섰다.
상한 기분을 푸는 데는 서문려려를 바라보며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이 최고였다.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제법 고집이 세단 말이야…….’
* * *
흐릿한 등잔 불빛을 받은 천광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관이…… 조관이 죽었단 말이지?”
“예, 당주.”
“죽인 놈은 수룡위사대원이고?”
“그렇습니다.”
“지금 달려가면 안 되겠지?”
“당연합니다.”
“제길, 제기랄!”
천광호는 벌떡 일어나서 서성거렸다.
분노가 가슴에 쌓였는데 풀 수 없으니 미칠 것 같았다.
북궁천은 그런 천광호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조 대주에 대한 복수는 제가 해 줄 겁니다. 그렇게 약속했습니다. 그러니 당주는 나서지 마십시오.”
홱 몸을 돌린 천광호의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일렁거렸다.
“나보고 가만있으란 말인가? 동생처럼 생각했던 조관이 죽었는데?”
하지만 북궁천의 목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더 큰 복수를 위해서 기다리라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마무리가 진행될 때 나서십시오.”
문득 천광호는 그의 무심한 목소리가 무섭게 느껴졌다.
도대체 단화린의 진짜 정체는 뭘까? 단화린이 진짜 이름일까?
‘네 정체를 밝혀라!’
천광호는 그렇게 묻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단화린의 정체가 밝혀지는 날이 헤어질 날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는 그였다.
그는 아직 단화린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좋아, 참으라면 참지. 대신 조관의 복수는 확실히 해야 하네.”
“그럴 생각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주 확실히, 그 근원까지 철저하게 밝혀서 처리할 겁니다.”
북궁천은 고저 없는 무심한 목소리로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당주께 조 대주에 대해서 물으면, 임무 때문에 멀리 보냈다고 하십시오.”
“알았네. 그럼 당분간 자네가 대주를 맡아 주게.”
“아닙니다. 대주는 다른 사람을 시키십시오. 제 생각으로는 백종오가 좋을 것 같습니다. 평소 말은 거의 없지만, 이대의 무사들이 조 대주 못지않게 존중해 주더군요.”
* * *
자시 무렵.
광원산장을 빠져나온 북궁천은 서평으로 갔다.
서평에 도착한 그는 고지경이 말한 점포 앞에 서서 골목을 바라보았다. 골목 안에서 깃발이 하나 펄럭이고 있었다.
그는 골목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깃발에 만가점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주위를 좀 더 둘러본 그는 지붕을 넘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어둠이 깔린 건물 안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는 만가점 내부를 잘 아는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움직여 안쪽으로 들어갔다.
만가점은 제법 넓었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만가점 내부를 돌아다니던 그는 남쪽 벽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다른 곳은 물건이 쌓여 있는데 그곳만 비어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벽을 두들겨 보았다.
퉁퉁.
공명음이 났다.
안이 비어 있다는 뜻.
그는 손바닥을 벽에 대고 가볍게 밀었다.
와직!
벽처럼 위장된 비밀문이 부서지며 어두운 통로가 드러났다.
통로 안으로 들어간 북궁천은 통로 끝에 있는 또 다른 문을 부수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안쪽은 화려하게 치장된 방이었는데, 핏속에 누워 있는 시신 세 구가 그를 맞이했다.
‘이곳의 주인과 점원인가 보군.’
꼬리를 자르기 위해서 죽인 거겠지.
북궁천은 한쪽에 있는 등잔의 심지를 향해 가볍게 지풍을 튕겼다.
화악!
강력한 삼매진화에 불꽃이 피어났다.
그는 밝아진 방안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벽이나 바닥, 천장에 난 실낱같은 틈도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이각이 지날 즈음, 그는 벽에 붙은 문갑 뒤에서 교묘하게 숨겨진 비밀 서랍을 발견했다.
열린 흔적이 없는 걸 보니 이곳에서 피바람을 일으킨 자도 서랍의 존재를 모른 듯했다.
그는 서랍을 열어보았다.
안에는 작은 상자가 하나 들어 있었다.
상자를 집어 들고 뚜껑을 연 그의 눈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상자 안에는 천금의 가치가 있는 보화와 이곳의 주인이 기록한 것처럼 보이는 비밀 장부와 일지가 들어 있었다.
‘대박이군!’
북궁천은 먼저 일지를 살펴보고는, 상자를 통째로 품속에 넣고서 밀실을 나왔다.
밀실을 나서는 그의 무심한 두 눈에서는 조금 전과 달리 스산한 살기가 휘돌았다.
* * *
수룡위사대의 신상에 대한 것은 철저히 가려져 있었다. 기껏해야 얼굴만 드러냈을 뿐.
그나마도 구양우경이 출정했기에 다수의 수룡위사대원이 얼굴이라도 알려진 것이었다.
북궁천은 수룡위사대원 중 모습을 감춘 자를 먼저 추려 보았다.
화살이 어깨에 박혔다면 요상을 해야 할 터. 당분간 남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 일에는 태극문의 제자들과 이조량이 나섰다.
그들조차 조관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감정이 앞서서 실수라도 하면 위험해질까 봐 북궁천이 알려 주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구양우경이 머무는 별채 근처를 오가며 하나, 하나 파악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특징을 북궁천에게 보고했다.
그렇게 한나절을 파악한 결과, 보이지 않는 자는 모두 넷으로 드러났다. 그중에는 수룡위사대의 무사들을 지휘하던 장호문도 끼어 있었다.
그들을 모두 조사해 보면 누가 조관을 죽였는지 알 수 있겠지만, 북궁천은 서두르지 않았다.
수룡위사대는 구양우경을 최측근에서 호위하는 자들이다. 서두르다가 역공을 당하면 자신의 입장만 난처해질 터, 좀 더 완벽한 증거를 잡아서, 철저히 몰락시켜야 했다.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헌원려려를 위해서.
그 사이 장호문도 수하들을 동원해서 얼굴에 상흔이 있는 자에 대한 조사를 마쳤다.
그리고 그날 저녁 구양우경에게 보고했다.
“회룡당의 이대 대주 조관이란 자입니다.”
굳이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 그 말만으로도 구양우경의 얼굴이 구겨졌다.
“단화린이 속한 대의 대주 말이냐?”
“예, 소궁주. 천 당주는 수하들에게, 그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멀리 갔다고 말한 모양입니다.”
“미친 호랑이가 조관의 죽음에 대해서 안다고 보느냐?”
“가능성은 반반입니다.”
구양우경은 생각만으로도 짜증이 났다.
“하필 광호의 수하라니.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기 전에 미리 처리해야겠군.”
“최근 들어 광호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알면서 조용하다면 나름대로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니, 잠시 지켜보면서 기회가 나면 처리할까 합니다.”
구양우경은 무릎을 꿇고 있는 장호문의 머리를 노려보았다.
“광호나 단화린에 대한 처리는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그러니 너는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말고 부상부터 치료해라.”
“소궁주, 제 실수로 일어난 일이니…….”
무심코 말하며 고개를 들던 장호문은 구양우경과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호문, 내가 그 이유까지 말해야 하느냐?”
“죄송합니다, 소궁주. 명대로 하겠습니다.”
“그만 가 봐라.”
잠시 후.
구양우경은 장호문이 나가자 붉은 입술의 부푸러기를 이로 뜯어냈다.
‘감히 내 말에 토를 달다니! 역시 개는 너무 오래 키우면 안 돼.’
그리고 흔적을 지우려면 확실히 지워야 하는 법이다.
누구도 찾지 못하게.
‘후후후, 쫓던 개가 사라지면 너는 헛물만 켜게 될 거다, 단화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