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5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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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88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51화
51화
1장. 나는 아우들이 죽는 게 싫다
살얼음판을 걷는 긴장감이 흘렀다.
누구 하나가 손가락 하나, 눈짓 한 번만 해도 와장창 깨져 버릴 것 같았다.
그때였다.
“아, 안 돼요. 그만하세요.”
헌원려려의 입에서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순간, 그토록 가공스럽던 기세가 거짓말처럼 걷혔다.
북궁천은 고개를 돌려 헌원려려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는 그녀의 두 눈 깊은 곳에 안타까움에 젖은 굳은 의지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려려…….”
“정말, 정말 당신인가요?”
북궁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야.”
헌원려려는 예상했던 대로 단화린이 바로 북궁천이란 걸 알고 가슴이 먹먹했다.
“당신한테는 미안하지만…… 나는 당신을 따를 수 없어요. 당신도 알잖아요, 되돌리기에는 늦었다는 걸…….”
혼자라면 또 모른다. 어쩌면 자신이 먼저 그에게 손을 내밀었을지도…… 그때는 정말 미안했다며…….
그러나 지금은 진아 때문에라도 북궁천과 함께 할 수 없다.
자신과 북궁천과의 관계를 알게 되면 ‘그’가 진아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나와 함께 돌아가자.”
“안 돼요, 그럴 수 없어요. 그럴 수 없어요. 흑……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떠나는 것은 더욱 힘들다.
진아를 남겨놓고 떠날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진아의 존재를 모르는 북궁천은 그녀가 아직도 자신을 용서하지 않은 것만 같아서 가슴이 먹먹했다.
“울지 마라, 려려.”
“그래요, 안 울게요. 대신 당신도 저를 울리지 마세요. 지금 상황만으로도 너무 힘들어요.”
헌원려려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다.
그 모습을 본 북궁천은 먹먹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좋아, 네 말대로 하마. 그런데 려려, 왜, 왜 나와 함께 가지 않겠다는 거냐? 내가 그렇게 싫으냐?”
“싫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왜 내 뜻을 거부하는 거냐? 아직 그 날을 용서할 수 없는 거냐?”
헌원려려는 바로 대답을 못 하고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사람들은 구양우경을 잘 모른다. 그가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그가 분노하면 아이는 물론 고모와 고모부 가족까지 모두가 극도로 위험해진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 말을 할 수는 없다.
옆에 있는 백리진과 임강령 때문이 아니다.
북궁천.
북천의 마제!
바로 그 때문이다.
그녀는 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안다.
아마 사실을 들으면, 그는 당장 진아를 찾겠다며 삼성궁으로 달려가서 뒤집어 놓을 것이다.
아니면 북천의 무사들을 모조리 불러들일지도 모르고.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북궁천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녀가 서운하기만 했다.
“나는 너를 찾기 위해 모든 걸 버리고 떠나왔다. 네가 말했던 대로 대협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도 부족하단 말이냐?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뭐든지 말해 봐라, 려려.”
헌원려려는 가슴이 미어질 것처럼 아픈 와중에도 그 말을 듣자 웃음이 나왔다.
북천의 주인이 대협이 되려고 노력했단다.
그토록 강한 패왕이!
하긴 자신을 위해 광대 짓을 서슴지 않고 하던 그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녀는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그 정도면 됐어요. 부족한 것은 없어요. 하지만…… 지금 당장은 당신을 따라갈 순 없어요.”
북궁천은 입을 꾹 닫고 헌원려려를 응시했다.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든 그녀는 서서히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세상의 온갖 보화와 명예에도 꿈쩍을 않던 여인, 천하를 준다 해도 싫다던 여인. 북천의 주인에게 낮은 곳에 서서 대협이 되라던 그때의 그 간덩이 부은 여인이.
북궁천은 한숨을 쉬며 허공을 노려보았다.
“하아, 너를 얻는다는 게 정말 어렵구나. 너무 어려워. 천하를 얻는 것보다도 더…….”
“미안해요.”
북궁천은 그녀의 말을 듣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북천에 있을 때 한 번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물론 미안해할 일은 전부 자신이 저지르긴 했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니 끓어올랐던 가슴이 가라앉았다.
어쨌든 자신이 싫지 않다는 말을 들었지 않은가. 그렇다면 최악은 아니었다.
그뿐이 아니다.
‘지금 당장은……’이라고 했다.
묘한 여운이 남는 말이었다.
물론 자신이 원하는 것은 말 몇 마디가 아니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그녀, 그 자체였다.
그냥 데리고 가 버릴까? 함께 살다 보면 내 마음을 이해할지도…….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실천으로 옮길 의지도 충분했다.
어쩌면 그게 마제다운 행동일지 모른다.
그런데 헌원려려가 말했다.
“엉뚱한 생각하지 마세요. 그럼 당신에 대해 좋았던 마음마저도 바뀔지 몰라요.”
북궁천은 바로 계획을 접었다.
고집으로는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걸 이 년 전에 깨달았지 않은가.
그녀를 이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천하를 이기는 게 더 쉬웠다
‘제기랄, 그동안 눈치만 늘었나 보군.’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는 일!
그는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일단은 네 말대로 하겠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순 없다.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말해라. 내 가슴은 항상 열려 있으니까.”
그가 본 천사교 무리는 쉽게 무너질 자들이 아니었다.
전쟁이 길어지면 그만큼 혼인도 멀어질 터.
시간은 아직 많았다.
‘혹시 알아? 구양우경, 그 자식이 싸우다 죽을지.’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갑자기 구양우경의 머리 위에 벼락이 떨어질지도 모르고.
억지로 마음을 추스른 그는 백리진과 임강령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일은 못 본 것으로 해 주십쇼.”
백리진과 임강령으로선 반가운 말이었다.
그들도 조금 전의 일이 되풀이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렇게 하세.”
“이곳에 들어온 이후의 일은 기억에서 지우지.”
* * *
눈보다 더 하얀 은색 무복, 분을 칠한 것처럼 하얀 얼굴, 위로 치켜 올라간 눈초리, 피가 묻은 것 같은 붉은 입술.
왠지 으스스한 느낌을 들게 하는 청년은 보고를 받고 눈을 치켜떴다.
“서문려려를 빼앗겼다고?”
그의 입에서 여인의 목소리처럼 가냘픈 음성이 날카롭게 튀어나오자, 그의 앞에 도열해 있던 여덟 명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흑사령(黑邪令), 어디 이번 일의 책임자로서 어찌된 일인지 말해 보시오?”
은의청년이 한 사람을 지목하자, 오십 줄에 들어선 중년인 하나가 한쪽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
“검왕과 고검이 직접 나설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호교령의 도움 요청이 없어서 모든 게 잘 진행되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만…….”
“멍청하긴. 놈들을 얕보지 말라고 내 그토록 말했거늘, 호교령을 동원하고도 그 계집을 뺏기다니. 대체 내가 뭘 믿고 그대들에게 일을 시키겠소?”
은의청년은 중년인을 사정없이 다그쳤다.
한참 어린 그가 지나칠 정도로 다그치는데도, 중년인은 반발은커녕 오히려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소존.”
다른 자들도 감히 그를 위해 나서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문 채 지켜보았다.
은의청년은 서리가 풀풀 날리는 눈빛으로 중년인을 보면서 형벌을 내렸다.
“흑사령은 손가락 두 개를 잘라 참회하도록 하시오.”
“감사합니다, 소존!”
중년인은 손가락을 자르라는데도 지옥에서 빠져나온 사람처럼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품에서 소도를 꺼낸 그는 자신의 왼손 손가락 두 개를 잘랐다.
손가락이 바닥에 떨어지고 붉은 피가 대전 안에 뿌려지자, 도열한 사람들의 눈빛에서 괴이한 열기가 피어났다.
그들 중 흑사령을 안쓰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정도의 간단한 벌로 무마되는 것을 의외라고 생각할 뿐.
은의청년은 피를 보고 나서야 표정을 풀고, 자신의 손가락을 지혈하는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세운 공만 아니었다면 팔을 잘라야 했을 거요.”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은의청년은 그 정도에서 징벌을 멈추고 도열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삼성궁 놈들이 곧 대대적으로 움직일 거요. 천무회와 무림맹까지 끼어들면 우리의 계획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볼 수 있소. 그때까지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하시오. 곧 천사지존께서 오실 것인 즉, 이번 일처럼 실수가 있어선 안 될 것이오.”
도열해 있던 여덟 명은 은의청년의 말이 끝나자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염려 마시오, 소존!”
“천사의 세상이 곧 이루어지리다!”
바로 그때, 한 사람이 대전 안으로 뛰듯이 들어와 부복하고는 보고를 올렸다.
“소존이시여! 삼성궁이 서평을 공격했다 하옵니다!”
은의청년의 눈빛이 하얗게 번들거렸다.
서문려려를 놓친 마당에 서평이 공격당하다니!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분노에 휩싸여야 옳았다. 하지만 그는 일절 분노하지 않고 붉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웃었다.
“놈들이 서평을 공격했단 말이지? 흐흐흐, 북이 울리기도 전에 먼저 달려드는군. 그것도 괜찮은 일이야.”
* * *
북궁천은 헌원려려를 등에 업었다.
헌원려려가 걸어가겠다고 했지만 이번만큼은 그녀의 고집도 통하지 않았다.
“놈들이 언제 쫓아올지 모른다. 네가 걸어가면 오 리도 못 가서 따라잡힐 거다.”
사실이 그렇다는 걸 알기에 어쩔 수 없었다.
워낙 오랫동안 혈도를 제압당한 상태라 아직도 진기운행이 원활하지 못했다.
더구나 맨발 아닌가?
북궁천은 이불로 헌원려려의 몸을 둘둘 말고 손만 밖으로 나오게 했다.
밖으로 나가자 저만치에서 개미처럼 몰려오는 천사교도들이 보였다.
정말 지옥 끝까지 쫓아올 기세였다.
“정말 지독한 놈들이군. 그만 가세.”
임강령이 혀를 내두르며 앞장섰다.
천사교도들과의 거리가 다시 벌어지자 임강령이 참고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자네의 신분에 대해서 말해 줄 수 있겠나?”
“회룡당 제이대 무사 단화린.”
임강령이 발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가 입을 열기 전에 북궁천이 먼저 말했다.
“일단은 그렇게만 알고 계십시오. 나중에 때가 되면 제일 먼저 두 분께 말씀드리지요.”
중원은 북천궁을 마도로 취급한다. 반면 백리진과 임강령은 정파의 대표적인 고수.
신분을 밝혀서 이로울 것이 없었다. 자칫하면 헌원려려만 힘들어질지 모르고.
임강령은 북궁천을 잠시 노려보고는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며 말을 돌렸다.
“좀 전에 정말 서문 소저를 데리고 갈 생각이었나?”
“그렇습니다.”
“그럼 우리가 막았을 거네. 설마 우리가 그냥 보내 줬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겠지?”
북궁천은 앞을 바라보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섯 걸음을 걸은 뒤 나직이 말했다.
“그럼 두 분이 죽든가, 아님 제가 죽든가 했겠지요.”
그 말에 임강령과 백리진이 동시에 북궁천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누군가?
검왕은 당대 제일을 다투는 검의 절대 고수요, 고검은 그보다 반 수 아래이긴 해도 강호에 적수가 몇 안 된다는 고수다.
그런 두 사람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강호에 누가 있단 말인가?
기껏해야 두세 명?
아마 천사교도와 싸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통나무집 안에서의 가공할 기세를 겪어 보지 않았다면 당장 말도 안 되는 소리 한다며 호통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북궁천의 말을 인정할 수도 없지만.
“이제 보니 꽤 오만한 젊은이군.”
백리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나 임강령의 반응은 그와 조금 달랐다.
“그렇게 자신 있다면 언제 한번 정식으로 검을 겨뤄 보세.”
그는 굳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고 북궁천을 직시했다.
자신이 질지도 모르지만, 고검의 자존심까지 굽힐 수는 없었다.
북궁천은 이번에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문득 헌원려려의 숨소리가 빨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임강령의 말에 감정이 격해진 듯했다.
자신을 위해서?
아니면 백리진과 임강령을 위해서?
그도 아니면 대결에 흥미를 느껴서?
그는 설마 세 번째는 아니겠지 하면서 대답했다.
“그냥 하기는 그렇고, 내기를 하지요.”
뜻밖의 말에 임강령은 이마를 좁혔다.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그였다.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
“내기? 좋네, 뭘 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