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4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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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5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47화
47화
“그 친구가 단화린입니다, 형님. 마소곡이 그 친구의 손에 죽었다는군요.”
백리진의 눈이 조금 커졌다.
“허, 그래?”
북궁천은 백리진마저 마소곡의 이름을 듣고 놀라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마소곡이란 자를 죽인 게 그리 대단한 일인 줄은 미처 몰랐군요.”
“그가 누군지도 모르고 죽였단 말인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에 이름까지 알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하긴 그도 그렇군. 더구나 자네처럼 젊은 친구는 그를 모를 수도 있지. 십여 년 전에 강호에서 사라진 자니까.”
“그래도 검왕이 어떤 분인지는 압니다.”
백리진은 한 방 맞은 사람처럼 북궁천을 쳐다보았다.
북궁천은 초조함이 조금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강호에서 진정으로 대협이라 할 수 있는 분 중 한 분이라 하더군요.”
“과분한 말이네. 나는 그저 남보다 검을 조금 잘 쓰고, 독한 성격이 아닐 뿐이네. 그런 정도로 대협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천하에 대협이 수천 명은 될 거네.”
달리듯이 빠르게 걸어가던 임강령이 그 말을 듣고 한마디 툭 던졌다.
“형님은 너무 자신을 과소평가해서 탈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과대평가 한 거지.”
“그럼 백리 대협께선 어떤 사람이 진정한 대협이라 생각하십니까?”
북궁천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다른 누구보다 그에게서 대협의 의미에 대해 듣고 싶었다.
시기가 미묘하긴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듣지 못할지도 몰랐다.
“대협이라…… 강압에 굴하지 않고 의기로운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라면 대협이라 할 수 있겠지. 그런 사람은 많은 것 같으면서도 적고, 적은 것 같으면서도 많다네. 사실 나보다는 자네 옆에 있는 아우가 대협이라 불려야 하지.”
“형님도 참…….”
백리진은 임강령의 머쓱해하는 표정을 못 본 척하고 단화린만 바라보았다.
“그런데 자넨 대협이라는 말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것 같군.”
북궁천은 앞만 보고 걸음을 옮기면서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옛날에…… 어떤 여자가 저에게 대협이 되라 하더군요. 그럼 제 여자가 되겠다면서요.”
그런데 자신이 머뭇거린 사이 그녀가 납치되었다. 많은 것을 물어보고 싶은데, 그럴 시간도 주지 않고.
“그녀의 말을 듣고 대협이 되어 볼까 했는데, 흉내 내는 것도 쉽지가 않더군요. 이제는 그나마도 어려워질지 모르겠습니다만…….”
더는 머뭇거리지 않으리라. 더는…….
어둠을 응시하는 그의 두 눈이 천공의 어둠을 모조리 빨아들일 것처럼 깊어졌다.
‘려려, 무사해야 한다. 나를 위해서라도, 세상을 위해서라도.’
만약 그녀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천하는 마제의 분노에 치를 떨어야 할 것이다!’
그즈음, 서문려려의 납치 소식을 들은 위효릉은 비상을 걸고 무사들을 소집했다.
서문려려는 구양우경과 혼인할 여인임과 동시에 서문각의 딸이었다.
만약 범인이 천사교도라면 그녀를 철저히 이용할 터. 삼성궁에 적지 않은 타격을 줄 것이 분명했다.
무사들이 연무장에 모이자, 구양우경은 분노와 슬픔이 담긴 표정으로 말했다.
“부디 내가 사랑하는 여인을 구해 주시오! 범인을 잡고 려매를 구하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천금을 주겠소!”
무사들은 그의 말을 듣고 추적 의지를 불태웠다.
천금의 현상금도 현상금이지만, 구양우경의 서문려려에 대한 사랑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하지만 회룡당 무사들과 함께 있던 태극문 제자들은 헌원려려가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대형은 어딜 간 거야?’
‘설마 대형이 그녀를 납치한 것은 아니겠지?’
북궁천이 삼성궁에 들어온 이유가 무엇이던가. 헌원려려 때문이 아니던가?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태원까지 도망가야 했다.
그들이 엉뚱한 고민을 하는 사이, 위효릉은 무사들을 다섯 조로 나누었다.
그는 이번 추적에 삼성궁의 무사 거의 대부분을 동원할 작정이었다.
납치범을 쫓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많은 인원임에도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삼성궁의 후계자인 소궁주 구양우경과 혼인할 여인이 납치를 당한 것이다.
출동 준비가 끝나자 위효릉은 구양우경에게 말했다.
“소궁주는 이곳에 계시게나. 나와 등 형이 직접 갈 테니까.”
“아닙니다, 각주. 저도 가겠습니다. 제 여자를 구하는 일인데 제가 빠지면 안 되지요.”
말하는 구양우경의 두 눈 깊은 곳에서 광기에 찬 살기가 꿈틀거렸다.
언뜻 그걸 본 위효릉의 눈에서 찰나간 기광이 번뜩였다.
‘그런 살기도 가끔은 필요하지.’
하지만 그는 못 본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곳에만 있으면 마음이 더 답답하겠지. 좋네, 함께 가세.”
* * *
진원보를 나선지 삼각이 지날 즈음, 멈췄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임강령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대로 표식이 눈에 덮이면 온전히 자신의 능력만으로 적을 추적해야 한다.
문제는 그럴 경우 시간이 더 걸린다는 점이다. 한시 빨리 거리를 좁혀야 하거늘.
“그들과의 거리가 얼마나 될 것 같은가?”
백리진이 임강령의 마음을 읽고 물어보았다.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임강령은 대답을 하면서 서쪽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의 능력을 생각하면 지금쯤 따라잡았어야 한다. 그런데도 아직 따라잡지 못했다는 것은 수룡위사대원들이 적을 발견하고 빠르게 쫓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마음 같아서는 소리라도 질러서 불러 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범인만 도와줄 뿐이다.
그때 어둠속을 바라보던 북궁천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면, 일단 표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빠르게 달려가 보지요.”
“그러다 엉뚱한 곳으로 가면?”
“세 사람이 거리를 둔 채 부채꼴로 퍼져서 가면, 표식을 발견한 사람이 있는 곳으로 모이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눈이 쌓이면 나쁜 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적어도 덮이기 전까지는 더욱 확실한 표식을 남길 테니까요.”
임강령과 백리진은 북궁천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좋아, 그럼 내가 중앙을 맡을 테니, 형님이 좌측, 자네가 우측을 맡게.”
세 사람은 십여 장의 간격을 두고 앞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빠르게 달리면서도 바닥에 남은 흔적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삼백여 장 달렸을 때 백리진이 신호를 보냈다.
북궁천과 임강령은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가 서 있는 곳에는 화살표와 발자국이 일렬로 있었는데, 눈은 겉에만 살짝 쌓여 있었다.
“아우 말대로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은 것 같네.”
백리진의 말에 임강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죠.”
추적을 시작한지 반 시진 후.
앞서 달리던 임강령이 피를 뒤집어쓴 채 널브러져 있는 시신 두 구를 발견했다.
일대는 눈으로 엷게 덮여 있었는데, 핏물에 눈이 녹으면서 시뻘건 색깔이 더욱 선명했다.
북궁천은 시신을 뒤집어 보고 그중 하나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가 구양우경을 만나러 갔을 때 봤던 자였다. 하지만 다른 하나는 복장도 다르고 얼굴도 모르는 자였다.
두 구의 시신은 많은 것을 시사했다.
북궁천 일행이 범인의 뒤를 제대로 쫓고 있다는 것. 범인에게 동조자가 있다는 것. 그리고 거리가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까지.
그가 이를 지그시 악물고 있는데, 임강령이 시신의 몸을 살펴보고 일어났다.
시신의 온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심지어 피도 아직 멈추지 않은 상태였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꼬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그때 북궁천이 흠칫하며 고개를 들고 서쪽을 바라보았다.
간발의 차이로 백리진과 임강령도 뭔가를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바람 소리, 마른 나무 부딪치는 소리,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
그 와중에 병장기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섞여 있었다.
세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싸우는 소리가 들린 곳은 상당히 멀었다. 게다가 평지가 아닌 야산이 중첩된 지형인데다 눈마저 내리는 밤이어서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북궁천과 임강령, 백리진이 백여 장 거리까지 접근하는 동안 두 차례의 비명이 어둠을 흔들었다.
마음이 다급해진 백리진과 임강령은 더욱 속도를 냈다.
목적지가 코앞인 만큼 단화린이 따라오지 못하더라도 더 이상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북궁천은 그들의 뒤를 바짝 따라가며 엄지로 검을 밀어 올렸다.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언덕을 하나 넘자 격전을 벌이는 자들이 보였다.
어둠이 깔린 설원에서 싸우고 있는 자는 적아를 합쳐서 십여 명.
그런데…… 헌원려려가 보이지 않는다.
‘려려!’
가슴으로 그녀를 부른 북궁천은 백리진과 임강령의 뒤를 따라서 격전장으로 몸을 날렸다.
수룡위사대원이 다섯, 적으로 보이는 흑의인이 여덟.
땅바닥에는 대여섯 명이 눈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쓰러져 있었다.
격전이 벌어지는 곳으로 뛰어든 북궁천은 망설이지 않고 살수를 썼다.
적을 살려서 제압하겠다고 촌각의 시간을 더 쓰는 것조차 아까웠다. 말을 할 수 있는 자는 하나면 족하니까.
오죽하면 방해가 되는 수룡위사대원의 검마저 쳐 내고 흑의인의 목을 쳤다.
쩌저정! 서걱!
단숨에 흑의인 하나를 베어 버린 그는 또 다른 먹이를 찾아 몸을 날렸다.
백리진과 임강령도 수룡위사대가 상대하던 자들을 빠르게 제압했다.
수룡위사대원들은 백리진과 임강령을 알아보고 눈을 부릅떴다.
검왕과 고검이 황량한 벌판에 나타난 것이다.
흑의인들은 그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들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흑의인들은 철벽에 부딪친 것처럼 튕겨져 나뒹굴었다.
북궁천은 다른 자들을 두 사람에게 맡기고 외곽 쪽의 흑의인을 노렸다.
그는 묵혼으로 상대의 검을 쳐내고, 가슴을 향해 좌수 일권을 뻗었다.
쾅!
북두패왕권이 가슴에 틀어 박히자 흑의인의 몸이 훌훌 날아갔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북궁천은 땅에 떨어져서 발버둥치는 흑의인의 가슴을 검으로 가리키며 나직이 물었다.
“그녀를 납치한 자는 어디로 갔지?”
두 눈 깊은 곳에서 활활 타오르는 분노의 불길이 흑의인의 영혼을 압박했다.
고통에 일그러진 흑의인의 표정이 거세게 흔들렸다.
북궁천은 흑의인의 발목에 오른발을 얹고 지그시 밟았다.
우두둑.
“끄으으으.”
“천사교의 개, 그녀를 어디로 데려갔지?”
흑의인은 뼈가 으스러지는 와중에도 입을 열지 않고 망설였다.
북궁천의 발이 다른 쪽 발목에 얹어졌다.
“말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지옥의 고통을 맛보게 될 거다. 네놈의 살을 으깨고 뼈를 조각, 조각 부숴 버릴 테니까.”
뇌리를 뒤흔드는 처절한 분노의 울림.
한 점 흔들림 없는 두 눈에서 쏟아져 나오는 살광.
오오, 마음속에 있던 아수라가 눈앞에 현신한 것인가?
흑의인은 덜덜 몸을 떨면서 입을 달싹였다.
“호, 호교령께선…… 상남으로…….”
“서평이 아니고 상남? 이유가 뭐지?”
“소존께서 상남에…….”
순간 북궁천의 두 눈 깊숙한 곳에서 타오르던 불길이 밖으로 표출되었다.
“설마…… 소존이란 자에게 그녀를……?”
“그, 그렇게 알고 있습…… 끄어어억!”
분노의 불길에 휩싸인 북궁천은 흑의인의 나머지 발을 으깨 버렸다.
그리고 비명을 내지르는 그의 목을 쳐 버렸다.
그즈음, 백리진과 임강령이 흑의인들을 모두 쓰러뜨렸다.
쓰러진 흑의인 중 살아남은 자는 셋. 두 사람은 그들을 취조해서 서문려려의 행방을 알아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북궁천은 그들이 취조를 마칠 때까지 기다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휘익! 땅을 박찬 그는 서쪽으로 몸을 날렸다.
“이보게!”
임강령이 그 모습을 보고 소리쳐 불렀지만 북궁천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