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4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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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3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41화
41화
“전주님, 놈들이 상남에서 서평으로 모두 이동하지 않는 것은 화산과 종남 때문일 겁니다. 차라리 밤에 이동해서 놈들을 치는 게 어떻겠습니까?”
선우강은 이마를 좁히고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잘못하면 놈들의 함정에 빠질 수 있네. 그리고 밤에 난전이 벌어지면 희생이 커질 수밖에 없어. 자네 생각도 나쁜 건 아니네만 지금으로선 무리야.”
“지금 상황은 단순한 문파 간의 힘겨루기가 아닙니다. 천사교를 물리치기 위한 전쟁이지요. 전쟁에서 희생은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설령 같은 숫자가 죽어도 인원수에서 저희가 앞서니 승리는 우리 것이 될 것입니다.”
냉정한 말이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수하들의 죽음 정도는 안중에도 없다는 말투.
선우강은 그 점이 마음에 안 들어서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소궁주의 말도 일리가 없진 않네만, 수하들의 목숨을 담보로 승리하고 싶은 마음은 없네.”
“전주께서 그런 마음이시라면 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구양우경은 순순히 물러섰다. 하지만 그는 속으로 조소를 짓고 있었다.
‘많이 늙었군. 패기가 강하기로 유명한 도무전주가 죽음을 겁내다니.’
그때 선우강이 천광호를 불렀다.
“천 당주.”
구양우경의 말에 기분이 상해서 잔뜩 인상을 쓰고 있던 천광호가 고개를 들었다.
“예, 전주.”
“승룡당과 함께 가라. 흩어진 애들을 찾아보고, 죽은 애들의 시신을 최대한 수거해. 놈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고.”
마침내 첫 번째 임무가 떨어졌다.
천광호는 이를 지그시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전주. 그런데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그냥 돌아올 것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저는 누구처럼 마음이 독하지 못해서 수하들이 버림받은 개처럼 죽는 꼴을 보지 못하거든요.”
그렇게 말한 천광호는 구양우경의 싸늘한 눈길을 외면한 채 몸을 돌렸다.
‘어떤 놈들이 소궁주의 성격을 봄바람처럼 부드럽다고 한 거야? 미친놈들!’
사실 어제, 아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사람은 술 마실 때와 도박할 때, 그리고 싸울 때 진실이 드러난다 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 * *
“출동한다! 소지품 잘 챙겨서 연무장으로 나와라!”
조관의 굳은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이대의 대원들은 모두 작은 봇짐을 메고 일어났다.
봇짐 속에는 둘둘 만 면포와 금창약 등 부상자를 치료할 간단한 물건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북궁천과 태극문 제자들, 이조량도 봇짐을 메고 방을 나섰다.
그들이 연무장을 가로질러 정문 쪽으로 걸어갈 때였다.
저쪽 구석진 곳에 있는 건물 사이에서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나타났다.
금방 구름을 타고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 헌원려려였다.
걸음을 멈춘 그녀는 승룡당과 회룡당 무사들이 연무장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북궁천은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려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려려, 네가 나왔구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잘 갔다 올 테니, 걱정 말고 쉬어라. 갔다 와서 너를 찾아가마, 려려…….’
그녀가 나온 것을 본 사람은 북궁천만이 아니었다. 다른 대원들도 그녀를 봤는지 수군거렸다.
“우와, 진짜 예쁘네.”
“제길, 내 마누라도 젊을 적에는 예뻤는데.”
“흐흐흐, 오늘은 운이 좋군, 서문 소저를 보다니.”
헌원려려는 많은 무사들이 자신을 바라보자 괜히 무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그가 보였다. ‘그 사람’만큼이나 키가 큰 사람이.
‘아, 저 사람도 출정하네?’
코밑이 다른 사람의 머리에 가려져 있고, 그나마 비스듬히 돌린 얼굴도 늘어진 머리카락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어디서 많이 본 느낌.
게다가 자신을 보면서 웃는 듯, 눈가에 아주 편안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녀도 그를 보면서 웃어 주었다.
‘무사히 돌아와요.’
그때였다.
“려매, 바람이 찬데 여기서 뭐하는 거요?”
등 뒤에서 온화한 목소리가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구양우경의 목소리였다.
흠칫한 그녀는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뒤돌아섰다.
“공자 방으로 가는데 무사들이 출동하고 있어서 잠시 구경했어요.”
구양우경은 정문을 빠져나가는 무사들을 일견하고는, 조소를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저 사람들은 신경 쓸 것 없소. 자, 안으로 들어갑시다.”
“예, 공자.”
헌원려려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구양우경을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 순간!
― 려려…….
아스라이 들려오는 환청 같은 목소리.
그녀는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 사람의 목소리야, 그 사람의 목소리. 분명해!’
하지만 만 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왜 이곳에서 들린단 말인가?
요즘 들어서 그를 자주 생각하다 보니 환청이 들리는 건가?
그녀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구양우경이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려매, 어디 아픈 것 아니오?”
“날씨가 싸늘해서 그런가 봐요. 안으로 들어가면 괜찮아질 거예요.”
헌원려려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꼭 쥔 그녀의 섬섬옥수 안에는 땀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7장. 광기에 물든 자들
승룡당은 도화당의 생존자를 찾기 위해 중도에서 따로 떨어져 나갔다.
회룡당만이 제법 세차게 불어오는 밤바람을 가슴에 안고 격전지로 접근했다.
나라 간의 전쟁에서도 어지간하면 시신을 회수하는 자들을 건들지 않는다.
심지어는 시신을 모아서 상대에게 전해 줄 때도 있다. 시신을 처리하다 보면 그만큼 상대의 힘이 소모될 테니까.
강호에서도 언제부턴가 시신을 회수하는 자들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합의가 무언중에 이루어져 있었다.
역병의 창궐을 막기 위해서는 시신을 묻어 주거나 태워야 하는데, 항상 적의 시신까지 처리할 수는 없는 것이다.
회룡당이 믿는 구석은 오직 그것 하나였다. 상대가 천사교라는 점이 문제긴 하지만.
천사교.
그들은 단순한 마도의 세력이 아니었다.
악(惡)을 추종하고 인의를 위선으로 치부하며, 악신인 아수라를 신처럼 떠받들었다.
―세상은 본래부터 악에서 출발했도다!
그렇게 외치는 자들.
그들에게 있어 정도(正道)란 악의 본체에 위선의 껍질을 뒤집어 쓴 것일 뿐.
껍질을 벗기면 결국 악이 드러날 수밖에 없으니, 세상에서 단 하나의 진리는 오직 악에 있다고 믿었다.
진정한 정도란 있을 수도 없고, 있지도 않는 것!
죽고 죽이는 것은 태고 적부터 인간 본연의 행동이니, 죄 될 것도 없고 죄악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믿음이 철저해서 타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오직 자신들만의 생각이 옳고, 남의 생각은 위선일 뿐.
처음에만 해도 그들이 그렇게 커질 줄은 누구도 몰랐다.
그러나 인간은 정도를 걷는 것보다 일탈의 길을 걷는데 더 빨리 익숙해지는 법.
그들의 뿌리는 순식간에 정파의 밑바닥으로 거미줄처럼 뻗어 나갔고, 결국은 무림맹이라는 거목을 단숨에 쓰러뜨려 버렸다.
친구를 믿을 수 없고,
사부를 믿을 수 없고,
제자를 믿을 수 없게 되자, 언제까지나 강호정파의 기둥으로 군림할 것 같던 무림맹이 산산조각 나 버린 것이다.
“놈들을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 생각하지 마라. 그놈들이야말로 진짜 제대로 미친놈들이야. 행여나 그들이 나타나서 가만히 보고만 있더라도 경계심을 늦추지 마라.”
천광호는 격전지인 계곡을 오 리가량 앞두고 회룡당 대원들에게 단단히 경고했다.
그는 천사교에 대해서 이곳의 누구보다 잘 알았다.
삼성궁의 전 인원을 통틀더라도 그보다 잘 아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한때 천사교에 빠졌던 친구를 둔 덕분이었다.
지금은 그의 손에 죽었지만.
그리고 그가 미친 호랑이로 불리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 * *
달빛이 쏟아지는 계곡에 시신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야조 몇 마리가 날개를 펄럭이며 시신들 사이를 오가고, 야행성 맹수들이 오랜만의 포식을 즐기고 있었다.
회룡당 대원들은 그 모습을 보고 돌을 들어 던졌다.
“저리 가, 이놈들아!”
피냄새에 코가 마비되어 있던 야조와 맹수들은 그제야 살아 있는 인간의 접근을 눈치 채고는, 아쉬운 눈빛을 감추지 못한 채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빌어먹을 놈의 짐승들. 뭐 해? 빨리빨리 움직여! 너무 많이 상한 시신은 저쪽 구덩이에 묻어라.”
어차피 팔다리가 뜯겨져 나가고 내장이 드러난 시신은 옮길 수도 없었다.
천광호의 명령이 떨어지자, 회룡당 대원들은 한쪽의 움푹 파인 구덩이에 시신들을 모았다. 그러고는 상대적으로 훼손이 덜 된 시신만 골랐다. 그런 시신만 해도 삼십여 구는 되었다.
회룡당 대원들이 아무리 험한 강호에서 살아왔다 해도 이처럼 처참한 광경은 처음 대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구역질이 나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면서 시신을 처리했다.
“우웩!”
“우욱!”
도저히 못 참겠는지 몇 사람은 허리를 구부리고 헛구역질을 해댔다.
그나마 밤이라는 게 다행이었다. 낮이었다면 더욱 참혹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한편, 북궁천은 구덩이에 이십여 구의 시신이 던져지자 발을 굴러서 땅을 허물어뜨렸다.
힘들게 흙을 떠 넣을 것도 없이 서너 번 만에 시신 대부분이 두터운 흙으로 덮였다.
이정한과 동호량, 초강과 이조량은 나머지만 정리했다.
그런데 시신 처리가 거의 끝나 갈 무렵이었다.
‘응?’
북궁천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청력을 집중시켰다.
오른쪽에 있는 숲 속에서 나직한 소리가 들렸다.
짐승들이 내는 소리와는 느낌이 사뭇 다른 소리.
잠시 귀를 기울이던 그는 확신을 갖고 천광호에게 말했다.
“당주, 생존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 갈며 수하들을 닦달하고 있던 천광호가 홱 고개를 돌렸다.
“그래? 어디?”
북궁천은 오른쪽 숲 속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천광호와 송찬, 조관도 달리듯이 그를 따라갔다.
북궁천이 부상자를 발견한 것은 숲으로 이십여 장 들어간 후였다.
바위 사이에 세 사람이 뭉치듯이 엉겨 있었다. 신음에 가까운 기이한 소리는 그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송찬과 조관이 나서서 엉겨 있는 자들을 들어냈다.
위에 있는 두 사람은 이미 죽은 상태였고, 아래쪽에 있는 한 사람만이 살아 있었다.
그는 체온이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해서 죽은 동료의 시신으로 자신의 몸을 덮고 있었던 것이다.
조관이 나서서 그자의 상처를 빠르게 손봤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북궁천을 올려다봤다.
“좀 도와주게. 기의 흐름이 너무 약하네.”
심장이 뚫린 두종진에게 말을 하게 만든 사람 아닌가?
단화린이라면 이자의 흐트러진 기운을 바로잡을 수 있을 듯했다.
북궁천은 별말 없이 부상자의 가슴에 손을 얹고 내기를 불어 넣었다.
조관이 상처를 다 싸맸을 때는 부상자의 호흡이 전보다 훨씬 안정된 상태였다.
“조 대주, 내 등에 업히게.”
송찬이 나서서 등을 내밀었다.
그런데 북궁천이 그를 말렸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조관과 송찬이 그를 바라보았다.
북궁천은 그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부상자의 몸에 다시 내력을 주입했다.
부상자가 자꾸만 입을 달싹이는데 왠지 다급한 표정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소?”
내력의 주입으로 어느 정도 기운을 찾은 부상자는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빠, 빨리 돌아가시오. 놈들이…… 곧 몰려…… 어쩌면…… 앞을 차단했을 지도…….”
천광호의 안색이 급변했다. 하지만 그는 그 와중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이곳에 있으면서 그걸 어떻게 알았지?”
“전…… 도화당 무사가 아닌…… 잠은각……. 놈들에게 접근했다가 들켜서…… 도주 중에 당했…….”
시신을 가지러 오든 복수를 하러 오든, 삼성궁에서 무사가 올 것은 분명한 일. 천사교는 그 점을 철저히 이용하려는 듯했다.
강호의 일반적인 법도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 사악한 놈들이……!”
마음이 다급해진 천광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송찬, 업어라. 이곳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