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4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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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9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40화
40화
* * *
사시(巳時:오전9시~11시) 초.
삼성궁의 정문이 활짝 열렸다.
둥! 둥! 둥! 둥!
출전을 알리는 북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오백 명에 이르는 무사들이 열을 지어 정문을 나섰다.
회룡당은 선두에 끼지도 못하고 뒤로 처져서 대열을 따라나섰다.
북궁천은 차라리 그게 더 나았다.
구양우경과 장로를 비롯한 간부들, 그리고 한 채의 가마가 저만치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덕분에 그는 주위를 돌아보는 척하며 구양우경을 볼 수 있었다.
호위무사들에게 둘러싸인 그는 백색과 청색으로 어우러진 비단 무복을 걸치고, 등에는 고급스런 수실이 달린 검을 매고 있었다.
하얀 얼굴은 신룡공자라는 별호만큼이나 준수했고, 당당한 모습은 삼성궁의 차대 궁주라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북궁천은 그를 보면서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정말 미끈하게 생긴 놈이군.’
너무 잘생겨서 탈이었다. 소문으로 듣긴 했지만, 직접 본 그는 전설의 송옥이나 반안보다 더 잘생긴 듯했다.
헌원려려도 여자가 아닌가?
저런 놈과 함께 있었으니 지금쯤 그녀의 마음은 온통 저놈으로 가득 찼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기분 나쁜 이유가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구양우경을 호위하는 십여 명의 무사들. 그들이 이상할 정도로 신경 쓰이는 것이다. 모두가 처음 보는 자들이거늘.
‘비밀 호위인 모양이군. 저놈들이 가까이 있으면 려려에게 몰래 접근하기가 쉽지 않겠는데?’
그때 조관이 그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나직이 말했다.
“소궁주의 호위들은 검신가를 암중에서 지킨다는 수룡위사대(守龍衛士隊) 같군.”
북궁천의 두 눈 깊숙한 곳에서 한광이 번뜩였다.
수룡위사대는 모두 서른여섯 명.
그들은 삼성궁주인 구양환과 소궁주 구양우경, 그리고 검신가의 최고위층을 암중에서 호위하는 게 임무였다.
급박한 상황이 닥치면 가장 먼저 저들과 대치하게 될지도 모를 일. 북궁천은 조관에게 넌지시 물었다.
“조 대주, 수룡위사대에 대해서 잘 아시오?”
“아는 사람이 거의 없네. 솔직히 오늘 저자들이 나오지 않았으면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몰라봤을 거네.”
그 말을 들은 북궁천의 뇌리에 문득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혹시 두종진을 죽인 자도 수룡위사대……?’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조관이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것만으로 그들을 의심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지도.
하지만 극히 적은 가능성이긴 해도 의심이 가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 * *
초겨울 바람이 늘어진 주렴을 비집고 안으로 스며든다.
조금 차갑게 느껴지지만 헌원려려는 창을 닫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 답답한 것보다는 나았다.
설매원은 무척 넓었음에도 그녀에게는 감옥과 같은 곳이었다.
마음대로 어딜 갈 수도 없고, 허락되지 않은 사람은 만날 수도 없고, 말과 행동조차 자신의 뜻대로 할 수가 없었다.
철창에 갇힌 다람쥐나 다름없는 신세.
그나마 사흘에 한 번 보는 진아 때문에 겨우 견딜 수 있었다.
구양우경은 유난히 진아 문제를 신경 썼다.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진아를 사람들과 철저히 격리시켰다.
진아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의원과 진아를 돌보는 시비뿐. 심지어 자신조차도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자주 만나지 못하게 했다.
만날 때도 어미와 자식이라는 내색을 하지 못하게 했고.
아마 삼성궁 내에서 진아가 자신의 자식이라는 걸 아는 사람의 숫자는 다섯 명도 안 될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가 진아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정말 진아의 아버지라도 되는 것처럼 살갑게 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아무리 진아를 위해도 마음이 기울지 않았다.
‘정말 소궁주와 혼인하는 게 옳은 걸까?’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되뇌던 고민을 또다시 떠올렸다.
진아를 위해서 이 자리에 서 있다.
아니, 어쩌면 헌원가를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고모부는 자신이 구양우경과 혼인을 하면 전력을 다해서 헌원가의 재건을 돕겠다고 했다. 고모부가 아니어도 소궁주의 부인이 되면 자신의 힘으로 가문을 재건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마지못한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거늘, 시간이 갈수록 후회가 되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도 살다 보면 정이 들겠지 했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더구나 소궁주 구양우경은 일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모든 걸 포기한 자신을 지치게 할 정도로.
심지어 어떤 때는 섬뜩한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성격이 그 사람의 반만 따라가도 괜찮을 텐데.’
문득 오래전의 일이 떠오르자 입가에 슬며시 웃음이 매달렸다.
그는 자신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 잘하지도 못하는 농담을 하고는 자신이 웃지 않자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었었다.
“려려, 나는 사람 웃기는 재주가 없나 보다. 어제 하루 종일 연습했는데도 이러니…….”
그러다 자신이 한 번 웃으면 세상을 얻은 것처럼 즐거워했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가 북천궁의 주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녀는 그를 따랐을 게 분명했다.
그날 그 일만 아니었어도……
몇 달만 더 그가 참았어도…….
‘그랬으면 내 마음의 벽도 무너졌을지 모르는데…….’
그녀는 지금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정파의 품 안에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패도제일이라는, 중원에선 마도로 치부하는 북천궁에 있을 때보다 더 답답하고 불안했다.
지금 그를 만나면, 그때처럼 자신 있게 대협이 되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녀는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아직 진아에 대해서 모르고 있을 그에게 한 없이 미안했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그때 주렴 사이로 저만치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키가 상당히 컸다. 그녀가 아는 누구만큼이나.
그녀는 그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그 사람도 살 좀 빼야 되는데. 저 사람 봐, 얼마나 멋진 몸이야.’
그녀가 북천궁주와 앞에 가는 무사를 비교하며 소리 없이 웃고 있는데 옆에서 구양우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불편하지 않소?”
고개를 돌린 그녀는 창문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괜찮아요. 흔들림이 없어서 편해요.”
“다행이오. 하하하, 불편하면 언제든 말하시오.”
북궁천은 구양우경의 웃음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자연스럽게 돌리며 가자미눈으로 뒤를 바라보았다.
뭐가 그리 좋은지 구양우경이 가마 안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가슴이 쇠갈퀴로 긁힌 듯 무척이나 쓰렸다.
자신이 저 자리에 서 있어야 하거늘…….
‘꼭 족제비 같은 게 웃기는…….’
* * *
다음 날 오후, 삼성궁 무사들은 서협의 진원보에 도착했다.
진원보는 삼성궁의 분타 역할을 하는 곳이었는데, 다행히 천사교의 공격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이 도착한 지 한 시진이 지날 무렵, 정보를 총괄하는 잠은각의 우령주 곽조승이 굳은 표정으로 보고를 올렸다.
“놈들의 숫자가 일천을 넘었다 합니다, 전주.”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듣고 있던 백발노인이 물었다.
“놈들은 지금 어디까지 왔는가?”
그가 바로 선발대의 총지휘책임자인 도무전주(刀武殿主) 선우강이었다.
“서평의 광원산장을 장악하고는 그곳에서 후속대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우강은 좌중에 앉아 있는 간부들을 바라보았다.
앞에는 그와 곽조승을 제외하고, 네 명의 장로와 십이당 중 오당의 당주, 그리고 구양우경이 앉아 있었다.
“놈들의 정확한 힘을 알기 위해서 시험을 해 봐야 할 것 같은데, 누가 나서겠나?”
턱수염이 장비처럼 뻣뻣하게 난 중년인 하나가 턱을 쳐들고 말했다.
“저희가 한번 놈들을 건드려 보겠습니다, 전주.”
그는 십이당 중 하나이며 신도가에 속한 도화당(刀火堂)의 당주 구철산이란 자로, 성격이 괄괄하고 의기(義氣)가 강한 것으로 유명했다.
“좋다. 그럼 네게 맡길 테니, 너무 깊이 들어가진 말고 적당히 치고서 빠져라.”
“하하하, 너무 걱정 마십시오. 천사교 놈들은 우리 삼성궁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놈들이 우리를 화산과 종남처럼 생각했다가는 큰 코 다칠 겁니다.”
구철산은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선우강은 그런 구철산의 호기를 눌렀다.
“방심하지 마라, 구 당주. 화산과 종남이 약해서 놈들에게 당한 것이 아니야.”
찔끔한 구철산은 자라목처럼 머리를 쑥 집어넣었다.
“아, 예. 전주.”
“분명히 말하지만 시험을 하기 위한 것이니, 전면전은 최대한 피하도록 해라.”
“명대로 하겠습니다.”
북궁천은 백 명에 가까운 도화당 무사들이 진원보를 빠져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시작인 모양이군.”
뒤에서 조관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싸움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회룡당 무사들이 임무를 수행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
북궁천의 눈빛이 무저갱처럼 깊어졌다.
스무 살 때부터 대규모의 전쟁을 치른 그였다. 그것도 수천의 무사들을 이끌고 수천 리를 종횡하면서.
하기에 그는 도화당이 나서는 목적을 어렵지 않게 유추했다.
‘적의 힘을 측정해 보겠다는 건가?’
그 말인 즉, 삼성궁은 천사교의 무력에 대해서 아직까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했다.
반면 천사교는 삼성궁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을 것이고.
삼성궁의 힘이 천사교보다 월등하게 강하지 않다면, 시작부터 밀리고 들어가는 싸움이 아닐 수 없었다.
‘좋지 않아. 인원을 대규모로 보내는 것보다는 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일부만 보내는 게 나은데. 아니면 고수들만 몇 보내던가.’
만약 도화당이 큰 피해를 입는다면 전력에 커다란 공백이 생기는 꼴이 될 것이다.
* * *
북궁천의 우려는 그날 밤에 현실로 나타났다. 도화당 무사 구십 명 중 십여 명만이 살아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돌아오지 못한 자들 중에는 당주인 구철산도 있었다.
선우강은 살아서 돌아온 자들의 보고를 받고 노성을 내질렀다.
“이런 바보 같은 놈! 내 그렇게 깊이 들어가지 말라 했거늘! 구 당주는 어떻게 되었느냐?”
살아서 돌아온 자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격정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당주께선 저희들을 보내고 혼자서 적을 막아섰습니다, 전주!”
도화당과 마주친 적은 모두 백오십 명 정도.
구철산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생각하고는 그들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어느 정도 싸우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후퇴할 생각을 하고서.
그런데 예상보다 적의 움직임이 빨라서 후퇴할 시간도 없이 퇴로를 봉쇄당하고 말았다.
양면협공을 받는 꼴이 되어 버린 상황.
그때만 해도 구철산은 자신이 있었다. 천사교의 잡졸들이 삼성궁의 정예를 상대할 수 있으랴 하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적들의 무공은 구철산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강했다. 그가 아차 했을 때는 이미 삼십여 명이 쓰러진 상태였다.
결국 그는 수하들을 후퇴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선우강은 분노를 억누르고 좀 더 자세한 것을 물었다.
“그곳에서 빠져나온 것은 너희들뿐이냐?”
“저희들 외에도 십여 명이 더 빠져나왔는데, 흩어지는 바람에 찾을 수가 없어서 일단 저희들부터 복귀했습니다.”
선우강은 고개를 돌려 곽조승을 바라보았다.
“놈들의 움직임은?”
“여전히 서평에 머물고 있습니다.”
“모두 몇 명이나 되느냐?”
“삼백에서 사백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삼사백.
숫자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개개인의 무위가 삼성궁 무사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라면 상당한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내일까지 놈들의 후속대가 합류하지 않으면 공격하기로 하지.”
침중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간부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구양우경이 선우강을 빤히 바라보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