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77화
무료소설 마정록: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8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77화
77화
‘정말 좋은 장소를 찾았군. 지하라면 소리도 거의 새어 나오지 않겠는걸?’
만족한 그는 기둥에 매달린 등잔을 들고 지하로 통하는 문을 닫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은 정확히 열세 개로 끝이 났다.
그리고 이십 평가량 되는 지하 석실 중앙에 그녀가 쓰러져 있었다.
손이 뒤로 묶이고 입에는 재갈이 물린 채, 두려움에 가득 찬 눈을 말똥말똥 뜨고서.
구양우경은 등잔불을 벽에서 툭 튀어나와 있는 선반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잘게 떨리는 목의 하얀 살결이 등잔불빛 때문인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초에 힘이 들어가고 숨이 거칠어졌다.
그래, 바로 이거야! 여자란 곱게 다룰 존재가 아니라 고통을 줘야 하는 존재야!
하얀 살결이 파르르 떨리는 저 모습을 봐라!
저 하얀 살결이 그물처럼 갈라지며 붉은 선혈이 배어 나오면 얼마나 아름다울 건가?
구양우경은 숨을 몰아쉬며 붉어진 입술을 핥았다. 면사 위로 드러난 눈 가장자리에 주름이 지며 음악한 웃음이 떠올랐다.
“좋군, 아주 좋아. 오랜만에 제대로 된 물건을 구했어.”
소동동은 그의 모습을 보고 공포에 질려서 부들부들 떨었다.
단순히 자신을 겁탈하려고 납치해 온 것이 아닌 듯했다.
정확히 알진 못해도 그 이상의 사악한 뭔가를 하기 위해서 자신을 납치한 듯했다.
“으으으으으.”
재갈이 물린 그녀의 입에서 애걸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구양우경은 그녀의 그러한 신음이 너무나 듣기 좋았다. 세상의 그 어떤 음악보다도 아름답고 황홀했다.
“후후후, 목소리도 마음에 드는군. 살고 싶으면 더 애걸해 봐라. 아주 처절하게. 그러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그는 나직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가슴 위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의 손짓을 따라서 소동동의 옷자락이 칼날에 스친 것처럼 갈라졌다.
그리고 눈처럼 하얀 살결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 올 한 올, 솜털도 놓치지 않고 그녀의 살결을 훑어보는 구양우경의 검은 눈동자가 점점 작아지고 눈빛이 붉게 물들었다.
그는 도저히 더 참지 못하겠는지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을 거칠게 벗었다.
* * *
바싹 마른 낙엽이 거친 바람에 뒹굴며 비명을 지른다. 달빛 아래 비친 풍경은 오싹할 정도로 스산하기만 하다.
이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관운묘를 응시하던 북궁천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너무 늦어도 안 되고, 빨라도 안 된다. 변명할 여지도 없이 확실한 현장을 잡아야 한다.
그래서 기다렸는데 뭔가 이상하다.
구양우경이 안으로 들어간 지 일각. 수룡위사대원들이 밖을 지키는 걸 보면 장소를 잘못 안 것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쯤이면 그가 슬슬 본성을 드러내야 하거늘, 별다른 기척이 들리지 않는다.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일. 자칫하면 소동동이 다칠지 모른다.
그 순진한 아이에게는 큰 피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했거늘.
‘일단 안으로 들어가 보자.’
먼저 그는 좌측에 있는 조관수에게 전음을 보냈다.
―제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뒤따라오시면서 놈들을 정리하십시오.
―알겠네.
그는 조관수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관운묘를 향해 빠르게 접근한 후 허공으로 솟구쳤다.
십여 장 솟구쳐서 밤하늘을 가로지른 그는 수룡위사대원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때까지도 운평은 나름대로 꿈에 부풀어 있었다.
오늘만 지나면 자신은 삼성궁 소궁주의 확실한 심복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으리라.
그 말인즉, 소궁주가 궁주가 되면 궁주의 심복이 된다는 뜻이었다. 단숨에 삼성궁의 고위 간부가 되는 것이다.
‘사람은 기회를 잘 이용해야 해. 내 손에 피만 안 묻히면 되는 것 아니겠어?’
그 때 머리 위가 묵직해졌다.
이상한 느낌이 든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순간, 시커먼 뭔가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퍽!
‘끄억!’
비명조차 밖으로 내뱉지 못한 그는 얼어붙은 땅에 얼굴을 처박았다.
운평을 일수에 꼬꾸라뜨린 북궁천은 또 다른 수룡위사대원을 향해 날아가며 손을 뻗었다.
운평이 쓰러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수룡위사대원은 망치로 얼굴을 얻어맞는 느낌과 함께 눈앞이 캄캄해졌다.
단숨에 운평과 수룡위사대원을 쓰러뜨린 북궁천은 관운묘 안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사당에 바짝 붙어서 귀를 기울인 순간!
“으으으으…….”
안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귀를 기울여야만 들릴 만큼 가늘고 미약한 소리. 그러나 그 신음에는 공포에 젖은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북궁천은 급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때 또다시 신음이 들렸다.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았다.
순간, 우측 구석에서 새어 나오는 가느다란 빛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공포에 질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 살려 줘요. 아악!”
북궁천은 빛이 새어 나오는 곳을 향해 몸을 날리며 손을 뻗었다.
벌거벗은 구양우경은 살아 있는 뱀처럼 비늘이 달린 채찍을 소동동의 목에 감고 기괴한 웃음을 지었다.
“흐흐흐흐, 고통은 잠깐이다. 흔적이야 남겠지만 그 또한 영광으로 여겨라. 내가 사랑해 줬다는 것만으로도 너는 행복한 계집이니라.”
그는 그녀의 목을 감은 채찍을 풀어 머리 높이 들어 올렸다.
소동동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부들부들 떨며 울었다.
“사, 살려 주세요.”
구양우경은 그녀의 그런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조금 더 세차게 때려 깊은 흔적을 남길 작정이었다.
기왕이면 오래 버텨 주길 바라면서.
“너도 곧 즐거워질 거다.”
그는 하얗게 웃으며 채찍을 내려쳤다.
그 때였다.
쾅!
굉음과 함께 지하로 내려오는 문이 터져 나갔다.
움찔한 구양우경은 내려치던 채찍에서 힘을 빼고 입구를 바라보았다.
희미한 등잔불빛에 한 사람이 보였다.
자신이 지독히도 싫어하는 놈과 똑같은 얼굴이었다.
“네놈이 감히!”
일갈을 내지른 그는 채찍을 틀어서 다가오는 북궁천을 후려쳤다.
계단을 내려온 북궁천은 불길이 이는 눈으로 구양우경을 바라보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네놈을 곱게 죽이면 하늘이 나를 욕할 것이다!”
날아들던 채찍이 그의 몸 한 자 떨어진 곳에서 튕겨 나갔다.
구양우경이 멈칫한 순간, 북궁천의 주먹이 그를 향해 날아갔다.
구양우경은 황급히 손을 저어서 그의 주먹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겉보기에 단순한 북두패왕권은 대충 손을 저어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더구나 극한의 분노마저 섞인 권세였다.
쾅!
“크억!”
벌거벗은 구양우경의 몸이 벽까지 밀려나더니 텅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북궁천은 그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다시 주먹을 날렸다.
구양우경은 안간힘을 다해서 그의 공격을 막았다.
그래도 명색이 사공강후와 함께 하남 최고의 젊은 고수라 불리는 그가 아닌가.
전 공력을 끌어 올린 그는 삼초의 북두패왕권을 가까스로 막아 냈다.
해쓱하니 질린 얼굴. 파르르 떨리는 눈빛.
북궁천의 강함을 직접 몸으로 느낀 구양우경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단화린! 오늘 일을 못 본 척하면 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 해 주마.”
하지만 북궁천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혹시 려려도 저런 꼴을 당하지는 않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 본 그녀의 처연한 눈빛이 아무래도 구양우경의 가학적인 행동과 무관하지 않은 듯 느껴졌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처참한 죽음을 내리리라!
구양우경은 북궁천의 눈빛에서 서릿발 같은 살기가 느껴지자 악을 쓰며 채찍을 휘둘렀다.
“오지 마!”
북궁천은 날아드는 채찍을 보지도 않고 두 손을 쫙 펼쳤다.
그를 향해 날아들던 채찍이 허공으로 튕기고, 거대한 수영이 구양우경을 덮쳤다.
북천의 주인 중 완성한 자가 없고, 북궁천조차 팔성밖에 이루지 못한 건곤패력장(乾坤覇力掌)이 펼쳐진 것이다.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가공할 압력!
온몸이 쥐어짜지는 듯했다.
구양우경의 공포로 물든 눈이 거세게 떨렸다.
이러다 몸이 터지는 것 아닐까?
난생처음 느껴 보는 공포. 머릿속이 하얗게 비며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구양우경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되자 더듬거리며 삶을 구걸했다.
“사, 살려 줘!”
그 직후!
쾅! 콰광!
석실을 무너뜨릴 것 같은 굉음이 연속적으로 울렸다.
“끄아악!”
구양우경이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석벽에 반쯤 박혔다.
북궁천은 싸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본 후 몸을 돌렸다.
벌거벗은 소동동이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등과 가슴에 보이는 선명한 비늘무늬 혈선(血線).
구양우경이 휘두른 채찍에 두어 대 맞은 듯했다.
북궁천은 입을 꾹 닫은 채, 그녀의 손을 묶고 있는 가죽끈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한쪽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그녀의 옷을 들어서 몸을 가려 주고는, 구양우경이 벗어 놓은 장포로 그녀의 몸을 감쌌다.
“이제 괜찮다. 걱정 마라.”
소동동은 느닷없이 나타나서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요 며칠 사이 자신의 잃어버린 꿈을 되찾아 준 사람인 것을 알고 울음을 터트렸다.
북궁천은 사시나무처럼 떨며 우는 그녀를 바라보고 마음이 착잡해졌다.
지하에 있는 걸 몰라서 조금 늦었다. 적시에 왔다면 몸에 상처도 남지 않았을 것이거늘.
‘너에게는 정말 미안하구나.’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긴 했지만, 그녀가 받았을 충격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릿했다.
그 때 벽에 박힌 구양우경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털썩.
“끄어어어어.”
고개를 돌린 북궁천은 냉막한 눈길로 구양우경을 응시했다.
구양우경의 두 다리는 무릎이 완전히 으깨진 채 괴이한 형태로 꺾어져 있었다.
두 팔은 큰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어깨 부위의 힘줄이 갈기갈기 찢어져서 실질적으로는 젓가락 들 힘도 쓸 수 없었다.
더구나 가공할 충격을 받은 기해혈은 두 번 다시 공력을 담을 수 없게 된 상태였다.
무공을 쓸 수 없는 앉은뱅이.
그게 현재의 구양우경인 것이다.
그나마도 죽이지 않은 것은,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때 조관수가 유원당, 예극생과 함께 지하로 내려왔다.
“어떻게 되었…….”
조관수가 입을 열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물어볼 것도 없었다. 벌거벗은 몸통으로 벌레처럼 바닥을 기는 구양우경이 보였다.
공포에 질린 표정. 눈동자는 초점이 없고, 신음을 흘릴 때마다 걸쭉한 침이 피와 섞여서 질질 흘러나오고 있었다.
“으으으으, 으어어어…….”
그 모습을 본 조관수는 얼이 반쯤 빠졌다.
“맙소사.”
구양우경이 죽을죄를 진 것은 분명한데, 문제는 그가 삼성궁의 후계자인 소궁주라는 점이었다.
‘구양 궁주가 저 모습을 보면 난리 나겠군.’
그 때 유원당이 한쪽에서 두어 가지 물건을 집어 들었다.
날카로운 돌기가 수십 개나 튀어나와 있는 한 자 길이의 막대와 날카롭게 벼려진 날이 톱니처럼 삐죽삐죽한 작은 비수, 그리고 녹색의 작은 옥병이었다.
유원당은 그 물건의 용도를 짐작하고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는 딸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분노가 더욱더 컸다.
하지만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고 북궁천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