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6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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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2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62화
62화
호연유는 오 장을 날아간 뒤 천사교도들 사이에 내려서고 있었다.
그 바람에 그의 모습이 천사교도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혹시 저놈이 천사교의 소존?’
젊은 나이에 휘황한 도관을 쓴 걸로 봐서 그가 분명 소존인 듯했다.
‘양고명이 려려를 저놈에게 바치려 했단 말이지?’
죽일 놈들!
그를 공격하려면 사이에 있는 천사교도들을 먼저 처리해야만 한다. 하지만 연합 세력의 무사들이 모두 후퇴하는 중이어서 그들 속으로 뛰어들기도 애매했다.
상대가 먼저 달려든다면 또 몰라도.
그런데 자신의 뇌정무적세에 제법 큰 충격을 받은 듯 그자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우 같은 놈이 눈치 하나는 빠르군.’
자존심을 접고 몸을 사린다는 것은 한 수의 대결만으로 자신의 실력을 눈치챘다는 말. 무공만 강한 것이 아니라 머리 회전도 빠른 놈이다.
그때 황보청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형!”
고개를 돌리자 무림맹 무사들이 나오는 게 보였다. 피로 범벅된 황보청과 종리기진이 그들 속에 섞여 있었다.
두 사람은 천장처럼 서 있는 북궁천을 보고 눈물이 나올 만큼 반가웠다.
하지만 일단은 악착같이 달려드는 천사교도를 먼저 상대해야 했다.
북궁천은 호연유가 있는 곳을 한 번 더 쳐다보고는, 황보청과 종리기진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당장은 소존을 잡는 것보다 그들을 구하는 게 먼저였다.
* * *
산채를 빠져나온 연합 세력 무사들은 곧장 산을 내려가 삼십 리를 달렸다.
걸음을 멈추기 전까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흘러나오는 소리는 부상자의 신음뿐.
그렇게 삼십 리를 달렸을 즈음, 천사교도가 추적해 오지 않는다는 확신이 든 후에야 걸음을 멈췄다.
석양이 지고 어스름이 밀려드는 시간.
사람들의 표정은 검게 물들어 가는 하늘보다도 더 어두웠다.
산채에 들어갈 때만 해도 일천이었던 인원이 반도 안 되게 줄어든 상태. 그나마도 그중 절반 이상이 부상자들이다.
제대로 적과 싸울 수 있는 인원은 기껏해야 이백.
참담한 패배에 연합 세력 수뇌부들은 말을 잊었다.
몸이 성한 무사들이 땔감을 구해 와 모닥불을 피웠다.
한밤의 겨울 추위는 뼛속이 시릴 정도로 매서웠다. 성한 사람들이야 운기를 하며 견딜 수 있다지만, 부상자들은 부상이 아닌 추위 때문에 얼어 죽을 판이었다.
그러니 불빛이 천사교를 끌어들일지 몰라도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놈들이 마음먹고 추적해 온다면 모닥불이 있으나 없으나 매한가지. 추위로 손발이 굳어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모닥불에 몸을 녹이고 놈들을 맞이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계곡에서 당한 것은 빠져나갈 곳이 없었기 때문. 이곳처럼 넓은 곳이라면 그들의 숫자가 많다 해도 충분히 싸워 볼 만했다.
“빨리 부상자들을 치료해!”
“거기! 천 좀 가져와!”
모두가 타오르는 모닥불 주위에서 휴식을 취할 동안 회룡당 무사들은 바삐 오가며 부상자를 치료했다.
부상자가 너무 많아서 그들이 지닌 천과 약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반 시진 정도 지났을 때였다.
갑자기 위효릉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머리를 풀어헤치고 무릎을 꿇었다.
“동도 여러분! 오늘의 패배는 모두 과욕을 부린 내 잘못이오. 나를 벌해 주시오!”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하아, 그게 어찌 군사만의 잘못이란 말이오? 일어나시구려.”
백리진이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위효릉은 고개를 푹 숙이고 참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외다. 서두르지 않고 철저히 정보를 얻어 가면서 싸웠다면 어찌 이런 상황이 되었겠소? 욕심을 부린 내 잘못이 맞소이다!”
그가 연신 자신의 잘못임을 강조하자, 공한대사가 불호를 외며 합장했다.
“아미타불. 군사, 그리 말씀하시면 군사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우리의 잘못도 크외다. 군사의 마음을 알았으니 그만 일어나시오.”
“대사, 저의 한 번 잘못으로 오백이 넘는 동도들이 죽었습니다. 참으로 면목이 없습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위효릉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때 등조립이 말했다.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장수가 없듯이, 한 번도 실수를 하지 않는 군사가 어디 있겠소? 더구나 모두들 이전의 완벽한 승리에 도취되어서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았고, 적이 그토록 지독한 계책을 펼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소. 그러니 어찌 오늘의 패배가 군사만의 잘못이라 할 수 있겠소? 안 그렇소?”
그는 교묘한 언변으로 위효릉의 실수를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처럼 말했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잘못을 모두의 책임으로 돌렸다.
이미 백리진과 공한 대사가 비슷하게 말을 한 터라 반박하기도 애매해진 사람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공강후가 굳은 표정으로 한마디 하며 나섰다.
“군사의 계획에 무리가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각 파의 수뇌부들도 너무 안이했지요. 하지만 이제와 잘잘못을 따진다고 해서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놈들을 어떻게 물리칠 것인지 그것에 대해서 고민해 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내심 위효릉에게 책임이 크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말을 못하고 있던 사람들은 사공강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소이다. 지난 일을 따지는 것보다 앞으로가 더 중요한 일이지요.”
“맞소이다. 사공 공자의 말대로 놈들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머리를 맞대 봅시다.”
등조립은 사공강후를 슬쩍 쳐다보고는 그들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요. 위 군사. 그만 일어나시고, 힘내서 좋은 의견을 내 보도록 하시구려.”
위효릉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일어나며 주위를 향해 공수의 예를 취했다.
“알겠습니다, 등 대협. 동도 여러분, 오늘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한편, 수뇌부들이 기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던 그 시각.
북궁천은 구석진 곳에 모닥불을 피우고 태극문 제자들과 함께 황보청, 종리기진을 치료했다.
황보청과 종리기진의 부상은 다행히 자잘한 외상이 전부였다. 하기에 황보청은 치료를 받는 와중에도 입을 쉬지 않았다.
“후우, 대형이 아니었으면 정말 죽을 뻔했습니다. 아아! 이 형, 거기는 살살 좀 매쇼.”
이정한은 그가 말을 많이 할 때마다 상처를 슬쩍슬쩍 건드렸다.
북궁천은 피식 웃을 뿐, 그가 자신을 대형이라 불러도 막지 않았다.
이제는 더 모른 척할 필요도 없었다.
계곡 입구에서의 싸움으로 수많은 사람이 그를 알게 된 터였다.
단순한 회룡당의 무사가 아닌, 단신으로 천사교도 오십여 명을 쓰러뜨리고 탈출로를 만든 사람으로 말이다.
그러니 황보청이 그를 대형이라 부른다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왜 그런 고수가 회룡당의 말단 무사로 있는지 그 점은 궁금하겠지만.
그렇게 북궁천과 태극문 제자들이 황보청과 종리기진을 치료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관호명이 그곳으로 다가왔다.
북궁천은 굳이 외면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고.
어차피 빚을 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이니까.
그를 뚫어지게 주시하며 걸어온 관호명은 일 장가량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자네, 나를 만난 적 있지?”
북궁천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관호명이 우뚝 서서 그리 말하자 긴장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원하는 것은 얻으셨소?”
북궁천은 그 어떤 말보다 확실하게 대답했다.
역시 그때 그 청년이다.
관호명은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는 걸 알고 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얻었네.”
“다행이오.”
“그런데 자네가 가져간 것은 어떤 것이었나? 내 생각으로는 그것도 보통 물건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알처럼 생겼는데, 향기가 좋았소.”
“지금도 있나?”
“애석하게도 지금은 없소. 오래전에 내 뱃속으로 들어갔소.”
왠지 몰라도 관호명의 눈빛이 흔들렸다.
“뭔지 알아보았나?”
“그럴 시간도 없었소.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아쉽군.”
정말 아쉬워하는 표정이다. 단순히 욕심 때문에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북궁천은 정체불명의 알에 대에 대해서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떠날 때 귀하가 한 말 기억하시오?”
관호명은 입을 꾹 닫고 북궁천을 바라보았다.
“중원에 올 일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라! 오늘 못 다한 승부는 그때 가리도록 하지!”
그렇게 말했다.
지금 다시 싸운다 해도 질 마음은 없었다. 이길 수 있다는 보장 역시 없지만.
“언제든 생각이 있으면 말하게. 다만 지금은 조금 어려울 것 같군.”
“나도 지금 당장 빚을 받을 생각은 없소. 때가 되면 말하지요.”
“그나마 다행이군.”
묘한 분위기가 한동안 지속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러다 두 사람이 말문을 닫고서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자,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렇게 열을 셀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숙부님, 여기서 뭐 하십니까?”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사공강후가 그곳으로 걸어왔다.
그제야 사람들은 겨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지만 사공강후마저 합류하자 이번에는 어깨가 무겁게 느껴졌다.
관호명도 눈싸움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서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지나간 이야기를 하고 있었네.”
사공강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나간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아는 사이라는 말 아닌가 말이다.
“전부터 단 형을 알고 계셨습니까?”
“내가 언젠가 이야기했지? 태행산에 갔다가 대단한 친구를 만났다고 말이야.”
“아! 그럼 단 형이 바로…….”
“맞아, 바로 그 친구지.”
“어쩐지 굉장한 실력을 지녔다 했더니, 숙부님을 곤란하게 만든 장본인이었군요.”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네. 그러고 보면 세상이 참 좁은 것 같아.”
사공강후는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북궁천을 바라보며 포권을 취했다.
“단 형에 대해선 숙부님께 말씀 많이 들었소.”
“그다지 좋은 말은 아니었을 것 같소만.”
“무슨 말씀을. 곧 제 자존심을 무너뜨릴 사람이 나타날지 모르니 저더러 단단히 각오하라고 하더구려. 그런데 이렇게 정말로 나타났으니 기대가 무척 크오.”
사공강후는 그렇게 말하면서 북궁천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강렬한 승부욕이 불타는 눈빛.
북궁천은 사공강후의 마음을 읽고 담담히 말했다.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이미 단 형의 능력을 봤으니 실망할 일은 없을 것 같소. 해서 하는 말인데, 이번에 우리 선의의 경쟁을 해보는 게 어떻겠소?”
“선의의 경쟁?”
“천사교를 놓고 경쟁해 보자는 말이오.”
“지나친 경쟁은 역효과만 가져오는 법이오.”
“사공 모가 비록 나이는 어리나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 정도로 무모하진 않소.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역시 생각이 바른 자다. 구양우경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
“그런 마음이라면 나도 좋소. 단, 내가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지는 나 자신도 모르오. 그러니 있을 때까지만 하는 게 좋겠소. 물론 질 것 같다고 도망가는 경우는 없을 거요.”
“좋소. 그럼 그렇게 하지요.”
사공강후는 강한 눈빛을 번뜩이면서 입가에 잔잔한 웃음을 지었다.
북궁천도 오랜만에 헌원려려에게 얽매인 기분에서 벗어나 마음이 가벼워졌다.
“열심히 해야 할 거요. 나를 이긴다는 게 사공 형이 생각한 것보다 더 힘들 테니까.”
“벌써부터 걱정이 되는군요. 하지만 단 형도 나를 쉽게 이기진 못할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