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9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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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17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98화
98화
“용천보에서 훔친 흑옥불상을 내놓으시오. 그것만 내놓는다면 훔친 일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겠소.”
육대기가 눈을 깜박이며 머뭇거렸다.
북궁천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촌각이 아까운 상황이오. 당신을 죽이고 가져갈 수 있지만 내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 있어서 참고 있다는 것만 알아 두시오.”
육대기가 힐끔 당곡을 바라보았다. 북궁천이 애걸하는 만큼 당곡의 말 한마디면 해결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당곡이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 일은 자네가 알아서 해.”
“당 형, 그래도 우린 친구 아니오? 어떻게 말 좀…….”
“난 도둑을 친구로 둔 적 없네. 하지만 도둑질한 물건을 돌려주면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친구와 흑옥불상.
거절하면 둘 다 잃는다. 하나를 주면 하나를 지킬 수 있고.
육대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미적거리며 품속에서 상자를 꺼낸 그는 북궁천에게 내밀었다.
‘제길, 전생에 무슨 웬수를 져서 두 번이나…….’
북궁천은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상자 안에는 세 개의 흑옥불상이 나란히 들어 있었다.
그런데 내용물을 확인하고 상자를 닫으려던 그가 멈칫했다.
전에 봤던 흑옥불상과 왠지 다르게 느껴졌다.
깨끗하게 닦았는지 흙 한 점 묻어 있지 않았는데, 단순히 겉이 깨끗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흑옥불상에는 눈에 보일 듯 말 듯 가느다란 선이 그어져 있었다.
얼핏 보면 흙이나 돌에 긁혀서 난 흔적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긁힌 흔적은 일정한 깊이를 이룰 수 없는데도 흑옥불상에 그어진 선은 그 깊이가 일정했다. 끊임도 없었고.
그는 고개를 돌려 육대기를 바라보았다.
“이 불상이 어떤 물건인지 알고 있소?”
그가 그렇게 물은 것은, 육대기가 값나가는 물건은 놔둔 채 불상만 훔쳤기 때문이다.
육대기는 고개를 저었다.
북궁천은 그게 더 이상했다.
“그런데 왜 훔친 거요?”
“귀도맹주 복화가 노린다고 해서…… 복화는 원래 골동품에 일가견이 있는 자요. 그런 자가 용천보와의 시비도 마다않고 뺏으려한 것이라면 보나마나 대단한 보물일 거라 생각했소. 솔직히 이런 것인 줄 알았으면 위험하게 용천보 안까지 들어가지도 않았을 거요.”
이해가 가는 말이어서 북궁천은 더 묻지 않았다. 당장 중요한 것은 흑옥불상이 아니라 헌원려려였다.
‘나중에 자세히 살펴봐야겠군.’
그런데 그는 흑옥불상에만 신경을 쓰는 바람에 방곡추의 눈빛을 보지 못했다.
그가 상자를 품속에 집어넣자, 기광을 번뜩이며 흑옥불상을 바라보고 있던 방곡추가 몸을 돌렸다.
“몇 가지 가져갈 게 있으니 잠깐만 기다려라.”
통나무집의 뒤쪽은 동굴과 연결되어 있었다. 통나무집이 동굴의 앞을 막고 있는 것이다.
방곡추가 의술을 연구하는 밀실은 바로 그 동굴 안에 있었다.
북궁천은 방곡추가 그 안으로 들어가자 육대기에게 하나 더 물어보았다.
“나에게 줬던 상자에 붉은 알이 들어 있던데, 무슨 알이오?”
“그건 당 형에게 물어보시오. 그가 준 것이니까.”
그랬다. 그것의 주인은 본래 육대기가 아닌 방곡추였다.
육대기가 영물의 쓸개를 주고 대가로 받은 것.
당시 그가 호숫가에서 그것을 북궁천에게 던진 것도 안에 든 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깨진다고 소리친 것도 안에 든 것이 연약하게 보이는 알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고.
많은 영물을 접한 그조차 뭔지 모를 알이었지만.
그래도 북궁천은 최소한 한 가지 사실은 알게 되었다.
자신이 복용한 알이 화령금각사의 내단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래도 그 알 덕분에 내상이 빨리 회복되었고 공력도 늘었으니 아쉬울 것은 없었다.
방곡추가 밀실에서 보따리를 하나 들고 나온 것은 일각이 지날 즈음이었다.
“가지.”
짧게 출발을 알린 그는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처럼 눈빛을 일렁이며 걸음을 옮겼다.
육대기는 그가 북궁천을 데리고 빨리 사라졌으면 하는 표정으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잘 다녀오시오, 당 형. 다녀올 동안 이곳은 내가 지킬 테니 걱정 마시고.”
방곡추가 걸음을 멈추더니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도 따라와. 도와줘야 할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제가 뭘 안다고 도와줍니까? 저는 차라리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게…….”
“며칠 사이에 단 형과 양가가 곽산에서 돌아올 테니 이곳은 그에게 맡기면 돼.”
“아무리 그래도…….”
그 때 무심한 한마디가 육대기의 목덜미를 잡았다.
“따라오시오.”
움찔한 육대기는 북궁천을 힐끔 쳐다보고는 목을 자라처럼 집어넣었다.
“예? 예. 공자께서 필요하시다면야…….”
* * *
석양이 질 무렵. 북궁천은 방곡추와 육대기를 대동하고 운봉사에 도착했다.
북궁천이 방곡추를 찾아왔다는 말에 사람들이 우르르 나왔다.
“어? 저놈은?”
염구악이 육대기를 아는지 눈을 크게 떴다.
육대기는 그를 보고 간이 툭 떨어졌다.
‘헉! 저 늙은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는 팔 년 전에 염구악에게 약간의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만은 아니었기에 머쓱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염 대협.”
“평안? 그래, 잘 지냈지. 그때 네가 준 것 먹고 사흘 고생한 것만 제외하면 말이야.”
“그거야 그때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냥 복용하시면 안 된다고요.”
“그냥 복용해도 큰 탈은 없을 거라고 한 것도 너였지.”
“그래도 사흘 고생하고 병이 나으셨으면 다행 아닙니까요?”
“병이 나았으니 망정이지, 안 나았으면 네놈 다리몽둥이 부러뜨리려고 찾아 나섰을 거다. 내 돈 백 냥도 찾을 겸.”
육대기는 머리를 쑥 집어넣고 급히 북궁천을 따라갔다. 이제 기댈 언덕은 북궁천밖에 없었다.
이리저리 따져 보니 북궁천이 더 강할 것처럼 생각된 것이다.
그런데 방곡추와 함께 방으로 들어가던 북궁천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다른 분들은 들어오지 마십시오. 육대기, 당신도 이곳에 남고.”
“당 형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필요하면 부르도록 하겠소. 멀리 가지 마시오.”
“안에 들어가서 조용히 한쪽에 앉아 있으며 안 되겠소?”
밖에서 소란스런 일을 벌이는 것보다 그게 나을 것 같다. 언제 필요할지도 모르고.
북궁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대신 조용히 있어야 하오.”
육대기는 사면령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밝아진 표정으로 북궁천의 뒤를 바짝 따라갔다.
방곡추는 헌원려려의 몸을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황유가 진맥하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눈을 지그시 감고 헌원려려의 목 뒤를 손으로 눌러보던 그는 자신이 가져온 보따리에서 송곳처럼 뾰족한 칼을 하나 꺼냈다.
북궁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걸로 뭘 하려는 걸까?
그런데 방곡추가 그 칼을 한쪽에 내려놓더니 이번에는 은갑에서 기다란 장침을 하나 꺼냈다.
침의 길이만 무려 일곱 치나 되는 장침이었다.
칼을 내려놓은 것에 안심한 북궁천이 멈칫한 사이, 방곡추는 그 침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헌원려려의 뒷목에 꽂았다.
푹!
북궁천은 그 침이 자신의 심장에 꽂힌 사람처럼 숨을 멈추고 석상처럼 굳었다.
방곡추는 북궁천이 놀라든 말든 깊숙이 꽂은 침 끝을 잡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침을 뺀 그가 태연히 말했다.
“머리를 가르진 않아도 될 것 같군.”
그 말에 북궁천의 심장이 진짜로 멈출 뻔했다.
방곡추는 북궁천의 반응에 일절 신경 쓰지 않고 보따리를 완전히 풀었다.
“일단 약물로 치료해 보도록 하지. 뇌에 충격을 조금씩 주면서 뭉쳐 있는 죽은피를 빼내는 게 급선무겠어.”
북궁천이 자신도 모르게 급히 물었다.
“죽은피를 어떻게 빼낼 거요?”
방곡추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투로 대답했다.
“어떻게 빼내긴? 구멍을 뚫어야지.”
헉!
설마 머리에 구멍을?
북궁천은 인내심을 극한까지 발휘해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물었다.
“죽은피만 빼내면 정신을 차릴 수 있소?”
“사부께서도 치료하지 못한 환자야. 죽은 거나 다름없는 사람을 살리는 게 그렇게 간단할 것 같아?”
“그럼?”
“죽은피를 빼내는 건 시작일 뿐이다. 정작 중요한 미세혈맥을 타통시키지 못하면 그간의 노력이 공염불로 돌아갈 것이다.”
“저것이 려려에게 쓸 약재요? 어떤 약재들이오?”
불안해진 북궁천이 눈짓으로 약재를 가리키며 물었다.
방곡추는 보따리에서 꺼낸 약재를 보며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모두 구하기가 쉽지 않은 약재들이다. 영약이라 할 만한 것도 있고 독초라 할 만한 것도 있지.”
“독초? 려려에게 독을 복용시킨단 말이오?”
방곡추가 북궁천을 바라보았다.
“단순한 독초가 아니라 한 냥으로 소 백 마리를 죽일 수 있는 극독이다. 싫다면 여기서 멈추지. 귀한 약재 써 가면서 원하지 않는 치료하기는 나도 싫으니까.”
북궁천의 눈빛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방곡추에게 치료를 맡긴 것은 마지막 희망이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극독을 복용시키자니 망설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방곡추의 흔들림 없는 눈을 본 그는 이를 지그시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귀하에게 모든 걸 맡기겠소.”
“정말인가?”
“일구이언할 사람은 아니니 걱정 마시오.”
“좋아, 그럼 내가 알아서 하지. 그런데 좀 나가 주었으면 좋겠군. 귀찮게 해서 집중을 할 수가 없으니까.”
부릅뜬 눈에서 광기처럼 새파란 안광이 번뜩인다.
표정을 봐서는 나가라고 빽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데 참고 있는 것 같다.
북궁천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기서 조용히 보면 안 되겠소?”
“여자를 치료할 때 제일 방해되는 사람이 누군지 아나? 바로 남편과 가족들이야. 그러니 이 여자를 살리고 싶으면 나가 있어.”
“지금부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소.”
방곡추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정말인가?”
북궁천은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방곡추가 고개를 돌리고 보따리에서 약재를 마저 꺼냈다.
“큭.”
육대기가 참지 못하고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북궁천이 홱 고개를 돌리고 노려보자, 머리를 푹 숙이고 바닥만 바라보았다.
그 때 방곡추가 고개를 돌리더니 육대기에게 말했다.
“자네. 내가 전에 준 화혈조(火血鳥)의 알, 아직 가지고 있나?”
슬쩍 고개를 든 육대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반문했다.
“화혈조의 알이라니요? 당 형도 참, 제가 무슨 복이 있어서 그런 것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뭔 소리야? 자네가 나에게 쌍두백사의 쓸개를 줬을 때 내가 줬잖아? 없어?”
눈을 두어 번 껌벅이던 육대기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그, 그게 화혈조의 알이었단 말입니까?”
“그것도 몰랐나? 있어, 없어?”
육대기가 홱 고개를 돌려 북궁천을 쳐다보았다.
화령금각사의 내단보다 훨씬 귀한 것이 화혈조, 일명 천년화혈조의 알이다.
그렇게 귀한 것을 던져 주다니!
알았다면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주었겠는가?
“고, 공자가 아직도 가지고 있소?”
북궁천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지금은 없소.”
“그, 그럼 어디 있소?”
“내가 복용했소.”
그 말에 방곡추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