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9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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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7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97화
97화
침매곡은 정과사에서 능선을 타고 십 리 정도 동쪽으로 간 다음 남쪽으로 다시 이십여 리 정도 가야 한다고 했다.
그쯤가면 층층이 노적(露積)처럼 바위가 쌓인 거대한 바위산이 나오고, 그 아래에 어둡고 깊은 계곡이 있다고 했다.
북궁천은 험한 바위산을 평지 달리듯이 달렸다.
십여 장 간격으로 있는 바위를 징검다리 삼아 얼마를 나아가자 바위산이 저만치 보였다.
그 아래쪽은 대낮인데도 그늘이 져서 검게 보일 정도로 깊은 계곡이었다.
대경에게 들은 것과 동일한 지형.
그는 깎아지른 것처럼 경사가 심한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이백여 장을 한순간에 내려간 북궁천은 바닥을 이십 장 남겨 놓고 십여 평 넓이의 단애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공력을 집중해서 아래쪽을 살펴보았다.
그늘진 계곡 안은 음습함마저 느껴졌다.
계곡이 워낙 깊고 양쪽이 깎아지른 절벽 같아서 한여름이라 해도 햇살이 비치는 시간은 한두 시진에 불과할 듯했다.
그는 사람이 살 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계곡 깊은 곳에 약간의 공터 같은 곳이 보였다.
그나마 높은 곳에서 보지 않았다면 찾을 수 없을 만큼 은밀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주위의 지형으로 봐서는 사람이 산다면 그곳이 가장 유력했다.
북궁천은 그곳을 목적지로 정하고 단애에서 뛰어내렸다.
길쭉한 지형의 공터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나무를 잘라 내면서 생긴 공터였다.
예상대로 그 괴인이라는 자가 근처에 사는 듯했다.
북궁천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얼마 가지 않아서 저만치 통나무로 지은 집이 보였다. 통나무집 바로 앞에 세워진 기둥에는 가죽이 서너 장 걸려 있고, 한쪽에는 화덕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는 가죽이 걸린 기둥을 지나 통나무집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문에는 팔뚝 굵기의 통나무 빗장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 안에 대고 주인을 불러 보았다.
“계십니까?”
다섯을 셀 시간을 기다려 봤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빗장을 풀고 문을 열었다.
통나무집 안은 제법 넓었다.
현재도 사람이 생활하는 듯 식기와 식량이 한쪽에 정돈되어 있었고, 더 안쪽에는 제법 공들여 만든 것처럼 보이는 탁자와 의자와 침상이 놓여 있었다.
안을 살펴보던 북궁천의 두 눈에 실망감이 떠올랐다.
어디에도 의원이라 할 만한 물건들이 보이지 않았다.
정말 단순한 사냥꾼일까?
그 때 누군가가 빠르게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가벼운 발걸음, 거친 산길을 빠르게 달린다.
만약 그가 이 통나무집의 주인이라면 평범한 사냥꾼은 아니었다.
북궁천은 천천히 돌아서서 문 쪽을 바라보았다.
다가오던 자가 문에서 이 장 떨어진 곳에 멈추더니 냉랭히 소리쳤다.
“꼼짝 말고 그 자리에 서 있어!”
그의 손에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이 들려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손을 전혀 대지 않은 듯 제멋대로 자란 거친 수염. 가죽으로 만든 옷을 걸친 중년인은 기괴하게 느껴질 정도의 한광을 번뜩이며 북궁천을 노려보았다.
“귀하가 이 집의 주인이오?”
북궁천이 그를 빤히 바라보며 담담히 물었다.
“질문은 내가 한다. 입 다물고 무릎을 꿇어라!”
“과한 요구를 하는군.”
“흥, 죽고 싶으냐!”
“나는 죽고 싶지도 않고, 아직 죽어선 안 되오.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으니까.”
“입은 번지르르한 놈이군. 어디 몸에 구멍이 뚫리고도 그렇게 입을 놀릴 수 있는지 보자.”
가죽옷을 걸친 중년인은 냉랭히 말하며 활시위를 한계까지 당겼다.
그 때였다.
공터의 저 아래쪽에서 누군가가 달려오며 소리쳤다.
“당 형, 도둑놈이 들었수? 잠깐만 기다리쇼. 내가 먼저 버릇을 고쳐 놓을 테니까.”
가죽을 걸친 중년인이 멈칫했다.
그사이 중년인의 바로 옆까지 다가온 자가 손에 들린 봉을 움켜쥐고 통나무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떤 도둑놈의 새끼가 이런 곳에 뭐 훔칠 것이 있다고……!”
하지만 기세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가던 그는 등에 화살을 맞은 것처럼 우뚝 멈춰 섰다.
북궁천이 석상처럼 굳은 그를 향해 말했다.
“오랜만이오.”
“…….”
“육대기, 당신이 아직까지 면산에 있을 줄은 몰랐군.”
육대기는 주춤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북궁천이 슬쩍 고갯짓을 하며 경고했다.
“아아, 뒤에서 활을 겨누고 있는 사람이 실수할지 모르니 움직이지 마시오.”
그제야 뒤에 있는 사람이 떠오른 듯 육대기가 급히 고개를 돌리고 소리쳤다.
“당 형, 활을 내려요!”
순간이었다.
가죽을 걸친 중년인이 활시위에서 손가락을 떼었다.
쐐액!
화살은 육대기의 코앞을 스쳐서 북궁천의 얼굴로 날아갔다.
기껏해야 삼 장의 거리. 더구나 육대기로 인해 가려져 있던 터다.
섬전처럼 날아간 화살은 금방이라도 북궁천의 얼굴을 뚫을 것 같았다.
하지만 화살은 북궁천의 얼굴을 세 치 남겨 놓고 거짓말처럼 허공에서 멈췄다.
북궁천이 손으로 잡아챈 것이다.
“봐주는 건 한 번뿐이오.”
북궁천은 무심한 목소리로 경고를 하고 화살을 한쪽에 던졌다.
가죽옷을 걸친 중년인은 그사이에 화살을 하나 더 활시위에 걸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육대기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당 형, 활을 거두라니까요!”
“왜 그런가?”
“글쎄, 거두어요. 이 공자는 그런 활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자네가 아는 사람인가?”
안다. 아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두 가지는 안다.
마음만 먹으면 자신과 당곡쯤은 단숨에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자신도 잘 모르는 기물 하나를 날로 먹은 놈이라는 걸.
북궁천은 가죽을 걸친 중년인을 육대기가 ‘당 형’이라 부르자 또 한 번 실망했다.
그래도 혹시나 했거늘.
“저분이 이곳의 주인이오?”
북궁천의 질문에 육대기는 괴이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잘됐군. 안으로 들어오시오. 물어볼 것이 있으니까.”
북궁천은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두 사람을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었지만 육대기는 고분고분 그의 말을 따랐다.
소소신마의 얼굴을 뭉갠 사람이다. 구중마도를 패대기치고, 금황신군과 막상막하의 대결을 벌인 자.
따르는 게 상책이었다.
가죽을 걸친 중년인, 당곡도 활시위를 느슨하게 늦추고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눈에선 여전히 한광이 번들거렸다.
“공자께선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수?”
육대기가 먼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볼일이 있어서 왔소. 그런데 한 가지 일을 더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오.”
“예?”
“그래도 우선 급한 것부터 처리해야겠소.”
북궁천은 흑옥불상에 대한 것은 일단 뒤로 미루고 당곡에게 물었다.
“면산에서 산 지 얼마나 되셨소?”
“그걸 왜 묻는 거지?”
“알아볼 것이 있어서 묻는 거요. 십 년 넘었소?”
“넘었다.”
“그럼 혹시 방곡추라는 이름을 들어 보았소?”
당곡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북궁천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다 눈빛을 파랗게 빛내면서 물었다.
“그 이름을 왜 묻는 것이냐?”
“아시오?”
“안다면?”
북궁천의 눈빛이 잘게 떨렸다.
당사자를 직접 만나진 못했지만 그를 아는 자를 만났다. 그것만 해도 이곳까지 온 보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사는 곳을 알려 주시오. 부탁이오.”
“왜 알려고 하는 거지?”
“환자가 있소. 그 사람이라면 깨어나게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해서 찾고 있는 거요.”
“환자를 치료하려면 백의곡으로 가라. 천하제일의 신의가 있는 그곳을 놔두고 왜 그를 찾는 것이냐?”
“그곳에도 가 봤소. 하지만 신의조차 어떻게 하지 못했소. 그리고 신의께서 방곡추라는 사람을 말해 주었소. 그 사람이라면 가능할지 모르겠다면서 말이오.”
순간, 당곡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게…… 정말이냐?”
“물론이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방곡추라는 이름을 알고 여기까지 왔겠소?”
“정말, 정말 백미신의께서 당신도 깨어나지 못하게 한 사람을 방곡추라면 깨어나게 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했단 말이지?”
“사실이오.”
북궁천은 당곡을 빤히 쳐다보며 대답했다.
반응이 기이했다. 눈은 광기 들린 사람처럼 번들거리고 몸도, 목소리도 가늘게 떨렸다.
“환자가 어떤 상태이기에 백미신의조차 고치지 못했단 말이냐?”
북궁천은 말이 길어지는 게 마음에 안 들었지만, 당곡의 반응이 이상해서 헌원려려의 상태를 순순히 설명했다.
“……그 후부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소.”
“그 환자는 어디 있느냐?”
“운봉사에 있소. 시간이 없으니 이제 당신도 나에게 방곡추가 있는 곳을 알려 주시오. 그는 어디에 있소?”
답답해진 북궁천이 당곡에게 다그치듯이 물었다.
당곡이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답했다.
“내가 방곡추다.”
방곡추는 세월이 흘러서야 사부에게 큰 죄를 지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을 구해 주고 가르쳐 준 사부의 뜻을 저버리고 말도 없이 떠나 버렸으니 얼마나 상심했을 것인가.
하지만 돌아갈 순 없었다.
어차피 그리된 것,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사부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죄스러운 마음에 이름을 바꾼 그는 침매곡에 머물며 자신이 꿈꿔 왔던 의술에 더욱더 매진했다.
침매곡은 사람이 발길이 닿지 않을 만큼 험한 곳이었다. 바깥에선 보기 힘든 동물과 약초가 많았고 개중에는 극독을 품은 독물과 독초도 많았다.
자신의 의술을 연구하기에는 최적의 장소.
그는 일 년에 한두 번만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고 거의 모든 나날을 침매곡에서 보냈다.
그런데 사부를 뛰어넘는 의술을 완성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인지 세월이 흐르며 성격이 괴이하게 변해 갔다.
오 년 전, 육대기가 영물을 잡기 위해 침매곡에 들어갔을 때 방곡추의 그러한 성격은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육대기의 성격이 정상적이었다면 아마 그날 둘 중 한 사람은 죽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육대기 역시 괴이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방곡추의 성질이 괴팍하긴 해도 영물과 영약에 관한 지식이 자신 이상임을 알고 슬슬 꼬드겨 친구로 삼았다. 아끼고 아꼈던 영물의 쓸개 하나를 넘겨주고 말이다.
방곡추는 그 대가로 이상한 알 하나를 그에게 주었고.
그렇게 방곡추와 친구가 된 후 육대기는 일 년에 한 번씩 침매곡을 찾아왔다.
자신이 그간 구한 것에 대한 감정도 받고, 방곡추가 얻은 것도 구경할 겸.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북궁천을 만날 줄 알았다면 절대 찾아오지 않았겠지만!
‘씨발, 운 더럽게 없군.’
한편, 북궁천은 잠시 잠깐 멍한 기분이었다.
당곡이 방곡추라니. 그토록 찾으려 하던 사람이 눈앞에 있다니.
하지만 곧 그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그녀를 구해 주시오. 그녀만 구해 준다면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주겠소.”
방곡추 역시 헌원려려의 상태를 듣고 호기심이 생긴 터였다. 어쩌면 호승심일 수도 있고.
중원제일신의인 사부를, 정통 의술을 이기고자 하는 마음 말이다.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최선은 다해 보지.”
“고맙소.”
다시 한번 방곡추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 북궁천은 육대기를 향해 불쑥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