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9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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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1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96화
96화
아마도 환자들의 이동을 고려한 조치인 듯했다.
북궁천 일행은 마차를 몰고 바위와 소나무가 산수화처럼 어우러진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오 리쯤 들어가자 십여 채의 건물이 보였다.
건물 있는 곳까지 오십여 장 남았을 때 백의를 입은 무사들이 마차 앞을 막았다.
“어디서 오신 분들이십니까?”
“노부는 철군성의 염가라고 한다. 신의는 안에 계시느냐?”
철군성이란 말에 백의곡의 호위무사들의 머리가 반 자는 낮아졌다.
“계십니다. 한데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무슨 일은 무슨 일, 환자가 있어서 왔지. 급한 환자이니 신의께 안내해라.”
백색 의복을 입은 의원과 잡일을 하는 사람들이 건물과 건물을 오가고 있었다.
마차가 건물 앞 넓은 마당에 들어가 멈추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마차를 향했다.
북궁천이 마차 문을 열자 능소소가 헌원려려를 조심스럽게 안아서 건네주었다.
“따라오게.”
염구악이 앞장서고, 헌원려려를 안아 든 북궁천이 뒤따라갔다. 공손설은 북궁천 옆에 바짝 붙어서 종종걸음을 옮겼다.
염구악은 중앙의 이 층 건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약향이 코를 찔렀다.
“허허허, 어쩐 일이신가? 약 냄새가 싫다며 십 년이 넘도록 한 번도 들르지 않았던 자네가 이곳에 오다니.”
방 안 저 끝 쪽에 앉아 있던 눈썹이 하얀 노의원이 웃음으로 염구악을 반겼다. 그가 바로 백미신의 황유였다.
“킁, 환자가 있어서 왔소이다.”
염구악은 코를 킁킁거리며 인상을 쓰고는 북궁천을 돌아다보았다.
북궁천은 헌원려려를 안고서 황유 앞까지 다가갔다.
황유는 북궁천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정확히는 북궁천의 품속에 안긴 헌원려려를.
조심스럽게 헌원려려를 내려놓은 북궁천은 깊게 침잠된 눈으로 황유를 응시했다.
“뒷머리에 충격을 받고 정신을 잃은 지 나흘 되었습니다. 깨어나게만 해 주신다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황유는 헌원려려에게 시선을 주고 평소와 다름없이 말했다.
“너무 걱정 말게. 하늘이 억지로 데려가려 하지 않는 이상 사람 목숨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네.”
하지만 북궁천은 평소 그가 만났던 환자와는 많이 달랐다.
“하늘이 억지로 데려가려 해도 막아 주셔야 합니다.”
“허허허, 자넨 내가 대라신선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보군.”
“만에 하나 려려가 깨어나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간다면 세상이 피로 뒤덮일 겁니다.”
흠칫한 황유가 눈을 들었다.
“지금 이 늙은이를 위협하는 건가?”
“저도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기만 바랄 뿐입니다. 하지만 려려가 죽으면 미쳐 버린 저를 저 자신도 통제하지 못할 것이니 어쩌겠습니까?”
음울한 목소리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황유는 굳은 표정으로 염구악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이런 미친놈을 데려왔냐는 질책이 역력한 눈빛이다.
염구악이 황유의 마음을 눈치채고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게 될지 모르오, 신의. 그러니 최선을 다해 주시구려.”
염구악은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황유는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신중한 표정으로 헌원려려를 살펴보았다.
* * *
사흘 동안 황유가 매달렸음에도 헌원려려는 깨어나지 않았다.
물과 음식 대신 달인 약으로 기력을 보충해 주고 있지만 그녀의 몸은 며칠 사이 눈에 띄게 마른 상태였다.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북궁천이 절박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방법이 없겠습니까?”
황유도 곤혹스럽기만 했다.
“참으로 괴이하군. 머리에 가해진 충격 때문임은 분명한데 겉으로 드러난 곳은 모두 정상이네. 아무래도 뇌 내부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방법을 일러 주십시오, 신의.”
황유는 바로 대답을 못 했다.
중원제일신의라는 그조차 치료하지 못한 상황이다. 방법이 있다면 어찌 시도해 보지 않았겠는가?
문제는 헌원려려가 깨어나지 못하고 죽기라도 하면, 몸속에 분노의 화산을 담고 있는 저 청년이 광분할지 모른다는 점이다.
‘방법이 있을 것 같긴 한데…….’
그렇게 고민을 거듭한 지 일각가량 지났을 때였다.
입을 다문 채 한참 동안 헌원려려를 바라보던 노 의원의 주름진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맞아, 그놈이라면…….’
문득 오래전에 잊은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그가 지닌 괴이한 의술이라면 헌원려려의 특이한 증세를 고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러나 그와는 애증이 섞인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어서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때 북궁천이 황유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세상 저 끝까지 가야만 한다면 가겠습니다. 지옥불 속에 뛰어 들어야만 한다면 뛰어 들겠습니다. 려려를 깨울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뭔들 못 하겠습니까? 신의,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 낼 각오가 되어 있으니, 제발 깨울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대지를 울렸다.
방 안에 앉아서 초조하게 바라보던 모든 사람들의 눈빛이 거세게 떨렸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황유는 착잡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들었다.
“실패하더라도 원망하지 않겠나?”
“최소한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좋네, 자네의 마음이 정 그렇다면, 내 한 사람을 소개시켜 주겠네.”
* * *
백의곡을 나선 북궁천은 곧장 북쪽으로 길을 잡았다.
마차는 포기하기로 했다.
한시라도 빨리 면산에 도착해야 한다. 마차가 다닐 수 있는 길로만 가기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곡추는 면산에 산다네. 어디 사는지는 나도 정확히 모르네. 제자 중 하나가 약초를 캐러 갔다가 깊은 계곡에서 봤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십 년 전 이야기여서 지금도 그곳에 있는지는 알 수가 없네.”
방곡추. 그는 황유가 삼십 년 전에 거둔 제자였다.
자질이 워낙 뛰어나서 언젠가는 자신을 뛰어넘으리라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천재.
그는 기재들이 십 년 걸려 배울 것을 일 년 만에 마쳤고, 황유가 삼십 년 이상 익힌 의술을 단 칠 년 만에 따라잡았다.
그런데 이십여 년 전 어느 날, 먼지가 쌓인 채 서고 깊숙이 잠들어 있던 세 권의 의서를 본 후부터 조금씩 변해 갔다.
그 의서를 본 그는 사부 몰래 정상적인 치료법이 아닌 괴이한 치료법에 빠져들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눈치챈 황유는 그를 올바른 의술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모든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는 남들도 배워서 할 수 있는 치료법은 관심 없다면서, 천하에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치료법을 개발하겠다며 백의곡을 뛰쳐나갔다.
그게 십구 년 전이었다.
십 년 전에 봤다고 했으니 지금은 떠나고 없을지도 모른다.
아직까지 그가 있을 확률은 극히 적은 상황.
하지만 북궁천은 실망하지 않았다.
드넓은 면산을 모두 뒤져야 한다면 그렇게 할 작정이었다.
천하를 뒤엎어야 찾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헌원려려의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려려, 나는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고 버텨다오.’
북궁천은 헌원려려를 안은 손에 힘을 주며 자신의 간절한 마음이 그녀에게 전해지길 바랐다.
공손설은 그런 북궁천을 보며 가슴이 아렸다.
한편으로는 헌원려려가 부럽게 느껴졌다.
여인으로 태어나 저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여인이 얼마나 될 것인가.
‘내가 저런 상황이어도 오빠가 똑같이 생각해 줄까?’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북궁천은 그녀가 따라오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말렸다. 신경 써 줄 정신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공손설이 그의 말을 거부하고 따라나섰다. 면산을 뒤지려면 한 사람이라도 더 있어야 한다면서.
게다가 면산 최대 사찰인 운봉사는 철군성과 불가분의 관계. 공손설이 부탁하면 운봉사의 스님들이 모두 나서서 도와줄 거라고 했다.
그녀의 말이 옳다는 것을 북궁천도 모르지 않았다.
그녀가 따라나서면 염구악과 엽청문, 능소소도 따라나설 수밖에 없다.
적어도 자신과 아우들만 나서는 것보다는 나을 터. 고생할 것을 생각하면 그녀에게 미안하지만 당장은 방곡추를 찾는 일이 급했다.
백의곡을 출발한 지 이틀, 면산에 도착한 북궁천 일행은 곧장 운봉사까지 올라가 주지인 운몽 대사를 만났다.
“방곡추? 괴이한 의술을 익힌 사십 대의 중년 시주라…….”
운몽 대사는 공손설의 설명을 듣고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운봉사에서 오십 년을 살아온 그가 모른다면 찾는 것도 그만큼 힘들어질 터. 북궁천은 초조한 마음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도 답이 없자 공손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모르세요?”
운몽 대사는 불호를 외고는 고개를 저었다.
“나무아미타불, 빈승의 기억에는 그런 이름이 없구려. 괴이한 의원이 산다는 말도 들어 보지 못했고 말이오. 대경, 너는 아는 것이 없느냐?”
운몽 대사의 눈이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는 중년승을 향했다.
중년승 대경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방곡추라는 의원이 이 근처에 산다는 말은 저도 듣지 못했습니다.”
“불사를 책임진 네가 모른다면 다른 사람에게 물어도 소용이 없겠구나.”
“아마 그럴 것입니다. 이 근처 오십 리 이내에서 십 년 이상 살았다면 소승이 모를 리 없습니다.”
북궁천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면산 전체를 뒤져 봐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촌각이라도 서둘러야 했다.
그나마 방곡추가 오십 리 이내에 없다면 그만큼 찾아볼 곳이 줄어든 셈이니 전혀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잘 알았습니다. 하면 부탁 하나만 하지요. 그자를 찾을 동안 이 여인을 이곳에 맡길까 합니다. 방 하나만 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대경은 순순히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나무아미타불, 그거야 어려울 것 없으니 걱정 마시구려.”
북궁천은 한쪽에 눕혀 놓았던 헌원려려를 다시 안았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대경이 멈칫하더니 북궁천에게 말했다.
“아, 의원은 아니지만 조금 괴이한 자가 살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소. 그자라도 만나 보시겠소?”
썩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북궁천이었다.
“어떤 자입니까?”
“언젠가부터 남쪽 침매곡에 괴이한 사냥꾼이 살고 있다 하오. 일 년에 한두 번 사냥한 짐승의 가죽을 갖고 마을로 나오는데, 말도 횡설수설하고 눈에선 광기가 보인다 하더구려.”
말만 들어서는 방곡추와 많이 달랐다.
하지만 북궁천은 그를 만나 보기로 했다. 그자에 대한 기대보다는, 깊은 산중에 살고 있으니 방곡추에 대해서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가 더 컸다.
“침매곡은 어디에 있습니까?”
9장. 침매곡의 사람들
헌원려려를 방에 눕혀 놓은 북궁천은 방을 나섰다.
이정한 등이 방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궁천은 그들의 동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시가 아쉬운 상황, 혼자 가는 게 빨랐다.
“아우들은 이곳에 있어라. 아무래도 혼자 움직이는 것이 빠를 것 같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크게 소리쳐서 불러라.”
간단하게 몇 마디 남긴 그는 잔도를 타고 정과사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