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8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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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5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89화
89화
* * *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구양환은 탁자를 움켜쥐고 이를 악물었다.
평생 처음 겪은 수모에 치가 떨렸다.
가슴속에서 회오리치는 격렬한 분노!
얼굴이 시뻘게지고 머릿속이 후끈 달아오른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드득.
원목으로 된 탁자가 그의 손안에서 부서지며 가루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놈을 너무 얕봤어!’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어서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다가 뒤통수를 맞은 꼴이었다.
한편으로는 선우중이 더 괘씸했다. 그가 하루만 늦게 움직였다면 단화린이라는 놈을 처리하는 대신 아들이 죽었을 것이 아닌가.
‘일이 더 커지는 걸 막아야 돼!’
새파랗게 눈을 번뜩인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구양우경의 일은 단순히 구양우경을 벌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삼성궁의 차대 권력마저 넘어갈 판이다.
그나마도 상황이 이 상태에서 멈췄을 때의 이야기다. 만약 선우중이 충격적인 사실을 밝히기라도 한다면, 검신가 전체가 위험해진다.
“용화, 밖에 있으면 들어와 봐라.”
곧 문이 열리고 삼십 대 후반의 중년인이 들어왔다.
무표정한 얼굴, 깊숙이 박힌 눈, 한일자로 굳게 닫힌 입. 차갑게 느껴지는 인상을 지닌 그는 궁주의 친위대인 검신대의 대주 사용화였다.
“부르셨습니까?”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하나 있다.”
* * *
구양환은 동이 트기 전 천군호와 선우명을 불렀다.
전이었다면 속마음이야 어떻든 화기애애한 웃음이 오갔을 자리였다. 그러나 오늘 만큼은 누구도 웃지 않았다.
웃기는커녕 어깨에 만근 쇳덩어리라도 걸머진 것처럼 무거운 표정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사이, 시비가 찻잔에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차를 따르고 밖으로 나갔다.
구양환은 차를 입에 대는 둥 마는 둥 하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밤새 고민하며 결정 내린 이야기를 힘들게 꺼냈다.
“군호 아우, 본 궁의 다음 대를 비룡가에서 이끌어 주었으면 하네.”
선우명이 흠칫하며 구양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도 구양환의 말뜻을 아는지라 토를 달지는 않았다.
천군호는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고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너무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궁주. 어찌 제가 그런 욕심을 부리겠습니까?”
“용아라면 충분하리라 보네.”
“용아가 그럭저럭 제 몫을 하는 아이긴 하나, 선우 형의 아들인 승아도 있지 않습니까?”
선우명의 입술이 보일 듯 말듯 잘게 떨렸다.
천군호가 선우승의 이름을 꺼내는 이유는 자명했다.
신도가도 공식적으로 지지해 달라는 뜻이다.
선우명은 담담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구양환의 말에 찬성했다.
“저 역시 궁주의 말씀에 찬성합니다. 용아라면 본 궁의 궁주가 되어도 부족함이 없는 아이지요.”
천군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사람의 청을 받아들였다.
“허어, 이거 참. 두 분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아우로선 어쩔 수가 없군요.”
구양환은 속이 쓰렸지만 겉으로는 일절 표를 내지 않았다.
“이번 일로 인해 본 궁은 최대의 위기를 맞았네. 세 가문이 협심해서 타개해 나가지 않으면 미래도 없다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궁주.”
“너무 걱정 마십시오. 합심해서 헤쳐 나가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해서 하는 말이네만, 두 분 가주가 함께해 줘야 할 일이 하나 있네.”
천군호와 선우명이 의아한 표정으로 구양환을 바라보았다.
선우명이 먼저 말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 보시지요.”
구양환이 눈빛을 싸늘하게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단화린의 정체를 알아냈네. 알고 보니 마도의 인물이더군.”
“그게 사실입니까?”
선우명이 눈을 홉뜨고 다급히 물었다.
천군호는 생각지 못한 구양환의 말에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가 마도의 사람이라니, 의외군요.”
구양환은 냉소를 지으며 마저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그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우경이와 중아를 이용한 것 같네. 두 아이의 죄를 부풀릴수록 자신의 목적에 유리할 테니까 말이야. 나는 그 점을 이용해 볼 생각이네. 물론 우경이와 중아의 죄가 어느 정도 사실로 밝혀졌으니 완전히 부인하긴 어려운 상황이지. 하지만 놈의 정체를 밝히고 몰아붙이면, 군웅들의 본 궁에 대한 압박도 덜어질 거야.”
선우명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죄가 과대평가된 거라면 선우중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었다.
“그자의 목적이 뭔데 그리 생각하시는 겁니까?”
반면 천군호는 자신의 마음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했다.
단화린의 목적은 보고를 받아서 이미 알고 있는 터. 그는 목적보다 정체가 더 궁금했다.
“단화린의 정체가 뭡니까, 궁주?”
구양환이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북천마궁의 흑룡대 대주 장추람이란 자 같네. 그자가 본 궁에 들어온 것은, 북천마제의 명령을 받고 헌원려려를 빼돌리려는 것이지. 들리는 소문으로는 북천마제가 헌원려려 때문에 술독에 빠져 산다더군.”
6장. 빠른 게 아니라 늦은 거다
구양환이 헌원려려를 자신의 방으로 부른 것은 아침 식사를 마친 직후였다.
“나도 더 이상 붙잡지 않겠다.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도록 해라.”
헌원려려는 닷새의 기간이 이틀 줄어든 것을 반가워해야 함에도 왠지 모르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하루라도 빨리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에 의문을 억눌렀다.
“알겠습니다, 궁주님. 허락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수룡위사대원을 호위무사로 붙여 주마.”
“천사교가 언제 공격할지 모르는데 저 때문에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버님이 산장의 무사를 붙여 줄 테니, 그들과 함께 가겠습니다.”
구양환은 순순히 그녀의 뜻을 받아 주었다.
“알았다. 그만 가 보도록 해라.”
“가면서 진아도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라.”
“그럼 보중하십시오, 궁주님.”
헌원려려는 깊숙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구양환은 방문이 닫히자 이를 악물고 두 눈에서 한광을 번뜩였다.
미끼는 던져졌다. 이제 고기가 무는 일만 남았다.
‘흥, 단화린. 아니, 장추람. 어디 어떻게 나오는지 보자.’
설령 빠져나간다 해도 헌원려려의 아기가 자신의 손에 있는 이상 승부는 끝난 게 아니다.
최후의 승자가 웃게 될 터.
‘이 구양환, 네놈 따위에게 쓰러지지 않아!’
* * *
“대형, 접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이정한의 조급함이 묻어나는 목소리.
찻잔을 입에서 뗀 북궁천은 담담히 대답했다.
“들어와.”
안으로 들어온 이정한의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북궁천이 그걸 보고 이정한을 놀렸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 혹시 능 소저가 아우의 마음을 받아 주겠다고……?”
그런데 그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이정한이 말했다.
“그게 아니고요. 헌원 소저에게 떠나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합니다.”
“그래?”
북궁천은 당장 별원으로 뛰어갈 것처럼 반색했다.
“지금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떡하긴? 나도 떠나야지.”
북궁천이 서두르자 이정한이 말했다.
“함께 나가면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헌원 소저 일행이 출발한 뒤에 뒤따라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었다.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구양환이 헌원려려와 자신이 함께 떠나는 걸 보며 무슨 트집을 잡을지 몰랐다.
자신이야 무서울 것도 없지만, 헌원려려가 힘들어질지 몰랐다.
“그럼 준비하는 동안 작별 인사나 하고 와야겠군.”
북궁천은 봄나들이 가는 사람처럼 밝은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이정한도 바짝 따라갔다.
인사를 하러 가다 보면 철군성 사람들의 거처에도 갈 것이 분명했다. 공손설을 만나지 않고 그냥 가진 않을 테니까.
‘맞아, 공손 소저도 오늘 가기로 했다고 했지? 함께 가면 좋겠는데.’
철군성 무사 중 반은 철은보에 남아 있었다. 능소소도 그중 하나였다.
잘하면 그녀가 공손설의 호위로 따라갈지 몰랐다.
아니라면 대형을 꼬드겨 볼 생각이었다.
호위로 여자 하나쯤 필요하지 않겠냐면서.
‘그래, 이정한. 멋진 생각이다!’
북궁천은 먼저 유원당을 만났다.
유원당은 북궁천이 떠날 때가 되었다는 걸 예상하고 있었는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천사교와의 싸움을 앞두고 절대고수가 떠나는 게 아쉽긴 했지만, 어차피 단화린은 붙잡고 싶다 해서 붙잡아 둘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바로 떠날 건가?”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출발할 생각입니다.”
“잘 생각했네. 의심을 사서 좋을 것도 없지.”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찾아뵙지요.”
“덕분에 세상을 더럽히는 자들을 잡았으니 오히려 내가 고맙네. 딸 가진 부모에게 그런 놈들은 절대 세상에 있어선 안 될 놈들이지.”
“부탁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게.”
“마음에 차지 않아도 황보 아우를 귀엽게 봐 주십시오.”
“훗, 귀엽게라…… 그 산적 같은 놈을 귀엽게 보려면 눈을 열두 번은 씻어야겠군. 어쨌든 자네 같은 사람을 사귄 걸 보면 그놈도 쓸 만한 구석은 있다고 봐야겠지. 걱정 말게. 어차피 딸아이 때문에라도 그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니까. 다른 놈을 소개시켜 줄까 했더니 영 싫다지 뭔가? 그딴 놈이 뭐가 그리 좋은지 원…… 아, 혹시라도 그놈에게 내가 한 말은 하지 말게. 콧대만 높아지니까 말이야.”
북궁천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유원당은 웃는 북궁천을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내둘렀다.
“흐음, 믿을 수가 없군. 자네가 정말 북천의 마왕이라는 그 사람 맞는가? 내가 봐선 마왕은커녕 마졸도 못 될 순한 인상인데 말이야.”
“저도 본래 순한 사람이었습니다.”
“강호의 말 많은 호사가들이 그 말을 들으면 다 뒤로 자빠지겠군.”
“사실이라고 아무리 외쳐 봐야 믿지 않으실 것 같으니 그만 가 보겠습니다.”
유원당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가게. 천사교와 싸울 것을 생각하면 무릎 꿇고서라도 붙잡고 싶지만 어떡하겠나? 그런다고 이곳에 남을 자네가 아니라는 걸 아는데.”
북궁천은 쓴웃음을 지으며 포권을 취했다.
“다음에 뵙지요.”
“나도 살아서 자네를 꼭 한 번은 더 만나고 싶네.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거든.”
유원당의 방을 나온 북궁천은 공손설을 찾아갔다.
공손설은 그가 찾아가자 활짝 웃으며 맞이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웃음에도 시큰둥했다.
“갈 준비 다 됐냐?”
“예, 오빠. 조금 있다가 출발할 거예요.”
“그래?”
북궁천은 그녀의 대답을 듣고 잠시 망설였다.
떠나는 사람은 공손설만이 아니다. 자신도 헌원려려와 함께 떠난다. 방향도 비슷하고.
동행하면 아무래도 공손설이 더 안전해질 터. 그런데도 왠지 동행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헌원려려와의 즐거운 여행길이 공손설로 인해 방해받을지 모르는 것이다.
‘그냥 따로 갈까?’
그런데 이정한이 가슴에 송곳을 푹 찔렀다.
“저, 대형. 공손 소저와 동행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는 북궁천의 마음에 대해선 눈곱만큼도 생각지 못했다. 그저 공손설과 동행하면 능소소와 오랜 시간 함께 여행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꿈에 부풀어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