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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정록 84화

무료소설 마정록: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116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마정록 84화

 

84화

 

 

 

 

 

 

 

코앞에서 보면 누구든 넋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모습.

 

하지만 북궁천의 눈에는 그저 철없는 어린 계집아이로 보일 뿐이었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따라온 거냐? 천사교 놈들이 얼마나 독한 놈들인 줄 알아?”

 

거기다 음마도 설쳤다.

 

그가 눈을 부라리고 다그쳤지만, 공손설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걱정 마세요. 저도 맹물은 아니에요. 그리고 싸우는 곳에는 가까이 가지도 않을 거예요.”

 

“네가 조심해도 놈들이 가만 안 놔둔단 말이다, 이 멍청아.”

 

“그럼 오빠가 보호해 주면 되죠, 뭐.”

 

“난 바빠서 안 돼.”

 

북궁천은 매몰차게 거절하고 엽청문을 바라보았다.

 

“어쩌자고 이 꼬마를 데려온 거요?”

 

엽청문은 쓴웃음을 지으며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황하를 건너는 배에 아가씨가 몰래 탔지 뭐요.”

 

“그럼 다시 돌려보냈어야죠.”

 

“아가씨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성주님밖에 없소.”

 

“아니, 그럼 여기에 계속 놔둘 거란 말이오?”

 

“아가씨 혼자 성을 빠져나온 게 아니고, 염 장로님께서 따라오셨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그분이 모시고 돌아갈 거요.”

 

북궁천은 눈을 두어 번 깜박이더니 이마를 좁혔다.

 

“염 장로? 그럼 장로나 되는 분이, 이 꼬마가 가잔다고 이런 살벌한 곳에 데려왔단 말이오?”

 

그 때 뒤쪽에서 칼칼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냐, 설아가 가자고 해서 왔다. 처음에는 숭산 구경 가자고 해서 그런 것으로만 알았지. 그런데 무슨 말을 들었는지 갑자기 만날 놈이 있다면서 철은보로 가자지 뭐냐.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왔다. 왜, 불만이냐?”

 

북궁천의 눈이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돌아갔다.

 

백발백염에 깨끗한 백색 장포를 걸치고, 홍조를 띤 얼굴에 코끝이 유난히 붉은 노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북궁천은 그 노인을 보고 이채를 반짝였다.

 

‘홍안백노(紅顔白老) 염구악?’

 

워낙 특이해서 북천에까지 소문난 노인이었다.

 

철혈검군의 둘도 없는 친구이며, 십여 년 전만 해도 철군성의 삼군 중 하나로 적에게 공포를 심어 주던 자.

 

당시는 홍안백노가 아니라 홍안백귀로 불렸는데, 사대원로 중 한 사람인 귀천도 악사종이 그를 잘 알았다.

 

겉보기로는 순해 보여도 성질 하나는 귀신도 질려서 도망갈 정도로 독하다고 했다.

 

북궁천이 보는 관점에서야 특별날 것도 없지만.

 

“큰일 날 노인네군. 이 꼬마가 만날 놈이 있다고 하면 어디든 상관없다는 거요? 그러다 다치면 노인네가 책임질 겁니까?”

 

염구악의 주름진 눈매가 꿈틀거렸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그런 표정.

 

일단 두들겨 패고 봐?

 

성질 같아선 그러고 싶었다. 버릇없는 놈에게는 매가 약이니까.

 

하지만 공손설이 시간 날 때마다 말했던 놈 같아서 그럴 수도 없었다. 젊은 놈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도 왠지 모르게 께름칙했고.

 

“네가 그것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설아의 안전은 노부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알아서 한다고요? 어떻게? 노인장이 천하제일고수라도 됩니까?”

 

염구악이 아무리 독하고 강하다 해도 천하제일고수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도 그 점은 인정했다.

 

그런데 북궁천의 말을 듣고 있으니 이상할 정도로 자존심이 상하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눈을 치켜뜬 그는 북궁천을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노부가 언제 천하제일고수라고 했냐? 도대체 네가 뭔데 설아의 안전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이냐?”

 

“나 말이오? 나는 설아의 오빠요. 오빠가 동생의 안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오?”

 

“나는 설아의 할아비다. 할아비가 걱정 말라는데 네가 왜…….”

 

“할아비? 숙부 아닌가?”

 

북궁천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입에 거품을 물고 다그치던 염구악이 움찔하며 말을 수정했다.

 

“그, 그래, 맞다. 나는 설아의 숙부다. 어쨌든 설아의 안전은 내가 책임질 테니, 네놈은 신경…….”

 

“공손 성주가 늦둥이를 낳아서 숙부도 다 노인네들만 있는 모양이군.”

 

“뭐, 뭐야?”

 

염구악이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북궁천은 그를 더 상대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공손설에게 물었다.

 

“설아야, 조금 젊은 숙부는 안 계시냐?”

 

공손설은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계시긴 한데, 지금 인사드리러 가셨어요.”

 

“그래? 노인네하고는 말이 안 통해. 아무래도 그분을 만나서 이야기해 봐야겠다.”

 

그 때였다.

 

“이노오오옴!”

 

분노에 찬 외침이 객당 앞마당을 뒤흔들었다.

 

북궁천은 눈살을 찌푸리며 염구악을 돌아다보았다.

 

염구악의 백발이 바람도 없는데 하늘로 솟구쳐 있고, 치켜뜬 눈에선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 봐야 북궁천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만.

 

“기운 아끼시죠. 그러다 다치면 오래갑니다. 어떤 노인네는 뼈에 살짝 금이 갔는데, 그것 낫는 데만도 석 달이나 걸리더군요.”

 

귀천도 악사종이 그랬다.

 

그런데 염구악의 귀에는 ‘당신 뼈 부러지면 낫는 데 석 달 이상 걸릴 거야.’ 하는 말처럼 들렸다.

 

염구악의 홍조 띤 볼이 파르르 떨렸다.

 

“뭐라? 네놈이 감히 노부를 놀리다니! 내 설아에게 원망을 듣더라도…….”

 

그 때 북궁천이 염구악을 향해 천천히 한 걸음 내디뎠다.

 

잔뜩 긴장해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북궁천이 단지 한 걸음 옮기는 것을 봤을 뿐이었다.

 

하지만 염구악의 눈에는 북궁천의 몸이 찰나간에 열 배는 더 커진 것 같았다.

 

천장 절벽이 눈앞에서 머리 위로 무너지는 것 같은 압박감!

 

숨이 턱 막힌 그는 눈을 부릅뜨고 공력을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끝까지 해 보시겠다면 마다하진 않겠습니다만, 어지간하면 그만두죠?”

 

나직이 입을 연 북궁천의 눈이 가늘어졌다.

 

동시에 염구악을 짓누르던 기운을 회수했다.

 

숨통이 트인 염구악도 끌어 올렸던 공력을 회수하고 아연한 표정으로 북궁천을 바라보았다.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조금 전의 느낌이 거짓말 같았다.

 

하지만 손안에 땀이 가득한 걸 보면 헛것을 본 것은 아니었다.

 

“그, 그게 뭐냐?”

 

“아직 이름은 없습니다. 얼마 전에 떠올라서 한번 해 봤을 뿐이죠.”

 

마제일존보를 조금 보강한 것이라고나 할까?

 

한데도 염구악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름이…… 없다고?”

 

“쓸 만해 보입니까?”

 

북궁천을 바라보는 염구악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단지 일보를 내디뎠을 뿐인데 간이 콩알만 해졌다. 한때 산서의 공포로 군림했던 홍안백노 염구악의 간이 말이다.

 

그런데 듣자 하니 그 무공을 북궁천이 만든 것 같지 않은가?

 

그는 북궁천과 다투고 싶은 마음이 구만 리 밖으로 달아났다.

 

공손설이 놀라운 사람이라며 침이 마르게 칭찬하는 걸 보고 코웃음 쳤거늘, 알고 보니 사람 같지도 않은 놈이었다.

 

“쓰, 쓸 만하군.”

 

그는 가까스로 입을 열어 북궁천의 질문에 대답했다.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이 풀어지자 공손설이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잘 참으셨어요, 숙부님. 숙부님과 오빠가 싸우시면 제 입장만 난처하잖아요.”

 

그녀는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짐작했지만, 일단 염구악의 체면을 먼저 세워 주었다.

 

“험, 너 때문에 참은 것이니라.”

 

머쓱해진 염구악은 헛기침을 하며 대답하고 북궁천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하마터면 체면이 땅바닥에 처박힐 뻔했군. 대체 저놈인 누군데……?’

 

그 때 철심전으로 인사를 나누러 갔던 철군성의 간부들이 돌아왔다.

 

그중에는 장대한 체구의 중년인, 철군성 고수들의 대표격인 패권 진왕리도 있었고 등경도 있었다.

 

북궁천을 알아본 등경은 싸늘한 눈빛을 빛내며 반가운 척했다.

 

“이게 누군가? 그러잖아도 자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만나 보고 싶었는데, 잘됐군.”

 

북궁천은 별로 반갑지 않았다.

 

그가 본 등경은 양무겸만 못했다. 실력은 어떨지 몰라도 사람만큼은 양무겸이 훨씬 나아 보였다.

 

더구나 싸늘한 눈빛을 보니 그날의 일로 자신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등경을 상대하고 싶지 않은 그는 그쯤에서 물러서기로 했다.

 

“일이 터지기 전에 내일이라도 숙부님하고 돌아가도록 해라. 알았지?”

 

공손설을 향해 짐짓 눈을 부라린 북궁천은 그녀가 말을 걸기 전에 고개를 돌려 등경에게 말했다.

 

“바빠서 그만 가 봐야겠소. 이야기는 다음에 나누도록 하지요.”

 

등경은 그냥 보내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잠깐이면 되네.”

 

“혹시 전날의 일 때문에 그러는 거요? 그 일이라면 따질 것도 없을 텐데?”

 

“아끼던 수하가 손을 하나 쓸 수 없게 되었는데 어찌 못 본 척할 수 있겠나?”

 

“그거야 그쪽이 먼저 손을 쓰지 않았소?”

 

“그는 단지 시험을 해 보려 했을 뿐이었네.”

 

등경이 끝까지 물고 늘어지자 북궁천의 눈빛이 무심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시험받는 걸 좋아하지 않소. 천하의 누구든, 나를 시험하려면 그만한 각오를 해야 할 거요.”

 

“정말 오만한 친구군.”

 

“오만이라…… 그래도 요즘은 많이 나아진 거요.”

 

북궁천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등경은 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북궁천이 몸을 돌리자 눈을 치켜떴다.

 

“지금 나를 무시하겠다는 건가? 좋아, 그럼 내가 직접 시험해 보지!”

 

그 때 염구악이 한마디 툭 던졌다.

 

“하지 마라.”

 

멈칫한 등경이 염구악을 돌아다보았다.

 

“숙부님?”

 

“그는 오만할 자격이 있다. 그만하고 안으로 들어와라.”

 

그제야 등경은 객당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함을 느끼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저 친구와 무슨 일이라도……?”

 

“들어오라니까!”

 

버럭 소리친 염구악은 등을 떠밀듯이 북궁천을 보냈다.

 

“어서 가 봐. 바쁘다며?”

 

북궁천은 조용히 미소를 지은 채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 걸음을 옮겼다.

 

공손설이 그의 등에 대고 속삭였다.

 

“오빠, 이따가 찾아갈게요.”

 

‘오지 마!’

 

 

 

한편, 이정한은 한쪽에서 능소소를 만나고 있었다.

 

옆에서 북궁천과 염구악이 신경전을 벌일 때도 그는 잠깐잠깐 고개만 돌렸을 뿐 능소소를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등경과 시비가 벌어질 것 같은 상황에서도 그는 세상에 오직 둘만 있는 것처럼 그곳 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대형을 어쩔 수 없으니까.

 

그리고 동호량이 가자고 세 번이나 부른 후에야 진한 아쉬움을 가슴에 담고 그녀와 헤어졌다.

 

“그럼 나중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능 소저.”

 

능소소도 미소를 지으며 그를 보냈다.

 

“그래요. 이곳에 있으면 또 만날 수 있겠죠.”

 

무공을 익히고 임무를 수행하느라 서른 살이 되도록 마음 줄 남자를 만나지 못한 그녀였다.

 

성에서 만난 남자들에게선 동료, 그 이상의 의미를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강호의 무사답지 않게 순진한 이정한이 그녀에게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정한이라면 삭막함 속에서 살아온 자신을 보듬어 줄 수 있을지도……

 

난생 처음 느껴 보는 열기가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났다.

 

‘누군가와 함께 살아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이정한의 등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열기가 떠오르는데, 곁으로 다가온 엽청문이 농담조로 말했다.

 

“소매, 저 친구가 소매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은데? 잘 한번 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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