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8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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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3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83화
83화
“려려, 너는 나의 모든 것이야.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바꾸지 않을 거다.”
* * *
헌원려려의 방을 나선 북궁천은 온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허공섭물을 써서 조금은 강제적인 방법으로 안았지만, 그녀가 자신을 거부하지 않았다.
입맞춤도.
아직까지도 쿵쿵거리며 뛰는 심장이 터지지 않은 게 신기했다.
“오늘따라 하늘이 유난히 맑군. 날도 따뜻하고. 곧 봄이 오겠는데?”
히죽 웃은 그는 천광호의 거처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바쁠 텐데 어쩐 일인가?”
천광호는 하루에 한 번 보기도 힘든 북궁천이 자신을 찾아오자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부탁할 게 있습니다.”
“뭔데?”
“아우들과 이조량을 당분간 제가 데리고 있었으면 합니다.”
그 정도는 부탁이라 할 것도 없었다.
“맘대로 하게.”
흔쾌히 허락한 천광호는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구양우경 외에 정말 그런 짓을 한 개새끼들이 또 있는가?”
“있습니다.”
“어떤 놈들인지 아나?”
“시간이 지나면 밝혀질 겁니다.”
천광호의 눈빛이 반짝였다.
시간이 지나면 밝혀질 거라는 말이, 곧 밝혀질 거라는 말처럼 들렸다.
그런데 단화린의 눈빛을 보니, 아무래도 자신의 짐작이 맞을 것 같았다.
애가 단 그는 북궁천에게 바짝 머리를 들이밀었다.
“이보게, 그 개새끼들 잡을 때 나도 좀 끼워 주면 안 될까?”
“가까운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천광호는 사악한 천사교도보다 음마에게 더 화가 났다.
천사교 놈들은 아예 나 나쁜 놈이요 하고 나쁜 짓을 하는데, 그 개자식들은 정파의 껍질을 쓰고서 나쁜 짓을 했다.
동료를 속이면서 나쁜 짓을 하는 그놈들이야말로 천사교 놈들보다 더 사악한 놈들이 아닌가 말이다.
더구나 연약한 여자를 그런 식으로 죽이다니!
“내 조카라 해도 상관없네. 아니지, 오히려 내 조카라면 내가 먼저 나서서 패 죽일 거네.”
천광호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북궁천도 그걸 알기에 그의 청을 수락했다.
“좋습니다. 그럼 놈을 잡을 때 당주의 도움을 받도록 하지요.”
“고맙네. 언제든 시킬 일이 있으면 말하게. 우리 아이들을 쫙 풀 테니까.”
북궁천은 이정한을 시켜서 황보청과 종리기진을 데려오게 했다. 그리고 이조량은 사공강후에게 보냈다.
일각이 지날 즈음, 그의 방에 이정한과 동호량, 초강, 황보청, 종리기진이 모이고, 반 각가량 지나서 이조량이 사공강후를 데려왔다.
북궁천은 이조량과 사공강후가 도착한 후에야 선우중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우들이 선우중을 감시해 줘야겠다. 너무 가까이 붙지 말고 멀리 떨어져서 교대로 감시해. 그리고 움직임이 수상하면 바로 나에게 알리도록.”
먼저 태극문의 제자들에게 명령을 내린 그는 황보청과 종리기진을 바라보았다.
“두 아우는 려려의 호위를 맡아 줘야겠어. 표 나지 않도록 은밀하게 보호해. 만약 선우중이 그곳에 나타나면 어디로 가는지 잘 살펴보고. 려려에게 가면 막고, 구양우경에게 가면 그냥 놔둬.”
황보청이 상황을 눈치채고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자가 혹시 구양우경과 놀아난 음마 중 하나입니까?”
“현재로선 거의 확실해. 확실한 증거를 잡는 게 중요하니 눈을 떼지 마.”
“예, 대형. 걱정 마십쇼. 그 자식이 방만 나서면 그림자처럼 따라붙을 테니까요.”
묵묵히 듣고 있던 사공강후가 싸늘한 조소를 지었다.
“그동안 깨끗한 척 다하며 우리가 전검문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비웃더니, 어이가 없군.”
전검문은 형문에 있는 세력으로 정사 중간에 위치해 있었는데, 천무회는 그들과 상호협력하며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데 삼성궁은 그걸 보고 천무회를 순수한 정파로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들 등에 똥 묻은 줄은 모르고 말이다.
북궁천은 그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나중에 증거가 드러나면 사공 형이 힘을 써 줘야겠소.”
“알겠소. 그런 일이라면 삼성궁과 사이가 멀어지더라도 가만있을 수 없지요.”
북궁천은 선우중에 대한 처리가 끝나자 화제를 돌렸다.
“구양우경이 귀 회의 사람을 살해한 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기로 했소?”
“부단주의 가족에게 은자 삼천 냥을 주고, 본 회에 따로 은자 오천 냥을 주겠다고 협상을 제의해 왔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소.”
“그럼 사공 형은 어떻게 하길 바라시오?”
“먼저 구양우경이 상 부단주를 죽였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구양 궁주가 직접 상 부단주의 가족에게 사과해야 할 거요. 보상은 그다음이오.”
“구양 궁주는 뭐라고 하오?”
“상 부단주의 몸에 남은 상흔만으로는 모든 죄를 인정할 수 없으니, 보상하는 선에서 이번 일을 마무리하자고 하오. 흥, 어디 두고 봐야겠소. 선우중이 음마 중 하나라는 게 밝혀지면 어떻게 나오는지.”
4장. 철군성에서 온 사람들
선우중은 철은보에 도착한 지 이틀이 지나도록 구양우경을 만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북궁천은 그에 대한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그가 구양우경을 만나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수상했다. 가까이 지낸 사이라면 한 번쯤 찾아가 봐야 정상이 아닌가 말이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 거리를 두는 것일 수도 있지만, 꼭 그 이유만은 아닌 듯 느껴졌다.
구양우경은 만나지 않으면서 가끔 구양우경의 거처를 살펴보는 그였다. 마치 도둑이 도둑질하기 전에 사전 조사를 하듯이.
그리고 헌원려려를 멀리서 지켜보는 모습이 두어 번 목격되었다.
그 말을 들은 북궁천은 선우중을 몰래 잡아서 팔다리를 모두 부러뜨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무도 모르게 하면 되지 않을까?’
음마인 것은 분명하니 죄책감을 느낄 이유도 없고 말이다.
‘려려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야. 그런 놈은 이 세상에 살 가치가 없어.’
팔다리뿐만 아니라 눈알까지 터트려 버리고 싶었다.
그 더러운 눈으로 감히 려려를 훔쳐보다니!
이튿날 그들이 오지만 않았어도 어쩌면 실행에 옮겼을지 몰랐다.
하늘이 잿빛으로 물들어 우중충한 아침 무렵.
가죽옷과 털외투를 걸친 일단의 무리가 저만치서 달려오는 게 보였다.
철은보 정문 위사 정도삼은 바짝 긴장해서 그들을 주시했다.
‘어디서 오는 사람들이지?’
천사교의 무리는 아닌 듯했다. 하지만 삼성궁이나 천무회, 무림맹의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도, 검, 창, 극, 궁 등 각양각색의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일신에서 뿜어지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아서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정도였다.
삼류 문파의 무사나 낭인 따위는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기세.
정도삼은 그들이 정문을 향해 곧장 다가오자 숨을 크게 들이쉬고 앞을 막았다.
“정지! 어디서 온 분들이시오!”
앞장서서 걸어오던 기골이 장대한 중년인은 대답하기 전에 먼저 철은보의 현판을 확인하고 활짝 웃었다.
“하하하하, 드디어 도착했군. 우리가 누구냐고 물었는가?”
호탕한 웃음소리, 부리부리한 눈으로 바라보는 중년인과 눈이 마주친 정도삼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 그렇습니다.”
“우리는 철군성에서 왔네!”
철군성의 무사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은 곧 철은보에 머물고 있던 각 세력의 수뇌부에 전해졌다.
북궁천도 그들의 도착 소식을 듣고 기분이 묘했다.
‘그 꼬마 계집은 잘 있나 모르겠군.’
등경도 왔을까? 양무겸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잠시 추억을 떠올리고 있는데 이정한이 넌지시 물었다.
“대형, 가 보시지 않을 겁니까?”
“내가? 내가 왜?”
“아니, 뭐…… 누가 왔는지도 좀 보고…….”
동호량이 이정한의 마음을 눈치채고 놀리듯이 말했다.
“사형, 사형이 좋아하는 능 소저가 왔는지 알고 싶으슈?”
이정한이 제풀에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무, 무슨 소리야? 쓸데없는 소리 마라, 호량. 능 소저가 나 같은 사람 쳐다보기나 하겠냐? 난 그냥…… 능 소저가 부상에서 완쾌되었는지 그걸 알고 싶을 뿐이라고. 그때 많이 다쳤잖아?”
북궁천이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알았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정한 아우가 백화선자를 좋아했어?”
이정한과 동호량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북궁천을 힐끔거렸다.
아마 선우중을 감시 중인 초강이 이 자리에 있다면 그 역시 같은 표정이었을 게 분명했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헌원려려를 되찾기 위해서 일만 리나 되는 길을 왔을까.
답답해진 동호량이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대형, 면산에서 사형이 백화선자를 업었잖습니까. 그때 마음이 통한 거죠.”
“맞아, 그랬지. 재미있군. 남녀가 그런 일로 해서 좋아할 수도 있다니 말이야.”
신기하다는 표정.
하지만 동호량과 이정한은 전혀 신기해하지 않았다.
신기할 것도, 특별히 재미있을 일도 아니었다. 살다 보면 당연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니까. 대형만 모를 뿐.
그래도 북궁천은 이정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럼 가서 누가 왔는지 볼까? 능 소저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말이야.”
이정한이 제일 먼저 일어났다.
“간부들은 지금 철심전에서 각 세력의 수뇌부와 인사를 나누는 중이라고 합니다. 함께 온 무사들은 객당에 있고요. 가시죠, 대형.”
그는 이미 철군성 무사들이 머무는 장소까지 파악한 상태였다.
이정한과 동호량을 대동하고 객당으로 다가가던 북궁천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저게 누구야?”
객당의 방문 중 하나가 열리더니 세 사람이 나오고 있었다.
칼을 찬 삼십 초반의 장한과 서른 살가량의 아름다운 여인. 그리고 열대여섯 살가량의 백의소녀.
다름 아닌 엽청문과 능소소, 공손설이었다.
“저 꼬마가 왜 여기에 온 거지?”
북궁천은 어이가 없었다.
이곳이 어디라고 꼬마 계집아이가 온단 말인가?
동호량은 공손설이 온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대단한 소녀군. 대형을 찾아서 여기까지 오다니.’
반면 능소소를 발견한 이정한은 가슴이 두근거려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왔구나! 전보다 더 아름다워졌어.’
그 때 공손설이 북궁천 일행을 발견했다.
“어머? 오빠아아아!”
큰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는 활짝 웃으며 소리치더니, 누가 말릴 새도 없이 하얀 나비처럼 날아왔다.
“너 여기는 왜 온 거냐?”
북궁천이 눈을 껌벅이며 물었다.
공손설은 대답 대신 그의 품속으로 날아들었다.
헉!
북궁천은 강적의 공격을 받은 사람처럼 숨을 들이쉬며 두 손을 내밀어서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공손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의 두 손 사이로 파고들었다.
피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칠 수도 없고.
북궁천이 빤히 보며 망설이는 사이 공손설이 그의 품에 안겼다.
“그러잖아도 오빠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인마, 좀 떨어져라. 남들이 보잖아.”
“뭐 어때요? 동생이 오랜만에 오빠를 만나서 반가워 그러는 건데.”
공손설은 그러면서도 거리를 조금 벌리고 그를 올려다봤다.
반달처럼 휘어진 커다란 눈. 너무 맑아서 백옥에 흑진주를 박아 놓은 것 같은 눈동자가 기다란 눈썹에 덮여 반짝였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밝게 웃는 입술이 복사꽃처럼 물들어 있고, 티 한 점 없는 옥빛 볼에 깊은 보조개가 옴폭하니 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