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8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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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78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80화
80화
장로와 간부들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구양환은 명령을 내리고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한순간에 십 년은 늙어 버린 기분이었다.
그 때 구양영이 넌지시 말했다.
“형님, 바쁘면 사소한 일은 잊게 마련입니다. 천사교 놈들을 공격하는 방법을 찾아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구양환의 침잠된 눈빛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군.’
* * *
구양환이 도착한 이튿날 오후.
북궁천은 조사라는 공식적인 핑계를 대고 소동동을 찾아갔다.
닷새가 지났는데도 그녀는 그날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몸은 좀 어떠냐?”
“많이 좋아졌어요. 구해 줘서 고마워요, 무사님.”
북궁천은 자신을 생명의 은인으로 아는 소동동에게 미안했다.
자신이 구양우경을 잡기 위해서 그녀를 이용했다는 걸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 그래도 고마워할까?
씁쓸해진 그는 소동동을 다독였다.
“그자는 두 번 다시 너를 건드릴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자가 속한 세력의 누구도 너를 위협할 수 없을 거다. 그러니 안심하고 두려움을 떨치도록 해.”
“예, 그래야겠죠. 그래야…….”
나직이 대답하던 소동동은 물기가 젖은 눈을 소매로 쓱 닦아 내고는, 빙그레 웃으며 오히려 북궁천을 안심시켰다.
“너무 걱정 마세요. 이래 봬도 무사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강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 가게를 거저먹으려는 사람들이 온갖 훼방을 놓아도, 포기하지 않고 가게를 꾸려 온 사람이 저라구요.”
북궁천이 봐도 강한 여자였다.
천하의 북천마제가 걱정할까 봐 웃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쓴웃음을 지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는 이겨 낼 수 있을 거다. 더구나 삼성궁이 너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할 거다. 그러니 당분간은 힘든 일 하지 말고 몸부터 추스르도록 해라.”
“기왕이면 많이 줬으면 좋겠어요. 가게가 오래되어서 고칠 곳이 많거든요.”
“못해도 은자 천 냥은 주겠지.”
소동동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돈이면 가게를 고치는 게 아니라, 집까지 통째로 멋지게 새로 지을 수 있었다.
“정말요?”
“물론이지. 그런데 나는 그것도 적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삼천 냥을 내놓으라고 할 생각이다. 준다고 할 때 확실히 받아 내야지. 어때, 그 정도면 마음에 드느냐?”
소동동의 입이 딱 벌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 냉정을 되찾고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 많아요. 갑자기 큰돈이 생기면 화를 불러들일 수 있어요.”
“그 점은 걱정마라.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서 삼성궁의 이름으로 너를 지켜 주라고 할 테니까.”
삼성궁이 배후에 있다면 누가 감히 건들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소동동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아니에요. 저는 정말 천 냥만 해도 감지덕지예요.”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알겠다. 그리 말하마.”
북궁천은 순순히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이 소동동을 찾아온 두 가지 목적 중 하나를 마저 꺼냈다.
“너에게 하나 물어볼 게 있다. 힘들겠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도록 해라. 정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되니 너무 부담 갖진 말고.”
“말씀해 보세요.”
“그날 그자가 혹시 다른 사람의 이름이나 호 같은 것을 말하지 않았느냐?”
소동동의 몸이 잘게 떨렸다. 그날의 일을 떠올리자 두려움이 엄습했다.
북궁천은 몸을 떠는 그녀가 안쓰러웠지만 말없이 기다렸다.
곧 입술을 질겅 깨물고 마음을 진정시킨 소동동이 웅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했어요. 장안의 호 형이나 선우 아우가 알게 되면 자신을 부러워할 거라고…… 그게 다예요.”
겨우 말을 마친 그녀는 눈길을 발끝으로 떨구었다.
선우 아우라는 자는 신도가에 있을 명화회 회원일 것이다. 그런데 장안의 호 형은 누굴까?
‘선우가의 놈을 잡아내면 알 수 있겠지.’
북궁천은 더 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해 줘서 고맙다. 쉬도록 해라.”
그 때 소동동이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도 하나 물어볼 게 있어요.”
멈칫한 북궁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해 봐라.”
“무사님께서 저희 집에 찾아오신 거, 매일 당과를 주문하신 거. 그 일과 상관이 있었나요?”
소동동은 착실하고 얼굴이 예쁠 뿐만 아니라 머리도 똑똑했다.
북궁천은 그녀를 직시한 채 솔직히 대답했다.
“부인하지 않으마. 그 점은 정말 미안하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너에게 어려움은 있을지언정 해를 입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약간의 착오로 너에게 고통을 주고 말았구나.”
“역시…… 역시 제 짐작이 맞았군요.”
“나를 원망한다 해도 할 말이 없다. 그럼 오늘은 이만 가 보겠다.”
북궁천은 씁쓸한 마음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문을 연 그가 막 방을 나서려할 때 소동동이 말했다.
“너무 미안해하지 마세요. 무사님은 저에게 잃어버린 꿈을 찾아 주셨어요. 그리고 제가 조금 다친 대가로 그렇게 나쁜 자를 잡게 되었으니 오히려 잘된 일이죠.”
고개를 돌린 북궁천은 소동동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 너는 정말 예쁜 아이다. 분명 멋진 낭군을 만나서 아주 잘 살 거야.”
소동동은 눈가에 눈물을 매달고 배시시 웃었다.
“고마워요, 아저씨.”
“아저씨가 아니라 오빠다. 아직 장가도 가지 않았거든?”
끝내 소동동이 큭큭대며 소리 내어 웃었다.
북궁천도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 * *
당화점을 나온 북궁천은 철은보로 돌아가자마자 유원당과 조관수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들에게 ‘장안의 호 형’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
장안에서 호씨 성을 쓰며, 삼성궁의 후기지수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자.
백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 같지만, 상대를 그렇게 좁히면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었다.
조관수는 백검맹과 친하게 지내던 장안의 진가장에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다.
유원당은 거기에 더해서 무림맹 사람을 만나 개방에 도움을 요청하겠다고 했다.
북궁천은 그 일을 마무리 짓고 임강령을 만났다.
“필체의 주인은 찾으셨습니까?”
“아직 찾지 못했네. 아무래도 은밀하게 알아보려고 했더니 시간이 걸리는군.”
“선우가의 청년 중 구양우경이 아우라 부르며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잠시 기억을 더듬은 임강령이 말했다.
“선우가의 청년은 모두 이십여 명이네. 하지만 구양우경은 아무나 아우라고 부르지 않네. 그가 아우라고 부르며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대여섯 명 정도지.”
“그중에서 ‘장안의 호 형’을 알고 있는 사람을 찾으면 좀 더 좁혀지겠군요.”
“아무래도 그러겠지. 혹시 그자가 구양우경과 어울린 자인가?”
“그렇습니다.”
북궁천은 소동동에게 들은 이야기를 짤막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그들이 쓴 글이 없어서 필체를 대조해 보기가 어려우면, 의심되는 사람들에게 서신을 보내서 답장을 받아 보면 어떻겠습니까?”
임강령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북궁천을 빤히 응시했다.
“소문으로는 패도적이고 직선적이어서 치밀함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라고 들었는데, 모두 헛소문이었군.”
북궁천은 그의 말뜻을 깨닫고 피식 실소를 지었다.
“그게 아니라, 무식한 데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악귀라고 소문났겠지요.”
임강령이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가 좀 그런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험, 뭐 그 정도는 아니어도 비슷하게는 소문이 났지.”
“사실입니다. 거기다 아주 멍청하기까지 했지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멍청하니까 여기까지 온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 제가 조금만 깊게 생각했다면 여기까지 올 이유도 없고, 려려를 고생시키지도 않았을 겁니다.”
연합 세력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임강령은 그가 없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한편으로는 여자가, 사랑이 사람을 이 정도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했다.
하지만 그는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 전에 마저 하던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좌우간 자네의 의견은 나도 찬성하네. 그렇게 해 보지.”
북궁천은 임강령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또 다른 질문을 했다.
“구양 궁주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가만히 앉아서 조사 결과가 나오는 걸 기다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구양가의 가신들이 각 세력의 주요 간부들을 만나 설득하는 모양이네. 그리고 나와 백리 형님에게 조사를 대충 마무리해 주었으면 하는 뜻을 넌지시 비치더군.”
그 일에 대해선 북궁천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입장으로는 당연한 일이어서 문제 삼을 것도 없었다.
그가 정말로 걱정하는 것은 구양환이 엉뚱한 일을 벌일 경우였다.
‘만약 려려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된다면, 당장 려려를 데리고 떠나야겠어. 려려도 그쯤 되면 반대하지 않겠지.’
북궁천은 다시 한번 각오를 다지고 임강령에게 말했다.
“혹시라도 려려와 관련된 일이 생기면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걱정 말게. 그 일에 관해서만큼은 나도 자네 편이네.”
연합 세력 전체를 위해서라도.
북천마제를 분노케 해서 좋을 건 없으니까.
3장. 너는 나의 모든 것이다
구양환은 실성해 버린 아들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비오기 전날의 하늘처럼 흐리멍덩한 눈빛, 곱사등이처럼 굽은 어깨, 반쯤 벌어진 입에서 흐르는 걸쭉한 침.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호 청년들의 우상이었던 신룡공자는 어디 있단 말인가. 삼성궁의 미래를 이끌어 갈 검신가의 후계자는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천으로 꽁꽁 감싼 어깨는 움직일 순 있어도 기껏해야 수저를 겨우 들 정도일 뿐. 부목을 대어서 묶어 놓은 두 다리는 낫는다 해도 걷기가 힘들 거라고 했다.
거기다 단전은 복구될 수 없을 만큼 부서진 상태였고.
철저한 파괴!
‘차라리 죽일 것이지…….’
죽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단화린에게 대가를 치르게 했을 것이 아닌가 말이다.
울화통이 터진 구양환은 더 이상 아들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건너편에 있는 헌원려려의 방으로 향했다.
헌원려려의 방에는 그녀와 서문각이 함께 있었다.
구양환은 헌원려려을 향해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라. 지금은 충격 때문에 정신이 오락가락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낫겠지.”
헌원려려는 구양환이 말을 붙이자 놓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궁주님, 솔직히 말씀드려서 견디기가 너무 힘듭니다. 허락하신다면 이곳을 떠나고 싶습니다.”
구양환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터였다.
혼인할 남자가 불구가 되었다. 더구나 사악한 음마로 만인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지 않은가?
어느 여자가 심적으로 동요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그는 막상 그녀가 떠나겠다고 하자 속이 울컥했다.
혼인만 하지 않았을 뿐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구양우경의 부인이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구가 된 약혼자를 놔두고 혼자 떠나겠다니.
하지만 그녀를 강제로 붙잡아 두기에는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리도록 해라. 옮겨도 괜찮을 정도가 되면 우경이와 함께 궁으로 보내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