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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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78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12화
112화
“결국 자신들을 대신해서 싸워 달라는 말이군요.”
“맞아. 실컷 이용해 먹겠다는 거지.”
북궁천의 말투에서 한기가 풀풀 날리자, 이정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형께서는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아기를 포기할 수도 있다고 했지.”
모두가 움찔해서 북궁천을 바라보았다.
설마? 하면서도 조금은 불안했다.
마제가 달리 마제겠는가?
“그런데 꿈쩍도 안 하더군. 정말 능구렁이 같은 인간이야.”
그제야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고 사람들의 표정이 풀어졌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나는 그자의 요구를 모두 들어줄 생각이 없다.”
“하면……?”
“일단 시간을 끌면서 진아를 찾아봐야지.”
그 때 나이 어린 점소이가 쭈뼛거리며 다가오더니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저, 뭘 드시겠습니까요, 무사님들?”
북궁천이 쓱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여기서 자신 있는 요리 열 가지만 가져와라.”
열두어 살가량의 점소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열 가지나요?”
“그래. 기왕이면 씹는 맛이 있는 걸로.”
음식을 상대로라도 분을 풀고 싶었다.
구양환을 잘근잘근 씹듯이 고기라도 씹으면서.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간 북궁천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하더니 이조량을 바라보았다.
“조량, 가서 천 당주를 데려와라.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고.”
이조량은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고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대형.”
북궁천의 눈이 이번에는 동호량을 향했다.
“호량, 너는 북미진을 뒤져서 초상을 그리는 데 능숙한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도록 해라. 먼저 객잔 주인에게 물어봐. 큰 마을이 아니니 객잔 주인이라면 마을 사람들을 대부분 알 거다.”
“알겠습니다.”
동호량이 밖으로 나가자 북궁천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다른 사람들은 나가서 주위에 감시자가 있는지 살펴봐라. 있으면 보이는 대로 모두 없애 버려. 하나도 남김없이.”
“예, 주군.”
장추람 등은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명령을 받았다는 듯 눈빛을 반짝이며 몸을 일으켰다.
* * *
검신대 이조 무사 오경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저 멀리 있는 객잔을 바라보았다.
비밀 임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도무지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검신대에 몸을 담은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대주인 사용화가 기도 못 펴는 상황이니 그로선 어디다 물어볼 수도 없었다.
‘제길, 나도 모르겠다. 맡은 임무나 수행하면 되지, 뭐.’
그 때였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했다. 누군가가 등덜미에 얼음을 집어넣은 것처럼.
흠칫한 그는 슬쩍 뒤를 돌아다보았다.
동시에 한 줄기 시퍼런 선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적!’
대경한 그는 몸을 뒤로 빼려고 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쉬이이익.
목에서 핏줄기 뿜어지는 소리가 잘못 불은 휘파람 소리처럼 들렸다.
‘너, 너무 빨라.’
그는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저승 가는 길이 외롭지는 않을 거다. 네 동료들도 함께 갈 테니까.”
나직이 중얼거리는 냉호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장추람 등은 한 시진 동안 적미진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감시자 일곱을 추살했다.
사용화가 감시자에게서 연락이 끊겼다는 걸 알았을 때는 적미진에 남겨 놓은 검신대 무사들이 모두 죽은 후였다.
“빌어먹을 놈! 아들이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건가?”
“어떻게 할까요, 대주?”
이를 갈던 사용화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을 보내 봐야 희생자만 늘어날 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놈들을 그냥 놔둬라. 어차피 내일이면 결판날 테니까.”
* * *
이조량이 백 리 길을 달려가서 천광호를 데려온 것은 축시 무렵이었다.
북궁천은 감시자를 제거하고 돌아온 장추람 등과 함께 방 안에서 그를 맞이했다.
서로 얼굴을 알아 두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는 북풍사객만 없었는데, 그들은 아직도 먹잇감을 찾아서 적미진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던 천광호는 여러 사람이 앉아 있는 걸 보고 멈칫하더니, 북궁천을 향해 씩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잘 있었나?”
이마가 땀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웃는 걸 보니 한밤중의 호출에 기분이 상하진 않은 듯했다.
그럴 거라 생각하고 데려오라 한 것이긴 하지만.
“밤늦게 불러서 죄송합니다. 앉으시죠.”
“별말을. 자네가 돌아왔다는데, 마누라하고 그 짓을 하던 중이라 해도 멈추고 달려와야지. 하하하.”
천광호는 너스레를 떨며 웃고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고맙습니다. 사실 천 당주님을 부른 것은 부탁할 게 있어서입니다.”
“부탁? 어이구, 이거 잘못 온 것 같은데? 나는 또 전에 약속한 술이라도 마시자는 줄 알았지.”
천광호는 불안하다는 듯 과장된 몸짓을 하면서도 눈빛을 반짝였다.
쓴웃음을 지은 북궁천이 고개를 돌려 초강에게 말했다.
“초강, 주인을 깨워서 술과 간단한 안주를 준비해 달라고 해라. 값을 배로 쳐준다고 해.”
“예, 대형.”
초강이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주인이 일어나지 않으면 멱살을 잡아서 주방으로 끌고 갈 것 같은 표정이었다.
북궁천은 그제야 천광호에게 자신이 부른 목적을 말했다.
“당주, 수룡위사대주 능상악을 아시죠?”
“능상악? 글쎄? 보기야 몇 번 봤는데, 잘 안다고 하기는 뭐하군. 그런데 그 인간은 왜?”
“찾아서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혹시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천광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안 보인 지 꽤 되는군. 어디 갔지?”
“몇 번 봤다면 그자의 얼굴을 잘 아시겠군요?”
“얼굴이야 당연히 알지.”
수룡위사대원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천광호는 당주인 데다 비룡가의 사람. 모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역시나 생각했던 대로다.
“능상악의 초상을 최대한 세밀하게 그려야 하니 좀 도와주십시오.”
“초상을? 그 인간이 사고라도 쳤나?”
북궁천은 그에게 아기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그자가 아기를 미정의 장소로 옮겼다고 합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걸 보니 장소를 아는 사람은 그자와 궁주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열혈남아 천광호의 눈초리가 역팔자로 솟구쳤다.
“뭐? 궁주가 아기를 인질로 삼았다고?”
“그렇습니다.”
“그 인간, 미친 거 아냐? 아니면 제정신으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상황이 안 좋아지니까 수단 방법을 가릴 여유가 없는가 봅니다.”
“염병할! 삼성궁 얼굴에 똥칠은 그들 부자가 다 하는군.”
한쪽에서 묵묵히 듣고만 있던 장추람 등은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자가 주군에게 함부로 말하는 게 못마땅했다.
그런데 천광호의 거친 말투를 듣다 보니 마음이 풀어졌다.
‘사람 한번 시원시원하군.’
‘주군의 정체를 알아도 바뀌지 않겠는데? 한번 시험해 봐?’
‘중원에도 저렇게 화끈한 사람이 있긴 있군. 살모사 같은 자하고는 다른데?’
북궁천은 천광호가 열 받아 있는 사이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그럼 도와주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알았네. 내 그 인간의 얼굴에 박힌 점의 개수까지 최대한 기억해 보겠네.”
북궁천은 고개를 돌려 동호량을 바라보았다.
“호량, 화공을 데려와라.”
“예, 대형.”
동호량은 객잔 주인에게 물어서 가난뱅이 화공 한 사람을 알아 둔 터였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 북궁천이 천광호에게 주의를 주었다.
“당주, 제 말이 있기 전에는 지금 저와 나눈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해선 안 됩니다. 당주를 이 밤에 부른 것도 저들이 알아선 안 되기 때문이니까요.”
“걱정 말게. 꿈에서 아무리 예쁜 여자가 알몸을 던지면서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을 테니까. 흐흐흐.”
북궁천은 피식 웃고는 화제를 돌렸다.
“현 상황은 어떻습니까?”
천광호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파였다.
“솔직히 말해서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네. 상황을 변화를 주기 위해서 며칠 전 우여곡절 끝에 선유원의 유 원주를 총군사로 임명했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
북궁천의 눈이 커졌다.
“유 원주께서 총군사가 되셨습니까?”
“그렇다네. 그런데 암중으로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작전을 지휘하기가 쉽지 않은가 보더군. 오늘 아침만 해도 사백 명으로 이루어진 무사대를 파견하는데 무슨 말들이 그리 많은지 원…… 총군사가 까라면 깔 것이지 말이야.”
유원당이 총군사가 되었다는 말에 북궁천의 표정이 조금 펴졌다.
만에 하나 천사교와 싸워야 할 상황이 되어도 유원당이 총군사라면 그나마 나았다.
‘기회를 봐서 유 원주를 만나 봐야겠군.’
그 때 천광호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헌원 소저는 괜찮나?”
“기운만 회복하면 별 이상은 없을 것 같습니다.”
“휴우, 정말 다행이군.”
천광호도 상남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분기탱천해서 구양환을 찾아갈 뻔했다. 그랬으면 이 자리에 오지도 못할 신세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백리 대협과 임 대협도 내향에 계십니까?”
천광호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시네. 그런데 그분들은 이제 본 궁의 봉공이 아니네. 그날 이후 삼성궁에서 나오셨지. 지금은 백검문 사람들과 함께 강호에서 몰려든 무사들을 이끌고 계시네. 이번에 출동한 무사대도 백리 대협이 책임자지.”
북궁천의 입장에서는 잘된 일이었다.
삼성궁과 마찰이 생겨도 신경 쓸 사람이 그만큼 적어졌단 말이니까.
“황보청과 종리기진은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그들은 총군사를 보필하고 있네.”
그들이 유원당을 보필하고 있다면 유원당과의 대화 통로가 뚫려 있다는 말.
그나마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당주, 저도 최악의 상황이 생기는 건 바라지 않습니다만, 설령 그런 일이 생겨도 당주께선 그 일에 끼어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나는 자네가 궁주와 싸우더라도 상관치 않을 거네. 단, 기룡이만큼은 잘못이 있어도 한 번만 봐주게. 그나마 내가 희망을 걸고 있는 유일한 놈이거든.”
“걱정 마십시오. 저도 그 친구는 괜찮게 봤으니까요.”
잠시 후. 동호량이 꾀죄죄하게 생긴 서생 차림의 화공을 하나 데리고 왔다.
바짝 겁에 질린 화공은 달달 떨리는 손으로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붓끝이 달달 떨렸다.
아무래도 현 상태로는 제대로 된 그림이 나올 것 같지 않다.
“초상을 그릴 때 어디를 제일 중점적으로 따져서 그리시오?”
북궁천이 화공에게 갑자기 물었다.
화공은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그, 그야 눈입죠. 눈만 제대로 그려도 반은 그려진 것입죠.”
“흠, 그렇군요. 그럼 그다음에는 무엇을 중요시하오?”
“입과 턱선, 그리고 큰 점 같은 특징적인 곳을 중요시합죠.”
두어 가지 묻는 사이 화공의 손이 떨림을 멈췄다.
“그럼 이제 저분이 이야기하는 사람을 그려 보시오. 마음에 들면 보수를 두 배로 주겠소.”
“예? 아, 알겠습니다요.”
화공은 보수를 두 배로 준다고 하자 힘이 났다.
반 시진 후.
스무 장의 종이를 허비해 가며 그림 하나가 완성되었다.
화공이 붓을 내려놓고 이마의 땀을 닦자, 천광호가 꺼칠꺼칠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