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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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1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07화
107화
“안 내주면 다 때려 부수지, 뭐. 그랬다가는 천사교가 아니라 내 손에 망할걸?”
“그러다 아기가 다치면요?”
“그건 안 되지.”
북궁천의 표정도 신중해졌다.
장추람이 동호량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나?”
“아기의 위치를 알아낸 후 몰래 빼내면 어떻겠습니까?”
그럴 수만 있다면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마찰을 피할 수 있다.
하지만 북궁천은 그 방법이 마음에 안 들었다.
자신의 자식을 데려가는데 물건을 훔치듯이 몰래 빼내다니.
“다른 방법은?”
“몰래 빼내는 것 말고는 정면으로 돌파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저들의 반응이죠.”
그 때 초강이 말했다.
“일단 정면으로 들이대고 나서 반응을 보며 대응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이정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염려하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들이 엉뚱한 생각을 품으면?”
“저자들도 함부로 하지 못할 겁니다. 아기가 잘못되거나 하면 생각지도 못한 벼락이 떨어질 거라는 걸 잘 알 테니까요.”
“그것도 그렇군.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저들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아기를 내놓으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다시 동호량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할 말을 미리 생각해 놓고, 상대의 반응에 따라서 우리가 대처할 행동을 정해 놓으면 어떨까요?”
북궁천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일단 아우들 말대로 해 보자. 엉뚱한 짓을 하면 저들도 알게 될 거다.”
북천마제가 왜 공포로 불리는지!
* * *
이튿날 아침. 북궁천 일행은 삼성궁에 도착했다.
현 상황을 대변하듯 삼성궁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북궁천이 처음 왔을 때 보았던 삼성궁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지금도 천사교와 싸울 무사를 모집하고 있는 것은 변함없을 터. 그런데도 전과 달리 늘어서 있는 무사들이 없었다. 그저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만 드문드문 보일 뿐.
전에는 삼성궁이 당연히 이길 거라 생각하고 공명심에 찾아왔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른 것이다.
‘세상인심은 이곳이라 해서 다르지 않군.’
의? 협?
많은 사람이 침을 튀겨 가며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의협심이 강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의협에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대협이 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만인에게 대협이라 불리는 사람이 존중받는 것이고.
‘구양우경 말대로 대협이 된다는 게 답답한 일이긴 해.’
북궁천은 쓴웃음을 지으며 일행과 함께 정문으로 다가갔다.
정문 위사들 중 북궁천과 태극문 제자들을 아는 무사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범상치 않아 보이는 자들이 다가오자 표정이 굳어졌다.
삼성궁에 찾아오는 무사는 대부분 두 부류다.
궁도가 되기 위해서 오는 사람. 그리고 친구나 아는 사람을 찾아온 사람.
그런데 척 봐도 둘 중 어느 쪽도 아닌 듯했다.
잔뜩 굳은 그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북궁천 일행을 막아섰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북궁천이 먼저 몇 번이나 미리 연습해 둔 대답을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술술 말했다.
“궁주님을 뵈러 왔소.”
“궁주님을?”
“안에 계시오?”
“궁주님께선 지금 궁내에 계시지 않소.”
북궁천도 모르지 않았다. 구양환은 지금쯤 천사교와의 싸움 때문에 연합 세력과 함께 있을 테니까.
그럼에도 물어본 것은 처음부터 기선을 잡기 위해서였다.
“아쉽군. 그분을 직접 뵙고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무슨 일 때문이 그러시는 거요?”
“아마 말해도 귀하는 잘 모를 거요. 그럼 현재 삼성궁을 총괄하시는 분은 어느 분이오?”
“구양신걸 대장로께서 궁주님을 대신해 궁을 이끌고 있소.”
웅천검(雄天劍) 구양신걸이라면 궁주인 구양환의 숙부다. 대화할 상대로 적당했다.
“그래요? 그럼 그분을 만나 뵈어야겠군요.”
“대장로님을?”
삼성궁에 있을 때 아기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구양환이 헌원려려에게 아기가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숨겼다는 뜻.
그래도 구양신걸이라면 알 듯싶었다.
“가서 말씀드리시오. 서문려려 소저 때문에 왔다고 하면 대충 짐작하실 거요.”
정문 위사는 철벽처럼 서 있는 북궁천 일행을 슬쩍 훑어보더니 경계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오?”
“나? 단화린.”
구양신걸에게 단화린이 찾아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 것은 두 단계의 보고 체계를 거친 후였다.
경비 총책임자인 무호당주 조곽은 단화린이라는 이름을 듣고 화들짝 놀라서 구양신걸에게 득달같이 달려갔다.
구양신걸 역시 보고를 듣고 흠칫했다.
“단화린이 찾아왔다고?”
“예, 대장로!”
단화린은 삼성궁의 위명을 땅에 처박은 자다. 손자인 구양우경을 병신으로 만들고 검신가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자.
그 일을 생각하면 당장 뛰쳐나가서 목을 쳐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감정대로 움직이기에는 그에 대한 소문이 너무 거창했다.
조카인 궁주가 남긴 말도 있고.
‘궁주는 단화린이 오면 싸우지 말고 즉시 연락하라고 했다. 그럼 궁주는 그가 돌아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단 말인가?’
구양신걸은 구양환이 남긴 말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조곽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서문려려와 관계된 일로 왔다고 합니다, 대장로.”
“서문려려는 그가 데려갔다고 하지 않았는가?”
“혹시 서문려려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 아닐까요?”
구양신걸도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다.
서문려려에게 이상이 생기면 만인의 피로 중원이 붉게 물들 거라는 엄포를 놓고 떠났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온 것 같진 않았다.
“아냐, 그랬다면 굳이 나를 만날 것도 없이 당장 날뛰었을 게야.”
“그럼?”
구양신걸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는 내가 만나 볼 테니, 너는 지금 즉시 사람을 보내서 궁주께 단화린이 왔다는 사실을 알려라.”
“예, 대장로.”
“그자에 대해서 함부로 떠들지 않도록 입단속 잘 하고, 검선당 아이들을 대기시켜 놓도록 해.”
“알겠습니다.”
구양신걸은 호위무사 넷을 거느리고 북궁천 일행이 있는 객당으로 갔다.
그가 거느린 호위무사는 다섯이지만, 암암리에 정예무사 오십여 명이 객당을 철저하게 둘러쌌다.
북궁천은 알면서도 모른 척 방 안에서 태연하게 구양신걸을 맞이했다.
북궁천의 뒤에는 장추람과 냉호, 철교신이 서 있고, 북풍사객과 태극문 제자들, 이조량은 방문 앞에서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호위무사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서던 구양신걸은 북궁천 뒤에 서 있는 세 사람에게서 산악을 무너뜨릴 것 같은 무거운 기도가 느껴지자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대단한 자들이군.’
그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북궁천 맞은편에 앉자, 호위무사들이 바로 뒤에 부채꼴 형태로 시립했다.
구양신걸은 앞에 놓은 찻잔으로 가볍게 입을 축이고,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자네가 단화린인가?”
“그렇습니다.”
“노부는 구양신걸이라 하네. 그동안 자네에 대한 말은 많이 들었지.”
딱딱한 목소리. 나직이 말하는 구양신걸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들으셨다면 손자 때문에라도 제가 반갑지 않으시겠군요.”
“솔직히 그런 마음도 없지 않네.”
“제가 잘못했다고 보십니까?”
“글쎄, 뭐라고 말하기가 좀 그렇군. 어쨌든 우경이가 잘못한 점도 있으니까.”
“잘못한 점도 있는 게 아니라, 잘못한 겁니다.”
구양신걸의 주름진 이마에 골이 깊게 파였다. 조금 가늘어진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치미는 화를 억지로 누르고 있는 듯했다.
“그래도 조용히 처리할 수 있는 문제였다고 보네. 많은 사람들 앞에 굳이 드러낼 필요는 없었지 않은가?”
“그럴 상황이 아니었지요. 어차피 천무회 일까지 겹쳐서 말입니다.”
“그것 역시 자네가 알아낸 일이라 알고 있네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서문려려를 데려가려고 일을 크게 벌였다는 말도 있던데. 정말 그 일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가?”
“검신가 쪽에서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군요.”
담담한 북궁천의 대답에 구양신걸은 내심 이를 갈았다.
하지만 먼저 화를 낼 수도 없어서 억지로 분노를 눌렀다.
“그런데 이상하군. 듣자 하니 이번에도 서문려려 때문에 왔다면서? 그녀는 자네가 데려가지 않았나?”
“데려갔지요. 그런데 다쳐서 정신을 잃는 바람에 정작 데려가야 할 사람을 데려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찾아온 겁니다.”
“데려가야 할 사람이 또 있단 말인가?”
“있습니다. 그것도 이곳에. 구양 궁주도 데려가도록 허락한 일입니다.”
구양신걸은 의아한 표정으로 북궁천을 바라보았다.
“궁주가 허락을 했다고? 누구를 데려가려고 하는데……?”
순간적으로 북궁천의 두 눈에서 서릿발 같은 한광이 번뜩였다.
“그녀의 아들, 진아입니다.”
“아들? 서문려려의 아들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이곳에 있다는 걸 다 알고 왔으니 발뺌하진 마십시오.”
구양신걸은 조금 전의 분노조차 잊은 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허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서문려려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더구나 그 아들이 본 궁에 있다니 말이야.”
“제 인내심을 시험해 보실 생각이 아니라면 순순히 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노부를 협박하겠다는 건가?”
기분이 상한 듯 구양신걸이 눈을 치켜떴다.
그러나 북궁천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냉랭히 말했다.
“협박이 아닙니다. 그녀의 아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글쎄, 노부는 그녀에게 아들이 있다는 말을 자네에게 처음 들었네. 그런데 알지도 못하는 아들을 내놓으라니?”
북궁천은 계속 부인하는 구양신걸을 노려보았다.
구양신걸의 눈빛은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빌어먹을. 숙부에게도 알리지 않았단 말인가? 그럼 아는 사람이 생각보다 더 적다는 말이군.’
그는 시간을 오래 끌고 싶지 않았다.
“정 모르신다면 제가 직접 영선원으로 가죠.”
“서문려려의 아들이 그곳에 있단 말인가?”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녀에게 직접.”
“허어어, 정말 알 수 없군.”
북궁천은 탄식하듯이 한숨을 내쉬는 구양신걸을 놔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라도 우리를 막을 생각이라면 그만두십시오. 공연한 피바람을 일으키고 싶지 않으니까.”
구양신걸도 인상을 쓰며 일어났다.
“뭐라? 우리 삼성궁이 그리도 우습게 보이는가?”
“막지만 않으면 아무 일 없을 겁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오만하구나!”
북궁천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구양신걸을 응시했다.
“오만이라…… 진짜 오만한 사람을 대해 보지 못한 것 같군요.”
“뭐야?”
구양신걸이 버럭 소리침과 동시에 뒤쪽에 서 있던 호위무사들이 검을 뺐다.
차차창!
“감히 대장로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그 때였다.
“그대들이 나설 자리가 아니다!”
냉랭히 일성을 내지른 북궁천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화아아악!
가공할 무형지기가 부챗살처럼 퍼지면서 호위무사들을 덮쳤다.
순간, 호위무사들이 철벽에 부딪친 것처럼 튕겨 나갔다.
퍼버버벅!
“크윽!”
“헉!”
구양신걸은 숨이 턱 막혔다.
자신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고서 호위무사 다섯 명을 튕겨 낸 북궁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