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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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5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06화
106화
“말이 빠른 아이는 돌이 되기 전부터 웅얼거리며 엄마, 아빠 같은 말 몇 마디 정도는 합니다, 궁주.”
“그래? 그럼 지금은 말을 제법 하겠군.”
북궁천은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일행과 함께 배를 내렸다.
북궁천 일행이 송하진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하남과 섬서의 경계 인근에서 강호인들이 전쟁이나 다름없는 싸움을 벌여 시끄러운 상황이었다.
무기를 찬 무사들이 지나가니 신경이 쓰인 듯했다.
더구나 키가 큰 북궁천과 장추람, 표정이 싸늘한 냉호, 바위처럼 묵직하게 느껴지는 철교신, 차가운 눈빛으로 사위를 둘러보는 북풍사객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들이 객잔으로 들어갔을 때는 떠들어 대던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입을 다물 정도였다.
창가에 자리 잡은 그들은 요리를 주문하고 귀를 기울였다.
내려오면서 연합 세력과 천사교와의 전쟁이 격화되고 있다는 말을 듣긴 했으나, 진아에게 정신이 팔린 북궁천은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황하를 건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뭐든 알아 놓아야 했다.
그런데 객잔에서 식사를 하던 중 자신이 원하던 이야기가 옆에서 들려왔다.
북궁천은 귀를 쫑긋 세우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영진에서 패한 이후 천사교에 계속 밀리더니 서평까지 빼앗겼다는군. 이러다 삼성궁까지 밀리는 것 아닌지 모르겠어.”
“에이,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 모르는가? 화산과 종남이 본산에서 꼼짝 못 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네.”
“아무리 그래도 삼성궁까지 밀리려고? 천무회와 무림맹, 백검맹이 연합해서 상대하고 있는데 천사교가 버틸 수 있겠는가?”
“어허, 이 사람. 사천의 혈문(血門)과 섬서 서쪽의 마종보(魔宗堡)가 천사교와 손잡았다는 말을 듣지 못했나 보군.”
“그게 정말인가?”
“물론이지. 더구나 상주로 마도의 고수들이 몰려들고 있다는군. 그래서 천사교가 더 기세등등한 거네.”
북궁천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혈문은 사천에 있다는 마도문파로 오대마세(五大魔勢) 중 하나다. 태백산과 감숙의 경계에 위치해 있는 마종보 역시 오대마세 중 하나고.
천사교가 그들을 끌어들였다면 연합 세력의 현재 전력만으로는 상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의 승패가 아니다.
‘서둘러야겠군.’
정말 삼성궁이 당하기라도 하면 진아가 위험해질 터. 입안에 들어간 음식이 거친 모래처럼 느껴졌다.
그의 기분이 전염되었는지 이정한 등도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 * *
천사교의 공격이 시작된 것은 북궁천이 헌원려려를 데리고 황하를 건너갈 때였다.
협공에 당한 연합 세력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상남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그들은 서평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천사교에 맞섰다.
다행히 천사교는 더 이상 강력하게 공격하지 않고 겨울이 다 갈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팽팽하게 대치한 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천사교에 마종보가 가세했다.
마종보 칠백 무사가 합류하자 천사교는 마침내 대치를 깨고 공세에 나섰다.
정파 연합 세력도 화산과 종남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면서 힘을 보태 주었지만, 그 정도만으로는 천사교를 막아 내기에 역부족이었다.
결국 보름 만에 서평을 포기한 연합 세력은 서협 진원보에 힘을 집결시키고 적과 맞섰다.
하지만 사기가 충천한 천사교 무리는 시도 때도 없이 공격했다.
더구나 혈문마저 합류하자, 연합 세력은 서협조차도 내주고 후퇴해야만 했다.
백 리가량 후퇴한 그들은 삼성궁의 코앞인 내향(內鄕)에 배수진을 치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제 그 두 곳마저 빼앗기면 남양까지 무인지경이다. 하남의 그 어떤 문파도 안심할 수 없는 것이다.
삼성궁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긴장감이 감돌던 어느 봄날이었다.
내향에 있는 석검장(石劍莊) 회의실에 각파의 수뇌부가 모였다.
커다란 방 안에는 수십 명이 앉아 있는데도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칠 할은 속인, 삼 할은 승려와 도사였다.
삼성궁과 천무회, 무림맹, 백검맹 등의 간부들과 강호명숙들까지. 그야말로 내로라하는 강호 고수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숙연하다 못해 초상집에 온 사람들 같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관호명이 답답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더 이상 밀리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 분들은 없을 것이오. 놈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있는 분은 허심탄회하게 말해 보시오.”
그가 입을 열자 숨통이 트인 듯 여기저기서 헛기침 소리가 나왔다.
곧이어 이 사람 저 사람 의견을 내놓았다.
“조호이산지계가 별겁니까? 적의 수장을 끌어내서 척살합시다.”
“고수들로 특공대를 꾸려서 천사지존을 몰래 살해하면 어떻겠습니까?”
“공성계를 펼쳐서 서협을 비운 척하고 적을 끌어들인 다음 포위해서 몰살시키는 겁니다. 제 생각이 어떻습니까?”
제법 그럴 듯한 의견들이었다.
하지만 세부적인 계획은 뒷받침되지 않은 채 말만 앞설 뿐이었다.
그렇게 반 각가량 중구난방으로 말이 오갈 즈음, 백검맹 쪽에서 한 사람이 일어났다.
“솔직하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삼성궁 쪽에서는 기분 나쁘시더라도 조금만 참고 들어 주십시오.”
상당히 강하게 느껴지는 말투.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입을 닫고 그를 주시했다.
백검맹의 핵심 전력인 폭풍검대의 대주 주원호였다.
그는 사십 대 초반으로, 방 안에 각파의 수뇌부만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래도 젊은 축에 속했다.
그가 삼성궁을 들먹이자, 구양환이 별걱정 다 한다는 투로 말했다.
“걱정 말고 무엇이든 말해 보게.”
“감사합니다. 그럼 말씀드리지요.”
주원호는 구양환을 향해 포권을 취하고는 장내의 군웅 등을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연합 세력을 주도한 곳은 삼성궁입니다. 이곳이 삼성궁의 영역이니 그에 대해선 토를 달 생각이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동안 모든 작전을 총괄하고 의견을 모아 최종 결정을 내린 군사에 대해섭니다. 위 대협께서 잘 이끌어 오긴 하셨습니다만, 더 이상은 무리라는 생각입니다. 좀 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위 대협의 능력으로 현 상태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입니다.”
위효릉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까지 자신이 계획한 작전이 몇 번 실패한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실패한 적보다 성공한 적이 훨씬 많았다.
물론 서협까지 밀린 것에 자신의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보다는 무사들의 책임이 더 크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건방진 놈! 제 놈이 뭘 알아서?’
그럼에도 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순순히 주원호의 질책을 받아들였다.
“허허허, 죄송하외다. 이 위 모도 책임을 통감하고 있소이다.”
구양환도 이마를 찌푸렸지만, 대놓고 주원호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진 않았다.
“그 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군. 하지만 위 군사는 그동안 많은 공을 세웠네. 한두 번 실패했다고 해서 그 공을 무시해서는 안 될 거네.”
“당연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공을 무시하자는 게 아닙니다. 지난겨울과 달리, 적은 천사교에 혈문과 마종보가 합류한 상태입니다. 그들에게 위 군사의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군사를 내세워서 전체적인 작전 방식을 바꿔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그 말에 관호명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주원호를 바라보았다.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라도 있는가?”
“백선수사 유원당 대협이라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흠, 선유원의 유 원주라면 나도 조금 알지. 학식과 병법에 매우 뛰어난 분이라고 하더군.”
그런데 등조립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본인도 모르지 않네. 하지만 그는 큰 싸움을 지휘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 아닌가? 일천이 넘는 무사의 목숨이 걸려 있는데, 그에게 전권(全權)을 맡긴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처럼 느껴지는군.”
선우명도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그렇지요. 대군을 움직이는 것은 단순히 병법에 밝아서만 되는 일이 아니외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그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말은 등 대협의 말씀이 맞는 것 같구먼.”
“하긴 공부와 실전은 다른 법이지.”
그 때 조용히 앉아만 있던 조관수가 한마디 했다.
“아직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구양환이 미간을 좁히며 반문했다.
“뭘 말이오?”
“유 원주는 젊었을 적에 손가락 하나로 십만 병력을 움직여 본 사람이외다.”
“…….”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방 안이 고요해졌다.
조관수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십칠 년 전에 황군이 섬서의 태평대회전에서 배가 넘는 적 병력을 큰 손해 없이 무찌르는 대승을 거둔 적이 있지요. 당시 총지휘권자가 바로 유 원주입니다. 석 달에 걸친 그 싸움에서 너무 많은 사람이 죽자, 전쟁에 환멸을 느끼고 젊은 나이에 낙향해서 선유원에 자리 잡았지요.”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경악해서 조관수를 바라보았다.
조관수가 이런 자리에서 헛소리할 리는 없을 터. 삼성궁 사람들은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다면 경험에 대해선 더 따질 것이 없구려.”
관호명이 묵직한 어조로 말하고는 좌중을 돌아다보았다.
“관 모는 주 대주의 의견에 찬성이오. 반대하는 분 있으시면 말씀해 보시지요?”
천무회로선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삼성궁이 군사직을 넘겨준다면 그만큼 그들의 입지가 약화된다.
거기다 유원당이 전황을 유리하게 되돌릴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백검맹도 찬성이오.”
백검맹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부맹주 태산검옹 백화청도 찬성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무림맹의 장로들이 하나둘 찬성을 표했다.
“빈승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오.”
“빈도도 찬성하겠소이다.”
“본 가주도 장로들과 같은 생각이오.”
구양환은 속이 끓었지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허허허, 유 원주의 능력이 그토록 뛰어나다면 내 어찌 반대하겠소이까? 본 궁주 역시 군사직을 유 원주에게 맡기는 것을 찬성하겠소이다. 단, 당장 위 각주를 군사직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너무나 큰 손실이라 생각하외다. 그러니 유원당을 총군사로 하고, 위 각주 역시 군사직에 놔두고서 그의 경험과 학식을 유용하게 활용했으면 싶소이다.”
관호명도 그것까지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것도 좋은 생각입니다, 궁주.”
* * *
황하를 건넌 지 이틀째 되던 날 밤.
북궁천 일행은 삼성궁에서 오십 리 떨어진 협성에 도착했다.
마을은 크지 않았지만 사냥꾼과 약초꾼을 상대하는 객잔이 두 곳이나 있었다.
그들은 그중 대호객잔에 방을 얻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방에 모이자, 잔머리 잘 굴리는 동호량이 제법 조리 있게 말했다.
“구양 궁주는 대형이 북천마제의 명을 받고 헌원 소저를 데려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헌원 소저의 아들이 대형, 그러니까 북천마제의 아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순순히 내주면 좋지만 그러지 않을 경우도 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부분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북궁천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당장 눈을 부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