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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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3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02화
102화
“정말 말하지 않을 생각이냐?”
“부탁드리겠습니다, 의원님.”
방곡추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는 헌원려려를 착잡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그녀의 몸은 뇌의 혈맥이 막히기 이전부터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 문제는 스승조차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깊이 숨어 있어서 자신도 그녀가 깨어난 후에야 눈치챘다.
아마 자신조차도 남들과 다른 방식의 의술을 익히지 않았다면 몰랐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자신이 그 사실을 북궁천에게 알리려고 하자,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전부터 자신의 몸에 이상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정확한 것은 알지 못했겠지만.
‘그래서 아기가 절맥증에 걸린 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아기를 낳으면서 더 심해졌을 수도 있고.
어쨌든 더 큰 문제는, 자신조차도 당장은 해결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약을 꾸준히 먹고 희망을 버리지 마라. 희망이야말로 그 어떤 영약보다 명약이니까.”
“예, 의원님. 고맙습니다.”
한편, 북궁천이 밖으로 나갔을 때는 사람들이 이미 모두 모여 있었다.
방곡추를 부르네, 어쩌네 하는 사이 모두들 사정을 들은 터였다.
염구악은 ‘저런 숙맥도 아기를 만들 줄은 아는구나.’ 하는 마음이었고, 태극문 제자와 이조량은 대형에게 아기가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설레었다.
자신들에게는 조카가 있다는 말이니까.
북궁천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태극문의 세 제자와 이조량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이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동안 천조혈심기로 경맥을 정화해 준 후 크게 신경 쓰지 못했던 북궁천은 그들의 변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이제 그럭저럭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겠군.”
네 사람은 그 말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했다.
이정한이 힘차게 공수의 예를 취하며 허리를 숙였다.
“앞으로는 두 사람, 세 사람 몫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대형!”
북궁천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고 염구악을 바라보았다.
“수고하셨수.”
“그동안 저놈들에게 어찌나 시달렸던지 삭신이 다 쑤시네. 나도 이제 늙긴 늙었나 보군.”
염구악이 이정한 등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투덜댔다.
심심풀이로 도와주려다가 밑천까지 털린 그였다.
그래도 싫은 기분은 아닌 듯 대견해하는 마음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 때 공손설이 운봉사 승려들이 있는 불전에서 나오며 환한 표정을 지었다.
“오빠, 가마가 있대요.”
“정한, 아우들과 함께 가서 가마를 가져와라. 우리가 다녀올 동안 려려를 철군성에서 쉬게 해야겠다.”
“예, 대형.”
태극문 제자와 이조량이 가마를 가지러 불전 쪽으로 달려갔다.
그 때였다.
저 아래쪽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와하하하하! 궁주! 저희가 왔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많이 들어 본 목소리.
북궁천의 신형이 죽 늘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절벽 쪽으로 다가가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일곱 명이 절벽을 평지처럼 밟으며 올라오고 있었다.
“저것들이 어떻게?”
북궁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먼저 커다란 덩치가 보였다. 복장은 북천에 있을 때와 확연히 달랐지만 몇 번을 봐도 장추람이었다.
그리고 냉호와 철교신, 마제의 직속 호위인 북풍사객이 그와 함께 산을 오르고 있었다.
* * *
“북천의 주인이신 마제를 뵙습니다!”
장추람과 냉호, 철교신, 북풍사객이 절도 있게 무릎을 꿇으며 예를 올렸다.
북천의 복장이 아닌 중원의 복장. 나름대로 준비를 철저히 하고 온 듯했다.
“일어나.”
북궁천은 그들이 일어난 후에야 툭 쏘듯이 물었다.
“어떻게 찾았어?”
장추람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가 손 놓고 있을 줄 아셨습니까?”
“일 년 후에 돌아간다고 했잖아. 그것도 못 기다려?”
“저희가 누굽니까? 궁주님이 무슨 생각을 가졌는지 모를 줄 알았습니까? 여차하면 돌아오지 않을 생각 아니었습니까? 그렇죠?”
“흥, 너희가 아니라 그 백여우가 눈치챘겠지.”
가릉효, 그라면 자신의 마음을 눈치채고도 남을 사람이다.
아마 이들을 보낸 것도 그일 것이 분명했다.
“그 여우가 보냈느냐?”
“예, 궁주. 궁주님이 용천보를 지나서 황하를 건넜다는 걸 알고 군사가 사람을 풀어 두었습죠. 그런데 궁주님이 다시 황하를 건너와서 면산에 머물고 계신다는 연락이 왔지 뭡니까? 그래서 군사가 급히 저희를 보낸 겁니다.”
“왜? 내가 도망갈까 봐?”
장추람이 커다란 손을 휘휘 저었다.
“설마요? 그냥 궁주님을 공손히 모시고 오라는 명령이었습죠.”
“그런데 셋을 다 보내? 거기다 사객까지?”
그 말에 냉호가 항상 그렇듯이 냉랭하게 대답했다.
“군사가 오죽하면 우릴 보냈겠습니까, 주군? 이제 그만 가시죠.”
“아직 못 가.”
“헌원 소저, 아니, 주모님께서 아직 안 나으셨습니까?”
그것까지 아는 걸 보니 전부 다 알고 온 것 같다.
하긴 가릉효가 오죽 철저한 사람인가?
하지만 자신은 정말 갈 수 없었다.
“정신은 차렸다. 그런데 아직 갈 수 없어.”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정신을 차리셨으면 곧 나으시겠죠.”
“안 돼. 아직 할 일이 있어.”
“저희가 하겠습니다.”
“중원으로 다시 가야 돼.”
장추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중원에는 왜? 설마 그들에게 빚진 거라도……?”
“아니. 내 아들을 찾아야 돼.”
순간, 장추람과 냉호, 철교신, 북풍사객은 눈만 멀뚱멀뚱하게 뜨고 북궁천을 바라보았다.
아들이라니?
북천궁을 떠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아들이 있단 말인가?
그들 중에서 제일 눈치 빠른 냉호가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혹시…… 주모님을 보내실 때, 일 저지르신 거 아닙니까?”
북궁천이 멋쩍게 씩 웃었다.
“그래, 그때 생겼나 봐.”
그 때 공손설이 다가와서 장추람 등을 둘러보며 눈을 반짝였다.
북궁천이 힐끔 그녀를 보고 건성으로 소개했다.
“이 꼬맹이는 공손설이라고, 철군성 성주의 막내딸이야.”
공손설이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공손설이에요. 오빠의 동생이죠.”
그녀는 그 짧은 틈에 ‘오빠의 동생’이라는 위치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쪼끄만 게 보통 여우가 아니야. 자네들도 조심해.”
장추람 등은 놀람과 동시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북천에 사는 그들도 철군성에 대해선 귀가 따갑게 들어 보았다.
산서제일세. 산서의 제왕!
그런데 그 철군성 성주의 딸과 오빠 동생 하는 사이라니.
더구나 꼬맹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무척이나 친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말이다.
‘꼬맹이치고는 너무 큰데?’
‘혹시 오빠 동생이 아니라……?’
‘그럼 주모가 둘인가?’
이러나저러나 나쁘지 않았다.
철군성주의 딸이라면 북천마제의 배필로 모자라지 않았다.
부인이 둘이라면 꼬장꼬장한 사대원로도 대환영일 것이다.
하나보다는 둘이 자식을 많이 볼 수 있을 테니까.
* * *
면산을 내려온 북궁천 일행은 빠르게 남하했다.
장추람 등도 아기를 데리러 가는 길에 동행하기로 했다.
가마는 북풍사객이 멨는데, 그들은 구름 위를 떠가듯이 달리며 가마의 흔들림을 최대한 줄였다.
그들은 한 시진쯤 달린 후 분하(汾河) 가에서 잠깐 휴식을 취했다.
북궁천이 태극문 제자들과 이조량을 북천궁 사람들에게 소개한 것은 그때였다.
“내 아우들이긴 한데, 너희들과는 관계없는 일이니 부담 가질 것 없다. 아우들도 그 점 잊지 말고.”
이정한 등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흑룡 장추람, 한룡 냉호, 비룡 철교신.
북천궁의 네 기둥이라는 북천사룡 중 세 사람과 한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도 영광이었다.
나이도 그들이 한두 살씩 많았다. 장추람이 스물아홉, 냉호와 철교신이 스물여덟.
“예, 대형!”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반면 장추람 등은 태극문 제자들과 이조량이 궁주를 대형이라고 부르는 게 탐탁지 않았다.
궁주가 부담 갖지 말라고 했지만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대단치 않아 보이는 자들이다. 강호에서는 고수 소리를 들을지 몰라도 자신들 눈에는 차지 않는 그저 그런 자들.
북풍사객에 비해서도 모자라 보이고.
그런 자들이 마제의 아우라니!
‘심심해서 거두어들인 자들인가?’
‘잡일을 시키려고 거둔 사람들인가 보군.’
‘그냥 수하로 삼으시면 될걸, 왜 아우로 삼으신 거지?’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동안의 일을 북궁천에게 들으면서 조금씩 마음이 변했다.
“저 친구들이 정말 서너 달 전에는 일반 무사 정도밖에 안 되었단 말입니까?”
북궁천의 이야기를 듣던 장추람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다섯 달 전에는 평범한 무사였지.”
“그런데 그동안 실력이 늘어서 절정고수가 되었다, 그 말입니까?”
“맞아.”
“에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북궁천이 쓱 고개를 돌려 장추람을 노려보았다.
“추람, 너 그동안 간이 많이 부었다? 내 말을 믿지 않다니 말이야.”
흠칫한 장추람이 급히 변명했다.
“그게 아니고 말입니다. 솔직히 누가 들어도 황당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내가 그렇다고 하면 믿어야 하는 거 아냐?”
철교신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저는 궁주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봐, 교신은 믿잖아?”
“저도 믿습니다.”
“냉호도 믿고. 왜 너만 안 믿는데? 한번 해보자는 거야?”
장추람은 냉호와 철교신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배신자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는 마제의 아우라는 사실을 완전히 수용할 수 없었다.
북궁천이 헌원려려와 떠나올 당시의 일을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죽을지도 모르는데 나서더군. 솔직히 나도 놀랐어. 걱정도 되고.”
장추람의 눈이 커졌다.
“주모를 지키기 위해서 겨우 그 실력으로 중원의 절정고수들과 맞섰단 말입니까?”
“그래, 그 바람에 심하게 부상을 당했지. 그러고도 오히려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더군. 자신들이 약해서 려려가 다쳤다고. 그때부터 죽어라고 수련을 하더니 이 정도가 된 거야.”
냉호가 슬쩍 이정한 등을 쳐다보았다.
네 사람의 얼굴에 쑥스러워하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쓸 만한 자들이군.’
철교신도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들이군. 주군의 마음을 얻을 만해.’
마제의 아우로는 모자랄지 몰라도, 자신들의 친구로 지내기에는 괜찮을 듯했다.
“자, 그만 쉬고 가자. 철군성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북궁천은 지리에 관해 통달한 사람처럼 자신 있게 말하며 일어났다.
이정한 등도 기다렸다는 듯 일어섰다.
그들을 바라보는 장추람과 냉호, 철교신, 북풍사객의 눈빛이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져 있었다.
* * *
북궁천 일행이 운봉사를 떠나자, 방곡추와 육대기도 침매곡으로 돌아갔다.
중간에 약재를 가지러 한 번 가고 꼭 한 달 만에 돌아간 침매곡에는 두 사람이 기거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삼십 대 중반의 텁석부리였고, 한 사람은 사십 대로 보이는 중년인이었다.
그들은 방곡추와 육대기가 근 한 달 만에 돌아왔는데도 마치 어제 떠났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대했다.
두 사람이 희귀 약초나 영물을 구하기 위해서 두어 달씩 돌아다닌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멀리 다녀오셨나 봅니다, 당 형?”
“운봉사에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