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3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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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6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38화
138화
칠순이 다 된 나이답지 않게 단단하게 느껴지는 체구, 회색빛 눈동자, 은연중 사람의 마음을 짓누르는 기도를 지닌 노인이었다.
회안마존(灰眼魔尊) 방철산.
천사팔노의 수좌이며 천사교의 이인자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절대고수 셋 중 하나가 바로 그였다.
그가 나서자 오른쪽에 앉아 있던 노인도 한마디 거들었다.
“교주, 명령을 내리신다면 제가 가서 놈들에게 본 교의 위엄을 보여 주겠습니다.”
안색이 석회처럼 하얀 그는 천사지존의 호법 열둘을 지휘하며 교주의 말과 행동을 대신하는 천사총령 주서광이었다.
강호에서 백혈사신(百血死神)이라 불렸던 그는 특히 무림맹에서 이를 가는 자였다.
이십여 년 전 천사의 난 때 무림맹 장로 일곱을 암살해서 무림맹을 공황 상태로 빠뜨린 공포의 살수가 바로 그였던 것이다.
호연도광은 경쟁 관계인 두 사람의 말을 듣고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아들을 선봉으로 내세운 것은 이 기회에 아들의 입지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지금 당장 불러들인다면 그만큼 입지가 좁아질 터.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놔두기에는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단화린이라는 놈에게 곡 장로와 은 장로, 궁 호법이 죽었다. 고수 몇 사람 더해진다고 해서 해결될 상황이 아니야.”
호연도광은 일단 말을 돌렸다.
그의 말속에는 방철산과 주서광을 동시에 질타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곡대양과 은사종은 방철산 휘하고, 궁치는 주서광 아래에 있는 고수. 그들이 한 사람에게 죽었으니 상관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으로선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교주. 설마 그런 놈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너무 심려 마십시오, 교주. 반드시 제 손으로 놈의 목을 잘라서 교주께 바치겠습니다.”
당장 말하는 표정부터가 달라졌다.
말 몇 마디로 두 사람의 기를 자연스럽게 꺾어 놓은 호연도광은 가슴으로 늘어진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구양환이 북천마제의 아기를 이용해서 놈을 움직였다고 하더군. 그런데 유아가 그 아기를 빼돌리기 위해 사람을 파견했다고 하니 상황을 좀 더 지켜보고 결정을 내려야겠어. 지금쯤은 결과가 나왔을 것 같은데 말이야.”
내내 말없이 서 있던 키 작은 오십 대 초반의 문사가 입술 끝을 비틀어 사이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그가 바로 혈뇌와 함께 천사교를 움직이는 쌍뇌, 이교령 중 사교령인 사뇌(邪腦) 숙야돈이었다.
“소존께서 한 발 먼저 움직였으니 성공할 것입니다, 교주. 심려 마소서.”
그 때였다. 기다렸다는 듯 방문 밖에서 공손한 목소리가 들렸다.
“교주께 아뢰옵니다. 혈사령께서 소존의 전언을 가져오셨다 하옵니다.”
호연도광의 눈빛이 찰나간 번갯불처럼 번뜩였다.
“들어오라 해라.”
혈사령은 호연도광 앞에 엎드려서 최상의 예를 취했다.
엎드려서 두 손을 앞으로 뻗고 이마를 바닥에 댄 그는 느릿한 동작으로 몸을 반쯤 일으킨 후 입을 열었다.
“교주시여! 천사의 보살핌이 있어 소존께서 마제의 아이를 얻으셨습니다.”
호연도광의 입가에 가느다란 웃음이 걸렸다.
오랜만에 즐거운 소식이었다.
“아이는 어디에 있느냐?”
“상남에 있사옵니다.”
“이리 데려오지 그랬느냐?”
“단화린을 이용하려면 당분간 아기를 데리고 계시는 것이 나을 거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래? 흠, 어쨌든 잘된 일이야. 이제 단화린이라는 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그놈을 이용해서 정파 놈들에게 날벼락을 내리면 상황도 달라질 것이고 말이야.”
그 때 혈사령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교주시여, 소존께서 단화린의 정체를 알아내셨습니다.”
“정체?”
“소존께선 그가 바로 북천의 주인인 마제라 하셨습니다.”
호연도광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게 정말이냐?”
“소존께서 여려 각도로 생각해 보시고 내린 결론이온데, 속하에게 말씀하실 때에는 확신을 가지신 듯했습니다.”
“단화린이 북천마제 북궁천이란 말이지?”
“예, 교주.”
호연도광의 입에서 광기에 가까운 대소가 터져 나왔다.
“푸하하하하! 그거 정말 놀라운 소식이로구나.”
방철산과 주서광도 경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허어! 그럼 마제가 직접 아들을 찾기 위해서 왔단 말인가?”
“어쩐지 장로와 호법을 죽였다 했더니…….”
그 때였다.
웃음을 멈춘 호연도광의 두 눈에서 사이한 광채가 번뜩였다.
“하늘이 우리를 돕는군. 그만 우리 품으로 끌어들이면 정파 놈들은 심장에 비수가 꽂힌 셈이 될 거야.”
표정이 풀어진 그의 눈이 사뇌를 향했다.
“숙야돈, 상주에 들개들이 많이 몰려들고 있다면서?”
천사교가 금천장을 총단으로 삼으면서 종남과 화산을 비롯한 정파가 힘을 쓰지 못하자, 상주로 마도무사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천사교에 흡수되었지만 일부는 상주에 남아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동안 상관하지 않고 놔두었더니 땅따먹기를 하면서 티격태격하고 있사옵니다. 하온데 숫자가 급격히 불어서 한 번쯤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사옵니다.”
“개가 간이 커지면 주인도 몰라보고 이를 드러내는 법이니라. 곧 필요로 할 것 같으니, 때가 되면 바로 쓸 수 있도록 철저히 교육을 시켜 놓도록 해라.”
“예, 교주.”
6장. 전쟁에선 적과 친구만이 존재하는 법이다
서평의 정파연합은 활기가 넘쳤다.
밀리기만 하던 상황에서 서협과 서평을 되찾고 적을 상남으로 몰아냈다.
이제 곧 상남에 대한 공격을 시작할 터. 천사교를 고립시키고 무너뜨리는 것도 시간문제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사기가 하늘 끝까지 솟구칠 즈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유원당의 뒤통수를 쳤다.
“뭐? 아기가 철은보에 도착했다고?”
“상황으로 봐선 아무래도 가짜를 넘겨주고 진짜 아기를 놈들이 빼돌린 것 같습니다.”
유원당은 천사교에 잠입한 잠은각 정보원으로부터 긴급으로 전해진 소식을 천종원에게 듣고 표정이 바위처럼 굳어졌다.
천사교 놈들이 구양환처럼 아기를 인질로 북궁천을 이용하기라도 하면…… 그거야말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단화린은 지금 어디 있지?”
“아직 내향에 있을 겁니다.”
“그도 곧 알게 되겠군.”
“그럴 겁니다.”
천사교가 알려 줄 테니까. 이용하기 위해서.
“청아하고 기진이 밖에 있으면 들어와라.”
유원당이 밖을 향해 말하자 곧 황보청과 종리기진이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유원당의 말을 듣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맙소사! 정말 큰일이군요.”
“즉시 그에게 달려가라. 가서 어떻게 해서든 그를 진정시켜라. 쉽진 않겠지만, 감정을 최대한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아기를 찾게끔 만들어야 돼.”
황보청의 눈빛이 잘게 떨렸다.
“저희가 대형을 말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무조건 해야 된다. 몸을 던져서라도!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황보청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우. 알겠습니다,”
“빨리 가 봐.”
황보청과 종리기진을 북궁천에게 보낸 유원당은 천종원을 향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상남을 쳐야겠어. 각 세력 수뇌부를 긴급소집하게.”
“괜찮겠습니까? 놈들도 우리의 공격에 철저히 대비하고 있을 텐데요.”
“놈들이 정말 아기를 얻었다면 머뭇거릴 시간이 없네. 희생이 따르더라도 소존이 단화린을 이용하기 전에 상남을 뺏어야 해.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아직 그 사실을 말하지 말게.”
그 때 천종원이 머뭇거리는 표정으로 물었다.
“총군사, 만약 단화린이 천사교의 지시대로 움직인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유원당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는 마치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듯 형형한 안광을 번뜩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만약 그러한 경우가 발생한다면 나는 순리대로 행동할 거네. 전쟁에서는 적과 친구만이 존재하는 법이니까.”
긴급소집령이 떨어지자 정파연합 수뇌부가 웅성거리며 몰려들었다.
언제 어느 때 싸움이 벌어질지 모르는지라 모두가 긴장하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인지 천종원이 연락을 취한 지 일각이 지날 즈음에는 좌석이 거의 다 채워졌다.
“총군사,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소?”
관호명이 유원당의 얼굴을 보고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유원당이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을 천천히 둘러보고는 무게 있는 목소리로 답했다.
“강호의 마도무사들이 상주로 몰려들고 있다 합니다. 천사교가 그들을 움직이기 전에 한 발 먼저 상남을 칠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결정을 반겼다.
“그거 잘됐군. 승기를 잡았을 때 몰아붙여서 끝냅시다!”
“적절한 결정이외다. 기왕이면 상주까지 올라갑시다.”
그렇다고 모두가 찬성하는 것은 아니었다.
최근 들어 말이 별로 없던 구양환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연이은 격전으로 부상자가 삼백이 넘소. 일부 무사들이 가세했다 해도 그들을 제외하면 일천이 조금 넘는 인원이오.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오?”
구양은도 한마디 거들었다.
“노부 역시 같은 생각이네. 상남을 무너뜨린다 해서 적이 괴멸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피해가 커지면 적의 주력이 그 점을 노리고 뒤통수를 칠지도 모르는 일. 신중을 기해야 할 거로 보이네만.”
하지만 반대보다 찬성이 훨씬 많았다. 개중에는 불만이 섞인 말투로 반발하는 이조차 있었다.
“그럼 저들의 주력이 내려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러다 또 봄을 넘기면 저들에게 역습할 기회를 줄지 모릅니다. 이 싸움이 길어지는 것도 어떻게 보면 너무 느슨하게 대처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
특히 철군성의 진왕리는 괄괄한 성격답게 굵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툭 쏘듯이 말했다.
“사악한 놈들을 앞에 두고 이것저것 따질 것 뭐 있습니까? 깊게 생각할 것 없이 상남을 치고 봅시다.”
공원대사와 남궁원도 찬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타불, 그게 좋겠소.”
“본 가주도 찬성이오. 총군사께서 계획을 짜 보시구려.”
전체적인 의견이 공격 쪽으로 집중되는 틈을 이용해서 유원당이 못을 박았다.
“그럼 공격하는 것으로 알고 계획을 세워 보겠습니다. 돌아가셔서 언제든 출동할 수 있게 준비해 주십시오. 구체적인 계획은 출발 직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간을 찌푸린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위효릉이 넌지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아무리 빨리 공격한다 해도 내일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유원당은 담담히 답하면서 자연스럽게 좌중을 둘러보았다.
무의식중에 두어 사람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자 며칠 전에 들은 임강령의 말이 떠올랐다.
“의심 가는 사람이 한둘 더 있소. 확실한 증거를 잡기 전까지는 일절 모른 척할 거요. 총군사도 그리 아시고 사람들을 예의주시해 주시오.”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간자가 몇 사람 더 있다 해서 놀랄 것도 없었다. 상대는 사악한 계교로 무림맹을 와해시킨 천사교가 아닌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