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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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98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30화
130화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피 묻은 칼을 들고 있는 자만 봐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한 일이었다.
‘제기랄! 오늘 밤 염왕이 찾아왔군.’
마음 같아서는 수하들을 모조리 동원해서 죽든 살든 한판 벌여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들을 죽일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복수를 하겠다고 죽음을 불사할 마음은 더더욱 없었고.
자신이 왜 하찮은 수하들 때문에 목숨을 버린단 말인가?
분노를 억누른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뭘 처리해 달란 거냐?”
“눈치가 없는 자는 아니군.”
역주심은 입술을 깨물었다.
담담한 한마디에 온몸이 짓눌렸다.
도대체 저자가 누군데 입 여는 것조차 힘들 정도란 말인가?
“오늘 밤, 삼구통에 무사 셋이 들어왔다. 그중 하나는 보따리를 메고 있다. 그들을 찾아라.”
“우리가 왜 너의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이냐?”
“살기 위해서.”
염왕의 명령!
듣지 않으면 지옥이 펼쳐진다.
역주심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 때 철없는 몇몇이 화를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다.
“뭐 이런 미친 새끼가 다 있어?”
“주둥이를 찢어 주마!”
냉호가 한 걸음 앞으로 미끄러지는가 싶더니 번개가 번쩍였다.
일말의 자비도 없는 살수.
뛰쳐나온 자 셋이 거의 동시에 다리가 부러진 것처럼 풀썩 꼬꾸라졌다.
쓰러진 후에야 그들의 목과 가슴에서 피가 솟구쳤다.
역주심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다급히 소리쳤다.
“그만! 모두 물러서라!”
* * *
“바깥 공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흑미당 쪽에서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는데, 아무래도 우리를 찾고 있는 자들 소행 같습니다.”
마응초는 밖을 살펴보고 온 등주 지부의 교도에게 그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젖 때문에 시간을 너무 끌었어.’
죽을 끓이긴 했는데 아기가 도통 먹지 않았다. 별수 없이 늦은 시간임에도 산부를 찾아 나섰다.
그런데 산부가 아기와 단둘이 있어서 오지 않으려 했다.
어쩔 수 없이 은자 닷 냥을 내밀고 산부의 아기까지 함께 데려왔다.
그 바람에 시간이 이각 이상 소모되었다.
게다가 아기가 어찌나 많이 먹는지 탱탱하던 산부의 젖이 쪼그라들었을 정도였다. 당연히 그만큼 시간은 더 걸렸고.
“아기를 보따리에 싸라. 너무 지체했어. 한두 끼 굶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무슨 난리야?”
쉰 살가량의 곰보 중년인이 마응초를 흘겨보며 짜증 난다는 투로 차갑게 말했다.
염천마도(炎天魔刀) 구량.
호북 마도계에서 한가락 한다는 마도의 고수.
천사교의 팔대장로와 겨뤄도 별 차이가 없을 만큼 강자로 소문난 사람이 그였다.
그러나 독불장군 같은 성격 때문에 호연유나 사야승도 쉽게 다스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 때문에 지원대의 책임자로서 등주로 보내진 것이기도 했다.
마응초는 그의 말투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말없이 보따리에 아기를 집어넣었다.
‘곰보 새끼. 아기가 잘못되어도 너는 상관없다, 그거지?’
구량이 이끌고 온 자들은 최근 들어서 천사교에 들어온 자들이었다.
구량 외에도 모두가 강호 마도에서 절정고수로 이름을 날리는 자들.
하지만 천사교가 정파연합에게 밀렸다면 들어오지도 않았을 터. 마응초는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존께서 네놈들을 왜 보낸 줄 알아? 아기를 지키는 방패막이 역할을 하라고 보낸 거다, 이 멍청이들아.’
마응초가 속으로 그들을 비웃는데 보따리 속의 아기가 까르르 웃으며 그의 수염을 잡아당겼다.
‘이거 놔, 인마!’
수염에서 아기의 손을 잡아뗀 마응초는 자신도 모르게 측은한 표정으로 아기를 바라보았다.
아기가 마인 중의 마인이라는 천사교 사밀영의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너도 더럽게 재수 없는 놈이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젓고 아기의 혈도를 짚은 다음 천으로 아기의 얼굴을 덮었다.
그 때 기학태가 안으로 들어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준비가 다 됐네. 출발하세.”
“잠깐.”
마응초가 일어나는데, 구량이 갑자기 멈춰 세우더니 마응초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보따리를 이리 줘라. 아기는 우리가 데려가겠다.”
“무슨 소리요?”
마응초가 눈살을 찌푸리며 구량을 바라보았다.
구량은 독사눈처럼 생긴 찢어진 눈으로 마응초와 아기를 번갈아 보았다.
“아무래도 너에게 맡기기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럴 수 없소. 아기는 우리가 책임지기로 되어 있소. 잘못되면 결국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데 왜 귀하에게 건네준단 말이오?”
“너희들이 맡는 것보다는 우리가 맡는 게 더 안전하다는 걸 모르나?”
“뭐라 해도 넘겨줄 수 없소.”
“정말 상황 판단을 못하는 놈이군.”
마응초가 고집을 부리고 구량이 짜증을 내자 기학태가 나섰다.
“그 일은 가면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소. 흑미당까지 뒤집어 놓은 걸 보니 보통 놈들이 아닌 것 같소. 서두르시오.”
* * *
역주심은 한시라도 빨리 북궁천 일행이 떠나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선 그들의 부탁을 들어줘야 했다.
그는 자신의 집으로 몰려든 백여 명의 흑미당 당원들을 다그쳤다.
“자시경에 수상한 자들을 본 사람 없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자시가 되도록 잠에 들지 않은 사람은 많지 않다. 그때까지 잠을 안 자고 있던 자들이 할 일은 두세 가지 정도.
술을 처먹든가, 아니면 애기 만드는 작업 중이든가.
그도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는 취객들을 노리기 위해서 골목을 서성거리든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 사람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사통로로 지나가는 것을 본 것 같긴 합니다만…….”
“정확히 기억해 봐!”
“분명 합니다. 세 사람이었는데 보따리도 메고 있었습니다.”
“어디로 갔는지 알아?”
“그건 잘…….”
그 때 다른 사람이 주위 눈치를 보며 말했다.
“천복점 쪽으로 간 것 같던데요?”
천복점이라면 삼구통 서쪽에 있는 점쟁이 집이다.
평소 수상한 놈들이 오가긴 했지만, 번 돈의 일부를 흑미당에 착실히 바쳐서 건들지 않았던 곳.
그런데 그 의견을 뒷받침해 주듯 체구가 왜소한 청년이 넌지시 말했다.
“저, 조금 전에 옆집 오팔이 마누라가 그곳에 갔다 오는 것 같았습니다요, 당주.”
“오팔이 마누라가? 왜?”
“젖 나오는 여자가 필요하다고 해서…….”
그 말이 나온 순간, 북궁천이 홱 고개를 돌려서 물었다.
“천복점이 어디 있지?”
“저쪽…… 헉!”
북궁천은 체구가 작은 장한의 등덜미를 잡아서 하늘로 솟구쳤다.
장추람과 냉호도 곧바로 땅을 박차고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마당에 있던 흑미당원들은 세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이 꿈만 같았다.
흑미당 본거지에서 천복점까지는 오백 장 정도 되었다.
체구가 작은 청년을 든 채 지붕 위를 달려간 북궁천은 반의반 각이 되기도 전에 천복점 앞에 내려섰다.
속이 울렁거리고 정신이 멍해진 청년은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천복점을 가리켰다.
“저, 저깁니다요.”
동시에 북궁천의 곁으로 장추람과 냉호가 내려섰다.
그들은 내려서자마자 천복점의 지붕을 넘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 직후 임강령과 철교신, 조무성이 도착했다.
장추람과 냉호의 행동을 본 그들은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자네는 나와 함께 뒤로 가세.”
임강령이 조무성에게 나직이 말하고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조무성은 끈에 매달린 사람처럼 정신없이 임강령을 쫓아갔다.
북궁천은 그들의 행동에 관여하지 않고 정문을 향해 손을 저었다.
푸스스스.
도끼로 찍어도 쉽게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두 치 두께의 나무판이 가루로 변하면서 무너져 내렸다.
그 때였다.
집안에서 고함과 비명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웬 놈들이냐!”
“으악!”
“놈들을 막아!”
북궁천은 좌수 엄지로 목혼을 밀어 올리며 천복점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입구의 컴컴한 천장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뚝 떨어졌다.
기다렸다는 듯 북궁천의 허리에서 뻗어 나간 한 줄기 기운이 허공을 반원으로 갈랐다.
쩡! 서걱!
검과 사람이 동시에 두 동강 나며 피가 확 퍼졌다.
그사이에도 안쪽에서는 지속적으로 비명이 들렸다.
입구를 통과한 북궁천은 회랑으로 이어진 방을 뒤졌다.
대여섯 개의 방을 뒤졌지만 안은 이미 텅텅 비어 있었다.
그 때 안쪽에서 장추람이 외쳤다.
“주군! 비밀 통로가 있습니다!”
북궁천은 장추람이 소리친 곳으로 달려갔다.
방구석의 한쪽 벽이 무너져 있고, 무너진 벽 뒤에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장추람과 냉호가 그 앞에 서서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계단 아래쪽이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놈들이 빠져나가면서 무너뜨린 듯했다.
하지만 북궁천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서 서쪽을 수색한다. 비밀 통로가 끝없이 이어진 게 아니라면 어디론가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은 서쪽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방을 나온 그들은 서쪽으로 짐작되는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언제부턴가 하늘에서 부슬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 * *
아기를 호위하는 사람은 사밀영 삼조 셋과 오조 열 명, 추가로 지원 나온 고수 열 명까지 총 스물셋이었다.
그들은 대여섯 명씩 짝을 지어서 비밀 통로를 빠져나갔다.
하늘에서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밤거리는 비가 내리면서 음산함을 더했다.
그들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골목길을 몇 번 꺾어지며 빠르게 이동했다.
다행히 마주치는 자들은 없었다. 수상하게 느껴지는 자들도 보이지 않았다.
간혹 술에 취해서 쓰러져 있는 취객이 보이긴 했지만, 그런 자들은 하루에도 수십 명이나 골목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어서 신경 쓸 가치도 없었다.
골목을 빠져나온 그들은 수면을 헤치고 나아가는 무자치처럼 어둠 속을 흐르며 삼구통을 벗어났다.
그들이 지나간 뒤 얼마나 지났을까.
술에 절어서 한쪽 귀퉁이에 쓰러지듯이 기대 앉아 있던 술꾼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슬쩍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저만치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자들이 보였다.
취객은 한참 동안 곁눈질로 그들을 바라본 뒤 더 이상 삼구통에서 나오는 자가 없자 몸을 일으켰다.
좌우를 둘러본 그는 언제 취했냐는 듯 취향루로 달려갔다.
목표물을 발견하는 사람에게 주겠다고 한 은자 열 냥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흐흐, 그럴 줄 알았다.’
아기 납치범이란 놈들이 도주할 길은 정해져 있었다. 그중 가장 가능성 높은 곳은 서쪽 길. 하기에 정칠은 처음부터 서문 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부슬비가 내리는 어둠 속에서 박쥐처럼 움직이는 자들이 보였다.
상금 열 냥. 그 돈이면 한동안 돈 걱정하지 않고 지낼 수 있을 것이었다.
취향루를 향해 달려가던 정칠은 비 내리는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이 새처럼 날아내리자 화들짝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곧 앞에 나타난 사람들이 취향루에 왔던 사람이라는 걸 알고 빠르게 입을 놀렸다.
“놈들이 서쪽으로 빠져나갔습니다요.”
정칠 앞에 내려선 사람은 임강령과 조무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