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5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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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4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52화
152화
들리는 소문에 남패령은 마종보와, 서마련은 천사교의 고위 간부와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들이 절정고수 몇 명만 은밀히 보태 주어도 판도가 달라질 수 있었다.
게다가 상주로 몰려드는 마도고수들 중 유명한 자들을 포섭해서 귀빈으로 모시고 있다는 소문도 들렸다.
동마방도 그런 자들을 두어 명 포섭한 걸 생각하면 소문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자신들을 치기 위해서 손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럴 경우 동마방이 기댈 언덕은 천사교뿐. 자신도 천사교의 극단적인 교리를 좋아하진 않지만, 남패령과 서마련의 야욕을 사전에 차단하려면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르고 계집 하나에 얽매여 있는 꼴이라니.
‘빌어먹을!’
호양곽의 짜증이 슬슬 심해지는데, 바로 앞에 쓰러져 있던 자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삼십 대 중반의 장한. 그가 바로 북혈회의 핵심인 오당주 중 한 사람, 적수당주 영호신이었다.
“오가야, 지금이라도 풀어 주고 제대로 된 협상을 하자.”
“협상? 북혈회가 언제부터 우리 동마방과 협상할 만큼 컸지?”
“너희들도 이렇게 나와 봐야 좋을 게 없을 텐데?”
퍽!
호양곽이 발을 뻗어서 영호신을 걷어찼다.
“이 씨발놈아! 네가 뭘 모르는데, 우리 동마방은 북혈회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알아?”
콜록, 콜록!
두 바퀴 굴러간 후 기침을 뱉어 낸 영호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남패령이나 서마련과 손을 잡으면 너희도 안심할 수 없을 텐데?”
“손을 잡든 발을 잡든, 니들 꼴리는 대로 해. 기껏 해야 싸우기밖에 더하겠어?”
그 때 일 층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왔나 보군.”
호양곽은 고개를 돌려 일 층에서 올라오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키가 큰 젊은 놈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놈을 따라서 몇 놈이 더 올라왔다.
그런데 놈들이 다 올라오도록 자신이 원하는 계집은 보이지 않았다.
호양곽의 눈썹이 송충이처럼 꿈틀거렸다.
“계집은 왜 안 오고 네놈들만 온 거냐?”
스윽, 이 층을 둘러본 북궁천의 시선이 호양곽에게서 멈췄다.
“네가 호가냐?”
호양곽의 몸이 석상처럼 굳었다.
너무나 어이가 없다 보니 바로 대꾸도 하지 못했다.
“벙어리인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입이 열렸다.
“그 새끼, 길이가 길어서 토막 내면 다른 놈보다 두 토막은 더 나오겠군.”
북궁천이 피식 웃고는 슬쩍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잡아 와.”
장추람이 먼저 나섰다.
자신과 북궁천은 키가 비슷했다. 결국 북궁천에게 한 욕은 자신에게도 해당된다는 말이었다.
“어디 토막 내 보시지?”
그가 움직이자 좌우에 서 있던 동마방 무사 중 대여섯 명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냉호와 철교신, 북풍사객이 좌우로 퍼지며 그들을 정리했다.
우당탕! 퍽! 퍼벅!
“크억!”
“이 개새…… 켁!”
결국 호양곽도 나섰다.
“어디서 이런 씨발놈들이……!”
북궁천은 멀쩡한 탁자 쪽으로 가서 앉고는, 엽차를 따라 마시며 정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생각보다 제법인데?’
호양곽을 봄으로써 상주에 있는 마도세력의 힘을 대충 유추할 수 있었다.
연소랑은 호양곽이 동마방의 핵심고수 중 하나라 했다. 일수 일수에 흐르는 기운을 보니 절정 경지를 밟아 본 고수다.
거기다 싸워 본 경험이 많은 듯 불필요한 동작이 일체 배제된 공격은 한 수 위의 고수라 해도 막아 내기가 쉽지 않아 보일 정도다.
실력만 그럴듯한 게 아니다.
장추람의 강력한 공격에 정신없이 밀리고 있지만 독기가 일렁이는 눈빛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저런 자가 열 명 이상이라면 강호 어디다 내놓아도 행세깨나 하는 세력을 이룰 수 있을 터.
문득 북궁천의 두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흠, 전부 합하면 제법 힘 좀 쓰겠는데?’
영월루의 이 층에서 벌어진 격전은 오래가지 않았다. 격전의 여파도 생각보다 심하지 않았다.
호양곽이 강하다 해도 장추람의 적수는 아니었다. 그의 수하들 역시 제법 날카로운 공격을 하며 맞섰지만 냉호와 철교신, 사객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장추람은 팔초 만에 호양곽의 손에서 칼을 날려 버렸다. 그러고는 적수공권이 된 그를 말 그대로 개 패듯이 두들겨 팼다.
오죽하면 쓰러져 있던 영호신이 질려서 혼신의 힘을 다해 한쪽으로 피신했을 정도였다.
그사이 냉호 등도 흑운대 무사들을 모조리 바닥에 눕혔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영월루 이 층.
널브러진 사람들이 교체되었다. 숫자도 더 많아졌고.
“더 맞기 싫으면 대형 앞까지 기어가.”
호양곽은 제법 끈질겼다. 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구부러지기는커녕 오히려 장추람을 노려보는 눈에 힘을 줬다.
“퉤! 죽여, 씨발놈아.”
장추람은 씩 웃으며 그를 냅다 발로 찼다.
퍽!
떼굴떼굴 구른 호양곽의 몸이 북궁천 앞에서 멈췄다.
북궁천이 엎드리다시피 널브러져 있는 그를 보고 오른발을 들어서 가볍게 바닥을 굴렀다.
쿵!
엎드려져 있던 호양곽의 상체가 세워지더니 무릎을 꿇은 형태가 되었다.
북궁천은 호양곽을 내려다보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이야기할 자세가 되었군.”
호양곽은 정신이 없었다.
뼈가 욱신거릴 정도로 두들겨 맞고 충격을 받아서 손발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허공섭물에 능한 고수라면 자신의 몸을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방금 자신의 몸을 무릎 꿇린 거력은 그러한 단순한 능력과 차원이 달랐다.
그는 지금까지 이런 경우를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세상에 독심마도(毒心魔刀)의 의지마저 짓눌러 버리는 가공할 패력이 존재할 줄이야!
앞에 있는 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는 안간힘을 다해서 고개를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북궁천이 물었다.
“연소랑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인 건가?”
“그렇다.”
“동마방주가 시켰겠지?”
끄덕끄덕.
“곧 그녀가 올 거다. 너는 지금부터 그녀에게 변명할 말을 생각해 놓아라.”
하지만 호양곽은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연소랑이 도착한 것이다.
북혈회 무사 십여 명과 함께 이 층으로 올라온 그녀는 벌어지려는 입을 간신히 다물고 북궁천에게 다가갔다.
‘맙소사!’
동마방 흑운대 무사 이십여 명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영호신을 비롯해서 살아남은 북혈회 무사 여섯은 탁자 다리를 기둥삼아서 기대고 한쪽에 앉아 있었는데,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북궁천 일행이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이 가지 않은 듯했다.
연소랑은 북궁천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호양곽을 바라보았다.
동마방에서 상대하기 가장 까다롭다는 독심마도가 복날에 두들겨 맞은 개꼴이 되어 있었다.
“이제 네 맘대로 해. 죽이든 살리든.”
북궁천이 반쯤 입을 벌리고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연소랑의 마음에 갈등이 일었다. 호양곽의 생사 때문이 아니었다. 북궁천이 말한 대가 때문이었다.
‘달라고 하면, 눈 딱 감고 한 번 줘?’
그만큼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나서야 마음을 진정시키고 호양곽을 노려보았다.
“호 대주, 동마방이 오늘 일에 대해서 사과하고 충분한 배상을 한다면, 나는 아직도 협상할 마음이 있어. 죽은 사람들 때문에 화가 나서 이판사판 대가리 깨질 때까지 싸우고 싶은데, 그래 봐야 남 좋은 일만 시켜 줄 것 같거든? 어떻게 생각해?”
또랑또랑한 목소리, 걸걸한 말투.
호양곽의 눈이 연소랑을 향했다.
숱하게 말을 듣긴 했지만 연소랑과 직접 대면해서 말을 나눈 적은 처음이다.
얼굴은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정도인데 말하는 투가 일반적인 여자와는 많이 달랐다. 그런데 그 말투에 가식이 섞이지 않아서 시원스럽게 들렸다.
묘한 매력.
방주가 왜 천방지축 같은 연소랑에게 관심이 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협상을 하려면 다른 사람하고 해라. 나는 이제 자격이 없으니까.”
“왜? 한 번 져서?”
“보면 모르냐? 이렇게 깨진 놈이 가서 협상이 어쩌고저쩌고하면 방주가 순순히 받아들일 것 같아?”
“하긴 그 땅딸보 방주 성격에 가만두지 않겠지.”
호양곽의 표정이 묘하게 비틀렸다.
대놓고 동마방주를 땅딸보라 부르는 연소랑이다. 그렇게 동마방주를 부르는 사람은 처음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들으니 커 보이던 동마방주가 왜소하게 느껴졌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 같지도 않은 자를 보고 눈이 높아진 건가?
입맛이 써진 그는 죽음을 각오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아들었으면 이제 죽여.”
“나도 확 목을 잘라 버리고 싶어. 그런데 동마방하고 전쟁을 벌이고 싶진 않거든?”
연소랑은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말하고 북궁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단천, 당신 생각을 말해 봐.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그 말을 들은 북궁천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손을 펴서 수평으로 그었다.
‘헉!’
호양곽은 눈앞이 깜깜해지면서 숨이 턱 막혔다.
상대의 손짓을 따라 허공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것 같은 느낌.
당장 자신의 목이 몸과 분리될 것 같은데도 손끝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그 때였다.
부스스스스.
그의 정수리에서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머리를 묶은 끈이 끊어진 것이다.
“나 먼저 갈 테니 뒤처리는 네가 해.”
북궁천은 볼일 다 봤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몸을 돌렸다.
“추가적인 대가는 나중에 이야기하지.”
멀뚱히 서 있던 연소랑이 그 말에 화들짝 놀랐다.
‘진짜로 그걸 바라는 거 아냐?’
* * *
“이런, 바보 같은 놈!”
퍽!
일장을 얻어맞은 호양곽은 일 장을 날아간 뒤 떼굴떼굴 굴렀다.
“멍청한 새끼! 데려오라는 연소랑은 데려오지도 못하고, 그깟 놈들에게 두들겨 맞아서 방의 위신을 똥통에 처박아?”
다섯 자가 겨우 넘을 것 같은 땅딸막하고 통통한 사십 초반의 중년인이 씩씩거리며 욕을 퍼부었다.
그가 바로 동마방 방주이며 연소랑을 품지 못해 안달하고 있는 귀살부 악동초였다.
겨우 몸을 일으킨 호양곽은 일절 변명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채 처분을 기다렸다.
“내가 너 같은 놈을 믿은 게 잘못이었어. 이름도 없는 놈들 하나 상대하지 못하고 오뉴월 개처럼 두들겨 맞는 놈에게 흑운대를 맡겼으니 남패령이나 서마련 놈들이 우리를 얕보지.”
흑운대는 악동초가 맡긴 게 아니다. 호양곽이 인원을 하나하나 골라서 직접 만들었지.
그는 그렇게 고른 무사 서른여섯을 단련시켜서 흑운대를 동마방 최강의 전위무사대로 키웠다. 이후 크고 작은 싸움에서 십여 명이 희생되긴 했지만, 세운 공으로 따지면 다른 어느 곳보다 컸다.
그리고 남패령과 서마련이 동마방을 얕보는 것은 호양곽 때문이 아니라 악동초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도 반론을 펴지 않았다.
“방주, 진정하십시오. 호 대주가 그동안 세운 공을 봐서라도 그 정도로 용서해 주시지요.”
한쪽에 서 있는 삼십 대 후반의 중년인이 악동초를 달랬다.
호양곽은 그가 조금도 고맙지 않았다.
그는 혈운대주 풍단이란 자로 평소 호양곽의 성장을 질시하며 사사건건 흑운대의 행사를 방해했다.
그러기에 호양곽은 그가 지금 자신의 몰락을 은연중 즐기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마지막 기회를 주마, 호양곽. 이틀 안에 어떻게든 그놈들을 처리해서 처박힌 본 방의 위신을 세워라! 실패하면 네놈을 개밥으로 던져 줄 테니 그리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