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7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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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1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79화
179화
호연도광의 반응은 서찰을 보낼 때부터 예상했던 일. 그럼에도 그가 서찰을 보낸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서찰을 본 그들은 자신이 초조해하고 있을 거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다 두 번째 서찰을 보면, 크게 인심 쓰듯 시간 여유를 주며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기다릴지 모른다.
서찰에 생각해 볼 시간을 하루만 더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으니까.
또한 답을 받자마자 얼마 안 돼서 서찰이 전해지면, 천사지존과 숙야돈은 자신이 곡천 일대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생각할 터. 그것만으로도 서찰을 보낸 목적은 달성되고도 남았다.
아니나 다를까, 숙야돈이 자비라도 베풀 듯 천사지존의 뜻을 전했다.
“마지막으로 하루의 시간을 더 준답니다.”
은혜를 베푼다면서.
하지만 장추람은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북궁천이 그 말을 듣고 다음 말까지 들으면 미쳐 버릴지 모르니까.
장추람의 보고에 북궁천은 한없이 깊어진 눈으로 허공을 보며 물었다.
“그것뿐이냐?”
장추람은 머뭇거리며 북궁천의 눈치를 봤다.
“저, 그게…….”
“감추지 말고 다 말해 봐. 뭐든.”
“그때까지 복종하지 않으면…… 소군의 손가락을 하루에 하나씩 자른다고…….”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냉호와 철교신이 이를 갈았다.
“정말 개자식들입니다.”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들…….”
북궁천의 무심한 눈에서 새파란 눈빛이 번뜩였다.
숙야돈의 단독 결정이 아니다. 그는 천사지존의 말을 대신하고 있을 뿐.
‘흥! 마제가 힘만 세서 마제인 줄 알면 오산이다, 개도 안 먹을 놈들!’
그가 어깨를 펴고 눈을 들자, 수만 관 중압감이 방 안을 짓눌렀다.
“추람, 내가 누구냐?”
“북천의 주인, 마제십니다.”
“북천에서 마제의 분노를 사면 어떻게 되지?”
“멸(滅)! 십 리에 걸쳐 피바다가 펼쳐졌습니다.”
“그래, 한때는 그렇게 했었지. 추람, 놈들에게 마제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확실하게 보여 줘야겠다. 이번만큼은 려려가 말려도 내 뜻대로 할 거다.”
* * *
천공에 뜨거운 태양이 매달린 오후 무렵.
연풍척과 연소랑이 심각한 표정으로 마주앉았다.
“소랑아, 단천이 혹시 그 사람 아닐까?”
“제가 생각해도 그 사람 같아요.”
두 사람의 표정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품속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을 품고 있으면 아마 누구든 그런 표정일 것이다.
“아버지, 정말 그 사람이면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긴? 다른 방법이 없지 않느냐?”
이제 와서 고자질해 봐야 그 화가 북혈회까지 미칠 게 뻔하다.
고자질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만약에 한다면 말이다.
“그러게요. 그렇다고 동조해서 천사교와 정면 대결을 벌일 수도 없고…… 후우, 어쩌다 제가 저런 불덩이를 끌고 들어온 건지…….”
“손해 본 것은 없으니 네 잘못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
손해는커녕 동마방을 집어삼켰으니 엄청난 이득을 봤다. 결국은 두 손 탈탈 털고 떠나야 할 상황이 되긴 했지만, 이것저것 털어 내도 손안의 황금이 전보다 배는 되었다.
“아무래도 오늘 내일 안에 결판이 날 것 같다. 당장 처분하기 어려운 것은 맡겨 놓을 만한 사람을 골라서 대충 정리하고, 가져갈 것은 최대한 부피를 줄이도록 해라.”
“알았어요, 아버지. 그런데 간부들에게는 언제 이야기할 거예요?”
“밤에 해야지. 함께 갈 마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불만이 나오지 않을 만큼 떼어 줄 생각이다.”
“잘 생각하셨어요.”
북궁천의 정체를 의심하는 사람은 연씨 부녀만이 아니었다.
“씨발!”
적주원은 쌍소리를 내뱉으며 술잔을 연신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아무래도 그놈 같아. 그 자식이 마제니까 그렇게 세지.’
설마 했다. 마제나 되는 놈이 마도인들 속에서 노닥거릴 거라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그런데 오늘 아침 식사할 때였다.
―혹시 그 자식이 마제 아냐?
장난하듯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때부터 술만 마셨다. 여자들을 다 쫓아내고 혼자서.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결론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진짜면 어떡하지?’
천사교에 알리는 것은 싫었다.
그놈들은 자신을 마제와 한편으로 볼지 몰랐다. 설령 아니라 해도 그걸 핑계 삼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갈 놈들이었다.
‘조까, 그럴 순 없지.’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젠장! 나도 모르겠다. 굿이나 보면서 술이나 마시자.”
“잘 생각했소.”
“역시 그게 낫겠……?”
술김에 무심코 되묻던 적주원은 목뼈가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고개를 홱 돌렸다.
‘헉!’
바로 뒤에 그놈이 있었다.
단천, 마제로 의심되는 놈이.
“자, 자네 언제 왔는가?”
“방금.”
북궁천은 무심한 어조로 나직이 말하며 적주원의 맞은편 의자를 빼내고 앉았다.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신 거요?”
“술? 어, 그냥 고민할 게 좀 있어서…… 하, 하, 하. 그런데 무슨 일로 온 건가?”
“사람 좀 빌려야 할 거 같아서 왔소.”
“사람?”
“믿을 만한 사람으로 한 삼십 명쯤. 고수면 더 좋고.”
“무슨 일로 고수를 삼십 명이나……?”
“바람 잡을 사람이 좀 필요해서 그렇소.”
적주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단천이 정말 마제라면 대놓고 거부하기에는 너무 부담이 컸다.
“무슨 일인지 정확히 알면 안 될까?”
“힘든 일은 아니오. 달밤에 백 리 정도만 달려갔다 오면 되는 일이니까.”
“그냥 달려갔다 오기만 하면 된다고?”
“막는 놈들이 있으면 싸워도 상관없소.”
“그 막는다는 놈들이 천사교도인가?”
“그럴지도 모르오. 아닐 수도 있고.”
적주원은 안색이 몇 번이나 변하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솔직히 말하지. 우리가 아무리 상주의 패권을 잡았다 해도 천사교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네.”
“일인당 은자 삼백 냥씩 주겠소. 그 정도면 할 사람이 제법 많을 것 같은데. 싸우다 밀리면 도망쳐도 뭐라고 하진 않겠소.”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은자 삼백 냥은 적은 돈이 아니다. 직접적으로 천사교를 공격하는 것도 아니고, 바람 잡다가 최악의 경우에 싸움이 벌어지는 정도라면 서로 하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더구나 도망쳐도 된다고 하지 않는가?
아마 자신도 남패령주가 아닌 예전과 같은 신세였다면 얼씨구나 하며 나섰을 것이다.
“그래? 그럼 한번 맞춰 보지.”
“비밀 엄수는 굳이 강조하지 않겠소. 잘못하면 적 령주도 다칠지 모르니까.”
“나도 그 정도는 아네.”
잘못하면 천사교가 아니라 마제의 손에 먼저 죽을지 모르는 것이다.
그는 ‘자네가 마제지?’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맴도는 것을 꾹 참고 눌렀다.
아는 척하는 것도 죽을 이유로 충분했다.
“그래,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자세히 말해 보게.”
북궁천은 마저 설문을 만나서 적주원과 비슷한 이야기를 나누고 대원보를 나섰다.
단 하루 만에 엄청난 금액을 썼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진아를 구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 열 배라도 쓸 수 있었다.
어차피 자신의 돈도 아니니까.
* * *
석양이 지고 어둠이 밀려들 무렵, 장추람 등 북천궁 사람들과 노중문, 호영곽을 비롯한 흑운대 무사들이 하나둘 장원을 나와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불도 켜지 않은 방에 혼자 남은 북궁천은 어둠을 노려보며 감정을 무저의 끝까지 가라앉혔다.
그리고 방 안이 완전히 어두워졌을 때 밖으로 나갔다.
‘저 새끼가 어딜 가려고 나오는 거지?’
소이정은 목표물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듣던 대로 키가 컸다. 생긴 것도 그럭저럭 괜찮게 보이는데 자신보다는 못했다.
‘제길, 할아버지는 저런 놈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조사하라 마라 그러는 거야?’
속으로 투덜댄 그는 북궁천의 뒤를 밟았다.
어둠은 자신의 세상이다. 천하의 어느 누구도 어둠 속에서는 자신을 이길 수 없었다.
‘구석진 곳에서 작신 두들겨 패 버릴까? 아니면 목만 따 버려?’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 보니 기분이 조금 풀어졌다.
그런데 기분이 너무 풀어지다 보니 북궁천이 순간적으로 멈칫한 것을 보지 못했다.
북궁천이 누군가의 추적을 눈치챈 것은 한적한 골목길에 들어섰을 때였다.
‘누구지? 사교령이 보낸 자인가?’
그 기척이 너무 미미하고 대기 중으로 퍼진 기운도 느껴지지 않아서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뒤쪽을 탐색해 봤는데도 마땅히 추적자라 의심할 만한 어떤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누군가가 뒤따라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를 감시했던 어떤 자보다 뛰어난 은신술을 지닌 자가.
순간적으로 멈칫한 그는 자연스럽게 방향을 틀어서 낡은 벽돌로 지어진 집을 돌아갔다.
소이정은 목표물이 건물을 돌아가자 재빨리 따라가서 벽에 붙었다. 그리고 목표물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내밀었다.
그 때였다.
‘어?’
소이정의 눈이 한껏 커졌다.
건물을 돌아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목표물이 없는 것이다. 따라온 시간은 그야말로 눈 한 번 깜박일 시간에 불과했거늘.
‘어디 갔지?’
“나를 찾나?”
‘으헉!’
갑자기 바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기겁한 소이정은 번개처럼 돌아서며 얼음판 위를 미끄러지듯 옆으로 흘렀다.
키가 큰 목표물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목표물에게 뒤를 허용하다니!
외조부가 알았으면 밤새 두들겨 맞을 일이었다.
그는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즉시 무영환밀공을 펼쳐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개자식, 감히 나를 놀라게 하다니!’
그러잖아도 뿌옇게 보였던 자가 어둠 속으로 녹아들듯이 사라지자, 북궁천의 눈빛이 싸늘하게 번뜩였다.
“신기한 재주를 지닌 놈이군.”
그는 어둠 속을 향해 쌍장을 뻗고 원을 그렸다.
어둠이 둥글게 말리면서 호수 위의 파문처럼 퍼져 나갔다.
“헉!”
어둠 속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찰나, 북궁천이 우장을 쭉 뻗으며 건곤패력장을 펼쳤다.
후우웅! 퍽!
회오리치던 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튕겨 나갔다.
북궁천은 승천무풍행을 펼치며 검은 그림자를 바짝 따라붙었다.
거센 충격을 받은 소이정은 숨도 제대로 못 쉰 채 급급히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따돌리기에는 북궁천의 움직임이 너무나 빨랐다.
퍼벅!
북두패왕권이 재차 어둠을 두들겼다.
“컥! 끄윽!”
강력한 충격에 무영환밀공이 깨진 소이정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그 와중에도 그는 북궁천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다해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이 장을 채 날아가기도 전에 가공할 압력이 허공에 뜬 그를 짓눌렀다.
“따라올 때는 네 마음대로 왔을지 몰라도 갈 때는 내 허락이 있어야 한다.”
머리 위에서 들리는 냉랭한 목소리에 안색이 해쓱해진 소이정은 품속에서 망혼비를 꺼내 허공을 그었다.
“까는 소리 하지 마, 개자식아!”
그야말로 필사적인 대항이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이 오히려 북궁천의 화만 돋우었다.
“독비?”
어둠 속에서 빛나는 푸르스름한 비수를 보고 북궁천의 눈빛이 서릿발처럼 차가워졌다.
가볍게 소이정의 공격을 피한 그는 검지를 뻗었다. 검지 끝에서 뻗어 나간 천조혈심기가 소이정의 손목을 휘감았다.
“으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