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7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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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9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72화
172화
오늘, 그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자라도 불러야겠어.’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지고 그곳에 힘이 들어간다. 여인을 죽기 직전까지 괴롭힐 때는 그토록 움직이지 않던 그곳이.
‘빌어먹을!’
아무래도 확실한 것 같다. 자신의 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여인이 아니다.
음혼혈마공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음혼혈마공 자체가 엄청난 음기를 지녔으니까.
어쨌든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본능적인 욕망을 거부하지 않기로 했다.
“잠령, 가서 정산을 데려와라. 만약 오지 않겠다고 하면…… 그동안 그가 한 짓을 모두 밝혀 버릴 거라고 해라.”
이제는 둘밖에 안남은 사사령 중 하나, 잠령의 눈빛이 암울해졌다.
호연유의 목적이 분노를 삭이기 위함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지만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오직 복종만이 있을 뿐.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예, 소존.”
‘아무래도 혈교령과 상의를 해 봐야 할 것 같군.’
사야승은 잠령의 말을 듣고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호연유에게 기괴한 취미가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전이었다면 그러려니 하며 넘겼을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우영산장에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총단에서 별다른 조치가 없는 상황이다.
왠지 불길했다.
“일단 너는 소존의 명령을 이행해라. 그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마.”
잠령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사야승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를 지그시 악물었다.
‘이럴수록 교주님의 신임만 잃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실망하고 계신지도 모르겠군. 안 되겠어, 나라도 살 방도를 찾아봐야지…….’
* * *
유원당의 암살 소식이 퍼진 뒤로 적산채의 분위기는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와중에도 무림맹 산하 문파에서 보낸 제자들이 꾸준히 도착해서 어느덧 무림맹 제자들만 해도 오백이 넘는다는 것이었다.
거기다 협의를 위해 싸우겠다며 몰려든 무사들까지 합하니 무사의 숫자가 총 이천에 이르렀다.
문제는 그들을 지휘할 지휘 체계가 확실하게 잡혀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무사들은 자신을 갈고닦으며 언제든 수뇌부의 결정이 나기만 기다렸다.
그렇게 분위기가 깊게 가라앉은 적산채에 생각지도 않았던 손님이 몰려온 것은 정오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적산채에 있던 정파연합 고수들은 그들을 보고 표정이 밝아졌다.
특히 철군성의 고수들은 누구보다도 그들을 반겼다.
적산채로 이어진 산길을 당당한 걸음으로 올라오는 무사 이백여 명. 그들은 다름 아닌 철군성의 무사들이었다.
“조카가 어쩐 일로 여기까지 왔는가?”
진왕리가 선두에 서서 올라오는 사람을 보고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철군성의 고수들을 이끌고 온 사람이 다름 아닌 철군성의 소성주, 사자신검 공손후였던 것이다.
“하하하. 진 숙부,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그런데 형님께서 조카를 보내 주시던가?”
“설아를 납치하려 한 놈들을 멀리서만 지켜보려니까 좀이 쑤시지 뭡니까? 그래서 철혈검대를 이끌고 달려왔지요.”
“어쨌든 잘 왔네. 안으로 들어가세.”
그 때 철군성 무사들 속에서 대뜸 욕설이 터져 나왔다.
“이놈아! 나는 보이지도 않느냐?”
진왕리의 눈이 더욱 커졌다.
“어? 형님은 왜 또 왔수?”
“왜 오기는! 설아가 어찌나 보채는지 견디다 못해서 도망 왔다!”
다름 아닌 염구악이었다.
사실 그는 공손설이 보채서 왔다기보다, 북천마제가 싸우는 것을 직접 보지 못하면 죽어도 후회할 것 같아서 따라온 것이었다.
철군성에서 대규모 지원무사가 도착하자 가장 큰 통나무집에서 회의가 열렸다.
무림맹과 삼성궁, 천무회, 백검맹, 철군성의 최고수뇌부들이 오랜만에 모두 참석했다.
공손후는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 앉았다.
“숙부, 총군사께서 불의의 일을 당했다 들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진왕리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살수가 잠입했네. 스물네 명의 호위무사가 지키고 있었는데도 속수무책이었지.”
“음, 충격이 크셨겠습니다.”
“우리가 너무 소홀했어. 과거 무림맹 장로들을 암살했던 백혈사신이 천사교에 있다는 걸 생각했어야 하는데 말이야.”
“그럼 총군사를 암살한 자가 백혈사신입니까?”
“암살자에 대해선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네. 침입한 방법이 소문으로 듣던 그의 수법과 비슷한 것 같아서 그리 생각하는 것뿐이지.”
“그럼 혹시 그의 제자가 아닐까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공손후는 대충 상황을 듣고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계속 이곳에 머물며 지켜만 보실 겁니까?”
기다렸다는 듯 등조립이 눈을 부라리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철군성의 지원군도 도착했으니 놈들을 칩시다! 놈들을 코앞에 두고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요? 하다못해 영서에 있는 놈들이라도 무너뜨려서 놈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 줘야 하지 않겠소?”
구양환을 밀어내고 삼성궁의 전권을 쥔 천군호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도 맞소. 인원이 많아지니 물자 지원에도 문제가 있고, 공격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을 것 같구려.”
그 말을 듣고 구양환이 눈빛을 번뜩였다.
“그 전에 지휘부를 새로 구성해야 하지 않겠소?”
선우명도 그의 의견에 맞장구쳤다.
“며칠 더 애도 기간을 가졌으면 좋겠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쯤에서 정리를 합시다. 비록 총군사에 비해 뒤떨어질지 몰라도 위 각주라면 충분히 우리를 이끌 수 있다고 봅니다만.”
“이 등 모도 선우 가주의 의견에 찬성이오. 사실 병법을 따지자면 위 각주도 어느 누구에게 떨어지지 않는 뛰어난 사람이외다.”
등조립과 구양환, 선우명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위효릉을 천거했다.
사공강후와 관호명 등 천무회 사람들은 마땅히 내세울 사람이 없기 때문인지 침묵을 지켰지만, 무림맹에선 새롭게 한 사람을 내세웠다.
“위 각주의 능력을 못 믿는 것은 아닙니다만, 여태까지의 싸움에서 드러났듯이 위 각주의 병법은 천사교와의 싸움에선 유난히 약세를 보였소이다. 해서 본 가주는 제갈상 아우를 추천하는 바요.”
공원 대사와 함께 무림맹을 대표하는 남궁원이 오랜만에 자신 있는 어조로 말했다.
뒤늦게 합류한 무림맹 고수 중에는 제갈세가의 사람도 있었다. 그중 제갈상은 제갈세가 내에서도 기문진식과 병법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다.
구양환과 등조립도 제갈상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당장 반박하지 못했다.
누가 뭐라 해도 제갈세가는 아직까지 중원제일의 군사 가문이었다. 그중에서도 현의수사(賢義修士)라는 별호로 유명한 제갈상이 거론되자 반박할 말이 없었다.
대신 구양환이 대안을 내놓았다.
“험, 그럼 쌍두체제로 가는 것은 어떻겠소? 군사가 둘이면 혼란이 올 수 있지만, 인원이 이천에 이르는 터라 어차피 함께 움직이는 것이 힘든 상황이오. 그러니 각자 병법을 펼치며 경쟁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소만.”
등조립과 선우명을 비롯한 삼성궁 사람들 중 다수가 그의 의견에 찬성했다.
천군호는 무엇 때문인지 입을 다문 채 듣기만 했고, 백화청과 조관수 등 백검맹 사람들 역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제갈상을 천거한 남궁원은 거부하지 못하고 일단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백리 대협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때까지도 입을 다물고 있던 백리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대답에 앞서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왠지 기이한 행동이었지만 무거운 분위기 탓인지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잠시 허공을 바라보던 그가 어느 순간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 아무개도 반대하지는 않겠소. 단, 둘보다는 셋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오. 대립된 의견이 나와서 맞설 경우 아까운 시간만 흐를지도 모르니, 신속한 결정을 위해서라도 중재할 사람이 하나 더 있어야 하지 않겠소?”
“누구 추천할 사람이라도 있소?”
“중재를 하려면 어느 쪽에도 기울어지지 않은 사람이어야 하오. 또한 사리판단이 빠르고 전체적인 상황을 보는 눈도 있어야 하오. 해서 나는…… 공손 공자를 추천하고자 하오.”
의외의 말에 사람들의 눈이 백리진과 공손후를 오갔다.
그 때 임강령이 백리진의 의견을 거들었다.
“저도 찬성입니다. 공손 공자는 철군성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위치에 있는 만큼 대세를 잘 판단할 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별호는 사자신검이지만, 어렸을 적에는 현무공자라 불릴 정도로 지혜가 뛰어나다 들었습니다. 현재 상황에서는 가장 적절한 인선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느 누구도 반대 의견을 내놓지 못했다.
공손후가 무공과 학식을 겸비했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진 바였다.
더구나 그는 실질적으로 철군성을 움직이는 차대 성주. 그만큼 무게감도 있었다.
본인이 반대한다면 모를까, 그만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저희 천무회도 찬성하겠습니다.”
사공강후가 천무회 대표로 찬성했다.
그러자 천군호도 백리진의 의견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험, 공손 공자라면 괜찮을 것 같구려. 우리 삼성궁도 그 의견을 받아들이겠소.”
공손후는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해서 백리진의 청을 사양하려고 일어났다.
그런데 그 때 백리진의 전음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말하겠네. 일단 받아들이게나.
그 바람에 그는 어정쩡한 상태에서 포권을 취했다.
“이거 참…… 말씀을 들어 보니 저만 편하겠다고 사양하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군요. 여러분들이 그리 말씀하시니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정파연합은 말 세 마리가 마차를 이끄는 묘한 형국이 된 채 천사교를 공격하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그로부터 반 시진가량 지났을 때, 황보청과 종리기진이 헐레벌떡 도착했다.
그리고 진평천이 보낸 사자가 이각의 차이를 두고 적산채에 들어섰다.
* * *
아침이 되자 상주 곳곳에 마제를 부르는 방문이 붙었다.
소문은 조양장에 있는 북궁천 일행에게도 전해졌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장추람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냉호와 철교신 역시 침중한 표정으로 북궁천을 바라보았다.
전날 저녁 늦게 북궁천에게 들었음에도 막상 그런 방문이 붙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북궁천이라 해서 어찌 마음이 편할까?
하지만 그는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버려 둬. 개 짓는 소리에 신경 쓸 것 없다.”
“그러다 소군께 정말 못된 짓을 저지르기라도 하면 어떡하시려고요?”
“그럼 당장 달려가서 사정하랴?”
“아뇨, 그런 것이 아니라…….”
“아직 이삼 일의 시간이 남았다. 그리고 놈들도 함부로 그런 짓을 할 수 없을 거다. 날 끌어내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뿐이야.”
장추람 등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북궁천이 누구보다 속이 탄다는 것을 그들이 어찌 모를까. 어쩌면 태평한 저 말투도 자신들을 안심시키려고 그러는 것일지 모른다.
남들은 잘 모르지만 마제가 생각보다 잔정이 많다는 것을 그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정신 차리지 못하게 몰아붙여야 할 것 같다. 그래야 놈들도 진아에게 신경 쓸 틈이 없겠지.”
북궁천의 그 말을 듣고 냉호가 눈치를 보면서 물었다.
“그러다 천사교주가 분노하기라도 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