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7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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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0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71화
171화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목숨을 버려 가면서까지 홍무수와의 의리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사, 살고 싶소.”
“좋아, 그럼 저쪽으로 가서 차분하게 이야기 좀 해 보자고.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니까.”
* * *
설문을 금천장으로 보낸 지 반 시진.
느긋이 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던 홍무수는 갑자기 방문이 열리자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감히 허락도 없이……?”
고개를 돌려 방문을 바라보던 그는 흠칫하며 찻물을 흘렸다.
“자네가 어떻게?”
북궁천은 느긋한 자세로 다가가며 담담히 말했다.
“뭐 하나 가져갈 게 있어서 말이오.”
“가져갈 거라니? 그보다 왜 자네가 들어오는데 아무 말도 없었지?”
“괜히 소란을 피울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말하지 말라고 했소.”
“허어, 그랬나? 그래, 뭘 가져가겠다는 건가?”
그사이 북궁천이 홍무수와의 거리를 열다섯 자로 좁혔다.
홍무수는 찻잔을 내려놓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 짧은 순간에 홍무수는 북궁천이 다시 찾아온 이유를 찾아냈다.
설령 자신이 잘못 생각했더라도 모험을 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가져가려는 것은…….”
홍무수는 북궁천이 막 대답을 하려고 하자, 의자에 앉은 채 바닥을 박차고 뒤로 날아가며 소리쳤다.
“죽여라!”
순간, 천장이 쩍 갈라지며 네 줄기 섬뜩한 광채가 북궁천을 향해 쏟아졌다.
북궁천은 아는지 모르는지 홍무수만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
“네 염소대가리야.”
그는 냉랭히 말하며 양손을 좌우로 휘둘렀다.
퍼버벅! 따당! 쾅!
쏟아지던 섬광이 벼락처럼 터져 나가며 사방으로 튀었다.
그를 암습했던 자들은 벽에 처박히고, 천장으로 튕겨 나가고, 바닥에 처박혔다.
한 사람은 목이 괴이하게 꺾였고, 한 사람은 부러진 검날이 심장에 박혔고, 한 사람은 가슴이 뭉개졌고, 한 사람은 머리 한쪽이 함몰되었다.
단숨에 암습자를 처박은 북궁천은 어느새 홍무수의 앞에 다가가 있었다.
의자를 팽개치고 벌떡 일어나던 홍무수는 멀찌감치 있던 북궁천이 거짓말처럼 코앞에 나타나자 겁에 질린 표정으로 양손을 뻗었다.
“가까이 오지 마!”
찰나였다.
쉬쉬쉬쉭!
그의 양손 소매 속에서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뭔가가 쏘아졌다.
그것은 바늘처럼 가느다란 암기로, 홍무수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구명의 무기로 사용하는 절명침(絶命針)이었다.
팔뚝에 장착된 절명침통 하나에는 세 치 길이의 침이 모두 이십 개씩 들어 있었는데 극독이 칠해져 있었다.
홍무수는 자신의 공격이 성공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이 뻗은 손에서 떨어진 거리라고 해 봐야 다섯 자. 그 거리에서 절명침을 피한다는 것은 신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했다.
아니나 다를까, 시퍼런 빛을 발하는 절명침 중 다수가 상대의 가슴을 파고드는 게 보였다.
“낄낄낄낄, 건방진 놈.”
홍무수는 긴장을 풀고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단천이라는 놈의 실력은 정말 대단했다. 자신을 비밀리에 지키는 사귀를 단숨에 물리치다니.
하지만 그런 놈도 자신의 암수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내 머리를 가져간다고? 죽일 놈이 감히 어디서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는 거냐?”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
독이 퍼지기 전에 가까이 가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놈이 발악을 할지 모르는 것이다.
그 때 뭔가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툭.
그 소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연이어서 들렸다.
투두둑.
홍무수의 눈이 자연스럽게 바닥을 향했다.
바닥에 떨어져서 굴러가는 것은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는 침이었다.
바로 자신이 쏜 절명침.
“이게 어떻게……?”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끝이 무뎌서 옷을 뚫지 못하고 살에 박히지 않은 것이 몇 개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쏜 절명침은 사십 개. 열 개만 제대로 박혔어도 독 때문에 곧 쓰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쯔쯔쯔, 다음에는 침을 더 뾰족하게 만들라고 해야겠군.”
그런데 떨어지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어느덧 바닥에 떨어진 침의 개수가 스무 개를 넘어섰다.
홍무수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이 사라졌다.
그는 방어 자세를 취한 채 슬그머니 뒤로 발을 뺐다.
정통으로 맞은 개수가 적다면 아직 움직일 힘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컸다.
“흥, 교활한 놈. 내가 가까이 다가가기만 기다렸군.”
그제야 북궁천의 입이 열렸다.
“하는 꼴 좀 더 구경하려고 했더니, 시간이 아까워서 안 되겠군.”
그는 자신의 앞섬 자락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후두둑!
옷자락에서 튄 시퍼런 빛이 홍무수를 향해 날아갔다. 살갗을 뚫지 못하고 옷자락에 꽂혀 있던 절명침이었다.
“헉!”
대경한 홍무수는 입을 쩍 벌리며 몸을 틀었다.
그러나 옷자락에서 튄 절명침의 속도는 절명침통 속의 용수철에 의해 발사된 것만큼이나 빨랐다.
옷을 대충 털어서 몇 개는 그의 몸을 벗어났지만 대여섯 개가 그의 몸에 박혔다.
“크으윽! 아, 안 돼!”
덜덜 떨며 급히 옷을 벌리고 절명침을 빼내는 홍무수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했다.
몸에 박힌 여섯 개의 침을 모두 빼낸 그는 급히 벽 쪽으로 가더니 벽에 걸린 족자를 떼어 냈다. 호랑이가 그려진 족자는 은자 오십 냥이나 주고 산 값비싼 작품이었지만 지금은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찢듯이 족자를 떼어 낸 그는 벽에서 튀어나온 둥근 돌 다섯 개를 빠르게 눌렀다.
그르르르릉.
벽 일부가 한쪽으로 밀려나며 서랍이 나타났다.
그는 그중 맨 아래쪽 서랍을 떨리는 손으로 열고 그 안에서 작은 자기병을 꺼냈다.
그 안에는 절명침에 묻은 독의 해독제가 들어 있었다.
해독제를 그에게 판 자는, 그것이 비록 완벽한 해독제는 아니나 그래도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는 살고 싶었다.
그런데 북궁천이 그 모습을 보고 손을 뻗었다.
거리가 이 장이나 되었는데도 홍무수의 손에서 자기병이 빠져나와 북궁천의 손으로 날아왔다.
홍무수가 덜덜 떨리는 손을 뻗으며 간청했다.
“제, 제발 그 약을 주게.”
북궁천은 자기병의 뚜껑을 열고 기울여서 환으로 된 약을 손바닥에 쏟았다.
해독제는 모두 다섯 알이었다.
홍무수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그 해독제를 북궁천이 모두 복용하려는 줄 알았다.
“사, 살려 주게, 단천. 많이도 필요 없네. 이 늙은이를 불쌍히 여겨서 그중 하나만 주게.”
“내가 해독제를 주면 당신은 뭘 줄 건데?”
“뭐, 뭐든 주겠네. 제바아아알…….”
“믿어도 될까?”
“무, 물론이네. 그러니 어서 그 약을…….”
북궁천은 옆에 있는 탁자 위의 문방사우에서 종이를 펼쳤다.
벼루에는 조금 전에 홍무수가 서찰을 쓰며 갈아 놓은 먹물이 아직도 마르지 않은 상태로 고여 있었다.
그는 붓에 먹을 묻혀서 홍무수에게 내밀었다.
“써.”
“뭘……?”
“서마련의 모든 것을 설문에게 넘긴다고 쓰면 돼. 왜, 쓰기 싫어? 뭐든 준다며?”
“그, 그게…….”
“아직도 모르겠나? 이 난리가 났는데도 사람들이 왜 안 들어오는지 알아?”
“그, 그럼 설문이……?”
“너는 이미 끝났어, 홍무수.”
홍무수는 처연한 표정으로 붓을 받아 들었다.
“쓰면 해독제를 줄 건가?”
“나는 누구처럼 약속을 어기지 않아.”
모든 것을 포기한 홍무수는 떨리는 손으로 간단하게 북궁천이 부른 내용을 적었다. 굳이 길게 쓸 것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었다.
빠르게 글을 적은 그는 북궁천을 올려다보았다.
“어, 어서 해독제를 주게.”
북궁천은 해독제 한 알을 건네주었다.
홍무수는 해독제를 입안에 털어 넣고 두어 번 씹은 다음 침으로 삼키고는, 급히 가부좌를 틀고 약기운을 북돋기 위해 운기했다.
그사이 북궁천은 홍무수가 쓴 글을 대충 훑어보고는 벽의 서랍으로 갔다.
삼단으로 된 작은 서랍 안에는 비단으로 된 주머니와 작은 함이 들어 있었다. 뭔지 알 순 없지만 비밀서랍에 들어 있다면 값싼 물건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오늘은 일당이 꽤 되는군.”
그는 내용을 확인해 보지도 않고 대충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서 손가락을 튕겼다.
거미줄 같은 천조혈심기가 운기하던 홍무수의 뇌를 휘저어 버렸다.
“끄어어어.”
홍무수는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눈을 부릅뜨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억울해하지 마. 약속대로 해독제는 줬으니까.”
일을 마친 그는 탁자 위의 서찰을 들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방문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가자 설문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그의 뒤에는 간부로 보이는 자들 대여섯 명이 서 있었다. 그들은 설문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초조한 기색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북궁천이 서약서를 설문에게 건넸다.
“이제부터 서마련은 그대가 책임져라. 방법은 그대가 알아서 해.”
“예, 공자.”
“명심해. 난 내 뒤통수 치는 놈을 아주 싫어해.”
설문이 어찌 모를까, 홍무수가 저 꼴이 된 것도 결국 그 일 때문인데.
“명심하겠습니다.”
9장. 삼두마차
해시 초.
연풍척과 연소랑은 금천장과 화정루, 대원보를 순회하고 돌아온 북궁천의 이야기를 듣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정말 그 방법밖에 없어?”
“이번에 동마방을 치면서 벌어들인 것 많지?”
“그럭저럭.”
“제법 괜찮은 무사들도 많이 끌어들였을 것이고.”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럼 더 망설이지 말고 내 말대로 해. 그 정도 자금과 인원이면 어디를 가더라도 괜찮은 문파를 세울 수 있으니까.”
“그래도 이만큼 크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데…….”
“더 욕심내면 그나마 얻은 것도 잃을 거다.”
연소랑이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북궁천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설마…… 우리가 떠나면 단천이 이곳을 장악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피식.
북궁천의 입술이 비틀리며 가느다란 조소가 그어졌다.
“누가 장악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 천사교가 이기면 천사교가, 정파가 이기면 정파가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침중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던 연풍척도 북궁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네. 아무래도 상주에서의 생활은 여기까지인 것 같군.”
그 때 북궁천이 묘한 표정으로 연풍척을 보며 말했다.
“정리를 해도 마땅히 갈 곳이 없으면 말하시오. 내가 괜찮은 곳을 소개해 줄 테니까.”
* * *
은은한 불빛이 낮게 깔린 방 안.
왠지 모르게 황초에서 타오르는 불빛이 붉게 느껴진다.
바닥에 흥건한 선홍빛 핏물
그 위에 벌레처럼 몸을 웅크린 채 쓰러져 있는 나신의 여인.
그리고 그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는 하얀 얼굴.
“치워라.”
호연유는 피투성이가 된 손을 닦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계집과 즐기면서 패배감과 분노를 가라앉히려 했다.
하지만 그러한 마음이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짜증만 깊어졌다.
급하게 구하다 보니 계집이 마음에 안 들기도 했고, 욕망이 쉽게 타오르지 않으니 마음이 급해져서 손을 너무 독하게 썼다.
그 바람에 불길이 타오르지도 않았는데 죽어 버렸다.
벌써 두 번째.
“제길, 다른 놈들하고 같이 즐겨야 제맛인데…….”
그를 즐겁게 하는 것은 고통스러워하는 여인들뿐만이 아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눈이 붉게 충혈된 늑대들의 광란에 가까운 몸짓도 그를 흥분케 한다.
극렬히 타오르는 쾌락의 불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여인들보다 미친 늑대들의 그 몸짓이 그의 쾌감을 절정으로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