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6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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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3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61화
161화
최근에 합류한 백선일존(白扇一尊) 여무경이 그걸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혹시 백혈사신이……?”
백혈사신이라는 말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남궁원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백혈사신의 표식은 아니외다. 아마 누군가가 흉내를 낸 것이 아닌가 싶소이다.”
“아미타불, 빈승 역시 백혈사신의 표식을 본 적이 있소. 저것은 그자의 표식이 아니오. 다만 호위무사들의 눈을 완벽히 속이고 침입한 거나, 대상을 죽은 줄도 모르게 죽인 수법만큼은 그자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구려.”
그 때 구양환이 침음을 흘리며 짐직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중요한 시기에 총군사가 암살을 당하다니…… 허나 지금은 암살자가 누구냐 하는 것보다 총군사의 죽음이 더 중요합니다. 즉시 비상회의를 열고 이 문제를 논의해 보기로 합시다.”
몇 사람이 구양환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말도 잘못된 것이 아니기에 바로 반박하진 못했다.
그중에서도 백검맹 사람들은 그 마음이 표정에도 드러났다.
특히 조관수는 마지막까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아무리 그래도 당장 그 일을 논한다는 것은 고인이 되신 총군사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소이다. 며칠이라도 시간을 갖고 애도를 한 후 생각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호명과 사공강후도 한마디씩 거들어서 조관수의 의견에 찬성했다.
“그 일은 이삼 일 지나서 충격이 가라앉으면 상의합시다.”
“그 정도라면 총군사께서도 서운해하지 않으실 겁니다. 오늘 당장 천사교를 공격할 것도 아닌데, 궁주께서 지나치게 서두르시는 것 같습니다.”
구양환은 사공강후의 말에 뼈가 들어 있다는 걸 느끼고 이를 지그시 악물었다.
‘건방진 놈! 감히 어디서…….’
그런데 선우명이 중얼거리며 또 한 번 그의 속을 긁었다.
“하긴 시신 앞에서 군사직을 논하는 것도 좀 그렇지요.”
‘이 사람이!’
구양환은 짜증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억지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모두의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합시다.”
“궁주,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마지막은 괄괄한 성격의 진왕리가 장식했다.
‘저 오랑캐 놈이!’
머리가 후끈 달아오른 구양환은 입을 꾹 다물고 진왕리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백리진과 임강령 등 군웅들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보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빌어먹을!’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천종원은 어느 정도 충격이 가라앉은 듯하자 입을 열었다.
“아직 조사해 볼 것이 더 남았습니다.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만, 일단 돌아가셔서 무사들이 흔들리지 않게 다스려 주십시오. 조사를 마치면 다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5장. 전야
“아가씨!”
공손설은 밖에서 들리는 시비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듣고 아미를 찌푸리며 일어났다.
“새벽부터 왜 이리 소란이야?”
방문이 열리더니 시비인 청청이 방정을 떨며 다급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빨리, 빨리요.”
“무슨 일인데 그래?”
“매실의 아가씨가 아프신가 봐요.”
공손설은 바람처럼 달려서 방을 나섰다. 청청의 눈에는 아가씨가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헌원려려의 방으로 들어간 공손설은 나직한 신음을 듣고 급히 침상으로 다가갔다.
침상 옆에서 헌원려려의 이마를 수건으로 닦아 내던 소소가 급히 옆으로 비켜섰다.
“언니, 왜 그래요?”
헌원려려의 창백한 얼굴이 땀이 맺혀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공손설이 소소에게 빠르게 말했다.
“빨리 가서 원 의원님을 데려와. 어서!”
그녀는 소소가 뛰어나가자 자신이 직접 헌원려려의 땀을 닦아 주었다.
얼굴은 창백한데 살은 손을 대면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언니, 아프면 안 돼요. 제가 오빠에게 혼난단 말이에요.”
그녀는 울상이 되어서 헌원려려의 귀에 속삭였다.
일각이 지날 즈음, 오십 대 나이의 의원이 소소에게 이끌려서 달려왔다.
성주의 건강을 전담하고 있는 원부선이었다.
그는 산서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뛰어난 의원이었다. 백미신의를 제외한다면 그가 산서 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이른 아침부터 부른 것이오, 설 아가씨?”
“빨리 언니의 몸 좀 봐 줘요. 계속 식은땀만 흘리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요.”
“비켜 보시구려.”
원부선은 헌원려려 바로 앞에 앉아서 손목을 잡고 진맥했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그는 곤혹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 이상하구려. 맥이 조금 약할 뿐 큰 이상은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좀 해 봐요, 의원님.”
공손설이 발을 동동 구르자 원부선이 가져온 함에서 침을 꺼냈다.
“일단 침으로 기혈을 다스려 볼 테니 한쪽에서 기다리시구려.”
원부선은 서른여섯 개의 침을 꽂고는 이각이 지나서야 빼냈다.
효과가 있는지 얼굴에서 나던 땀이 확연히 줄어들고 열도 내렸다.
지켜보던 공손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우. 고마워요, 의원님.”
그런데 원부선의 표정은 여전히 펴지지 않았다. 기혈을 다스리긴 했는데 왠지 모를 찜찜함이 앙금처럼 남았다.
잠시 헌원려려를 내려다보던 그는 고개를 돌려서 공손설에게 물었다.
“설 아가씨, 이 소저가 약을 꾸준히 복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직도 남았소?”
“예, 있어요. 소소야, 빨리 언니 약 좀 가져와!”
공손설이 소소를 향해 소리치자 소소가 한쪽에 놓인 약을 들고 왔다.
원부선은 그 약을 한참 동안 살펴보았다.
이틀에 한 번씩 헌원려려의 상태를 살펴보긴 했지만, 그동안 별다른 일이 없어서 맥을 살피는 정도였을 뿐이었다. 하기에 헌원려려가 약을 복용하는 걸 알면서도 건성으로 봤던 터였다.
그는 냄새를 맡고, 문질러 보고, 입에 넣고 씹어 보더니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눈치를 살피던 공손설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세요?”
“정말 이 아가씨가 이 약을 복용했소?”
“예, 맞아요. 무슨 약인데 그러세요?”
원부선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헌원려려의 치료에 대한 불가사의한 이야기를 모르지 않았다.
헌원려려를 치료한 사람은 백미신의의 제자인 방곡추.
그것도 막힌 뇌의 혈맥을 뚫었다고 했다.
단순한 그 사실만으로도 방곡추라는 자의 의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짐작 가고도 남았다.
그런 자가 약을 잘못 쓸 리는 없는 일.
“으음, 아무래도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일 같구려.”
“뭐가 잘못되었나요?”
“일단 내가 더 자세히 살펴보고 말해 드리리다.”
그 때 밖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공손설이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이정한을 비롯한 태극문 제자와 이조량의 목소리였다.
만약 북궁천도 왔다면?
헌원려려가 아프다는 걸 알면?
공손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일어나서 방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북궁천이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왔다면 제일 먼저 달려 들어왔을 텐데.
게다가 밖에서도 북궁천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공손설은 태극문 제자들과 이조량이 먼저 왔다고 하자 아쉬움이 컸다.
‘쳇, 아기 데리러 간 사람이 뭐 하느라고 여태 안 와?’
하지만 지금은 아쉬움을 털어놓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언니가 조금 아파요.”
이정한은 헌원려려가 아프다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였다.
“많이 아프십니까?”
“이제 좀 좋아졌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공손설은 이정한 등을 안심시키고 나서야 북궁천에 대해서 물었다.
“그런데 오빠는 왜 안 왔어요?”
“그게 저…….”
이정한이 착잡한 표정으로 헌원려려의 방을 바라본 뒤 전음을 보냈다.
―조용한 곳으로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공손설은 이정한의 말뜻을 눈치채고 매실에서 십여 장 떨어진 곳의 빈방으로 이정한 일행을 안내했다.
이정한은 그곳에서 사정을 모두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공손설은 섬섬옥수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움켜쥐고 눈을 파르르 떨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예, 소저.”
“정말 나쁜 사람이군요. 아무리 대의를 위해서라지만 삼성궁의 궁주라는 사람이 아기를 이용하다니.”
“대형도 그것 때문에 화가 무척 많이 나 있습니다.”
“그럼 정말로 소존이라는 자가 아기를 데려간 거예요?”
이정한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공손설은 주먹을 움켜쥔 채 정신없이 방 안을 오갔다.
그렇게 십여 번 왕복을 하더니 우뚝 멈춰 서서 이정한을 바라보았다.
“몸은 좀 어떠세요?”
“많이 나았습니다.”
말은 많이 나았다고 하지만 공손설이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동호량과 초강도 정상은 아니었고.
그나마 괜찮은 사람은 이조량뿐이었다.
“다른 분들은 남으시고, 이 공자님이 하남으로 가서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봤으면 좋겠는데요.”
그거야말로 바라던 바였다.
이조량도 그러고 싶었지만 북궁천이 반대하니 문제였다.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그런데 대형께서 뭐라고 안 하실지…….”
공손설이 보냈다고 해 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공손설이 그에 대해서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다.
“언니가 보냈다고 하세요. 그러면 뭐라고 못 하실 거예요.”
이조량의 표정이 환하게 펴졌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북궁천은 헌원려려의 말이라면 꼼짝 못 하니까.
이정한도 별 불만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따라가 봐야 짐만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곳에서 잔심부름하는 게 다른 사람을 돕는 길이었다.
물론 능소소와 함께 지내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
“그런데 헌원 소저께선 어디가 어떻게 아프신 겁니까?”
“확실치는 않은데, 그냥 기혈이 좀 끓어올랐나 봐요. 침을 놓았더니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휴우, 다행이군요.”
이정한 일행은 별일이 아니라는 말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물론 공손설 역시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원부선이 제때 침을 놓지 않았다면 헌원려려가 사경을 헤맸을지 모른다는 걸.
헌원려려가 깨어난 것은 한 시진가량 지났을 때였다.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공손설과 이정한 일행을 안심시키려 했다.
“오셨군요. 미안해요. 밤공기가 찬 것도 모르고 이불을 잘 덮지 않아서 병이 침범했나 봐요. 동생은 나 때문에 놀랐지?”
공손설은 뭔가 이상했지만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꼬치꼬치 캐물어 봐야 헌원려려만 힘들어질 뿐이었다.
“그래도 이만해서 다행이에요, 언니.”
“그러게.”
“오빠는 함께 오지 못했대요.”
공손설은 헌원려려가 묻기 전 미리 북궁천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구양환이 아기를 숨겨서 찾으러 갔다는 부분까지만.
헌원려려가 놀라서 그러잖아도 창백한 안색이 백짓장처럼 하얘졌다.
“그, 그게 정말이에요?”
이정한은 자신이 죄를 저지른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예, 소저.”
“사람이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구양환이 순순히 보내 주는 게 조금 이상하다 싶었더니 그런 술수를 부렸을 줄이야!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진아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못난 엄마 때문에 어린 네가 그런 고생을 하다니…….’
공손설이 그녀의 마음을 진정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