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6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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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3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60화
160화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다르겠지요. 중요한 것은 현재 제가 어떻게 행동하고 있느냐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어차피 이 자리가 마련된 것은 서로 간의 목적 때문이니 불필요한 검증은 지나치기로 하지요.”
“그것도 옳은 말이네만, 우리 화산파나 종남파는 정도를 걷는 곳이다 보니 마도인하고 함부로 손을 잡을 수가 없네. 그 점은 자네가 이해하게.”
“제가 마도인이라면 손을 잡을 수 없다는 말씀 같군요.”
말 몇 마디에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진평천이 나서서 정리했다.
“손을 잡을 수 없다기보다 신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게나.”
“하긴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죠. 다른 분들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북궁천의 말에 좌일소가 먼저 대답했다.
“저는 저 친구의 말에 찬성입니다. 중요한 것은 천사교를 상대하는 일이니까요.”
“저는 진 대협의 판단을 믿고 이 자리에 온 만큼 앞으로도 진 대협의 판단에 따르겠습니다.”
웅선당은 결정을 진평천에게 맡겼다.
상황이 그리되자 명원 도장도 더 이상 사상적인 문제를 따지지 못했다.
“험, 좋소. 그럼 그 문제는 진 대협께 맡기고 앞으로의 일을 상의해 봅시다.”
그 때 말없이 앉아 있던 송선 도장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떡 벌어진 어깨, 부리부리한 눈에 두툼한 입술, 삐쭉삐쭉한 수염.
그는 유순한 도명과 달리 괄괄한 성격이었다. 또한 그러한 성격답게 강보다 유를 중시하는 종남파에서 특이하게도 패도적인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젊었을 적에는 그런 성격과 무공 때문에 말썽도 많았지만, 옳지 않은 일을 보면 몸을 사리지 않는 의협심이 강해서 친구들이 많았다.
마도인들에게는 지옥에서 온 괴짜 도사로 불렸고.
그런데 나이 육십이 넘어서도 그 성격은 여전했다.
“무량수불! 실력이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한번 직접 알아보고 싶군. 노도는 말로 듣는 것보다 직접 부딪쳐 보는 걸 좋아해서 말이야.”
진평천은 멈칫했지만 그를 말리지 않았다.
앞으로 함께 일을 하려면 직접 겪어 보는 게 나았다.
아주 약간은 ‘내 꼴을 당해 봐야 내 마음을 알지.’ 하는 생각도 있었고.
북궁천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요.”
주도권을 쥐어야 앞으로가 편해질 테니까.
“저 역시 말만 앞세우는 사람을 무척 싫어합니다. 그럼 밖으로 나가실까요?”
* * *
창백한 달빛이 쏟아지는 자시 무렵.
화톳불이 곳곳에서 타오르는 적산채는 시신으로 뒤덮였던 지난겨울과 판이하게 달랐다.
그곳에는 이제 정파연합의 일천이 넘는 무사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밤이 늦은 시각인데도 순찰을 도는 무사들이 곳곳에서 보였고, 몇몇 통나무집은 경비무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정파연합을 총지휘하는 총군사 유원당의 거처는 스물네 명의 최정예무사들이 철저히 둘러싸고 쥐새끼 한 마리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지켰다.
운이든 다른 이유가 있었든, 단숨에 적산채까지 되찾은 유원당이다.
이제는 누구도 그의 능력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못했다.
더구나 정파연합은 여러 세력이 모인 만큼 구심점이 중요한데 지금으로선 유원당만 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그를 천사교의 암습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삼엄한 경비를 펼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천공의 달이 구름에 가려졌을 때였다.
유원당의 거처가 있는 통나무집에서 이십여 장 떨어진 곳. 아름드리나무 옆의 어둠이 흐느적거리듯 흔들리더니, 그림자 하나가 유령처럼 나타났다.
그림자는 미세한 소리조차 내지 않고, 마치 바람에 날리듯이 통나무집 측면을 향해 흘러갔다.
절정의 은신술이 가미된 그림자의 움직임은 빤히 보고 있어도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신비했다.
때로는 늘어진 나무의 그림자 같기도 했고, 때로는 바닥에 누워 있는 바위의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은밀한지 삼사 장 간격으로 서 있던 경비무사들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무영환밀공(無影幻密功), 천하제일의 은신술법.
그림자가 펼치는 술법이 바로 백혈사신이 무림맹을 농락한 절세의 비공인 것이다.
‘후후후, 눈뜬장님 같은 애송이들 속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지.’
그림자의 주인, 백혈사신 주서광의 제자이자 외손자인 소이정은 속으로 조소를 지으면서 통나무집 처마 밑에 달라붙었다.
마치 희미한 그림자가 벽을 타고 처마 밑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완벽하게 처마 밑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긴 그는 청력을 끌어 올리고서 통나무집 안쪽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고요한 가운데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소이정은 인내심을 발휘해서 일각가량을 더 기다렸다.
사부는 자신에게 인내심이 부족하다며 타박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일이란 서둘러야 할 때가 있고 기다려야 할 때가 있다. 자신도 기다려야 할 때는 기다릴 줄 알았다.
‘사부는 늙었어. 이제 골방에 처박혀야 할 나이여서 잔소리만 많아.’
일각이 지나도 숨소리에 큰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완벽한 수면 상태.
확신을 가진 그는 먼저 처마 밑을 타고 문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문이 있는 곳 위에 도착한 그는 미끄러지듯이 벽을 타고 내려왔다. 검은색이었던 그의 모습은 처마 밑 그림자를 나오면서부터 회색으로 바뀌며 벽과 동화되었다.
어느 순간, 통나무 문이 살짝 열리는가 싶더니 회색 그림자가 스르르 문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경비무사 하나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을 때는 모든 것이 본래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바람인가?”
“왜 그러나?”
“별일 아니네. 바람 지나가는 소리였나 봐.”
“그 친구, 신경이 되게 예민하군. 나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밖에서 경비무사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소이정은 버릇처럼 벽과 천장을 타고 침상으로 접근했다.
짙은 어둠 속 침상 위에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깊은 잠이 든 듯 고른 숨소리가 여전했다.
침상 위 천장에 도착한 소이정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이곳은 유원당의 거처. 침상 위에서 자는 사람은 자신이 조사한 유원당과 인상착의가 똑같았다.
확신을 가진 그는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의 오른손 소매 속에서 길이 한 자가량 되는 비수가 소리 없이 빠져나오며 그의 손에 잡혔다. 맹독이 칠해진 망혼비(亡魂匕)였다.
결정을 내린 그는 촌음도 망설이지 않았다.
천장에서 깃털처럼 떨어져 내리면서 유원당의 심장을 향해 망혼비를 뻗었다.
푹!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망혼비가 심장을 파고들었다.
소이정은 유원당이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입을 막고는 떨림이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다섯을 셀 즈음, 떨림이 멎었다.
망혼비를 회수한 소이정은 솟구치는 피를 찍어서 시신의 머리맡에 신월(新月)을 그렸다.
신월을 보면 밤하늘이 싸늘한 눈빛으로 세상을 조롱하는 것 같지 않은가?
신월을 그리면 자신 역시 세상을 조롱하는 기분이 들었다.
* * *
콰과광!
강력한 장력이 맞부딪치면서 진기 폭풍이 두 사람 주위를 휘돌았다.
쿵, 쿵, 쿵.
묵직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뒤로 세 걸음 물러선 송선 도장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제기랄.’
자신만만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괜한 짓을 벌였다는 후회감만 가득했다.
그가 상대를 잘못 건드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단 삼초 만이었다.
그리고 십초.
속이 울렁거리고 온몸이 저릿했다.
그나마 밤이었기에 망정이지 대낮이었다면 붉어진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을 것이었다.
반면 상대는 슬쩍 한 걸음 물러난 것으로 그친 데다 낯빛도 조금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종남파 제일고수라는 자신이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애송이에게 밀리다니, 이 무슨 창피란 말인가?
“더 하실 겁니까?”
북궁천이 양손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송선 도장은 북궁천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즉시 대답했다.
“이 정도면 된 것 같군. 무량수불.”
“실망하지 않으신 것 같아 다행이군요.”
‘실망은커녕 놀라서 가슴이 벌떡거린다, 이놈아!’
송선 도장은 목구멍까지 치솟은 말을 억지로 눌러놓고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허허허, 정말 대단한 젊은이군. 부디 잘 협력해서 천사교 놈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 주도록 하세.”
“좋은 말씀입니다. 아주 뜨거운 맛을 보여 줘야죠.”
북궁천은 나직이, 한 마디 한 마디 씹어뱉듯이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진평천을 바라보았다.
“정파연합과 어떤 식으로든 연락을 취하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진평천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자네 말대로 연락을 취하고 있네.”
“그들과 손발을 맞추면 더 효과적일 겁니다. 때가 되면 제가 연락을 취하지요. 서로 간의 연락 장소는 이곳으로 하는 게 좋겠군요.”
“알았네. 그렇게 하지.”
* * *
여명이 동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새벽녘.
유원당의 거처로 들어간 조무성이 경악성을 내질렀다.
“총군사!”
경비를 서던 호위무사들이 일제히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문이 부서질 것처럼 열리더니 조무성이 뛰쳐나왔다. 그는 곧바로 천종원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열을 세기도 전에 천종원이 통나무집으로 들어갔다.
침상을 보고 얼굴이 창백하게 굳은 그는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고르고는 호위무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총군사께서 피살당하셨다. 지금부터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내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사람들에게 알리지 마라. 사람들이 몰려오면 조사를 제대로 할 수 없으니까.”
호위무사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한시도 자리를 뜬 적이 없었다. 귀신이라 해도 그들 사이를 통과할 수 없을 거라 자신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일이란 말인가?
“알겠습니다, 령주.”
천종원은 그로부터 반 시진이 지나셔야 각 세력의 수뇌부들에게 사람을 보냈다.
적산채가 뒤집어질 것처럼 술렁거렸다.
각 세력의 수뇌부들은 소식을 듣자마자 유원당의 거처로 달려왔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시신 수습이 끝난 후였다.
천종원이 나무를 잘라 임시로 관을 만들어서 시신을 모신 것이다.
그가 급히 시신을 관에 넣은 것은 독 때문이었다.
얼마나 지독한 독을 썼는지 시신이 발견되었을 때는 이미 몸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천종원은 안타까움과 궁금함으로 얼굴이 굳어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조사한 상황을 설명했다.
“암살자는 비수로 심장을 정확히 찔렀습니다. 사망 시각은 자시에서 축시 사이로 보이며, 시신을 발견했을 때는 비수에 묻은 독으로 인해서 온몸이 상해 가고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일찍 도착한 사람들은 시신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살짝 젖혀진 천 사이로 보인 얼굴은 온통 물집이 생기거나 녹아서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천군호 역시 시신을 본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너무 어이없는 상황에 얼굴이 벌게지도록 분노했다.
“대체 호위무사들은 뭘 하고 있었단 말이냐!”
“호위무사들은 한시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가 시신을 발견하고 주위를 철저히 조사해 봤습니다만 아무런 흔적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시신 옆에 초승달 문양이 피로 그려져 있었다는 것밖에…….”
“초승달? 암살자가 표식을 남겼단 말이냐?”
천종원이 고개를 돌려 침상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시선도 침상으로 향했다.
침상 위 하얀 천 위에 피로 신월이 그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