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9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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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5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97화
197화
호양곽의 이야기를 듣는 사이 남패령의 권역으로 들어섰다.
적광이 뜻밖의 질문을 한 것은 그때였다.
“단천, 너도 천사교도냐?”
“아니.”
“의외군. 천사교가 너 같은 고수를 놔두다니.”
놔둔 게 아니다. 철저히 이용해 먹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북궁천은 굳이 자신의 입으로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 적광이 몇 마디 말로 북궁천을 놀라게 했다.
“천 리 넘게 떨어져 있는 나에게 사람을 보낸 그들이 왜 가까운 곳에 있는 너는 놔둔 건지 모르겠군.”
“너도 그럼 천사교에 가려고 여기에 온 건가?”
“겸사겸사 왔지. 어차피 적주원을 찾으러 오던 길이었거든.”
어쩌면 적광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초청했을지 모른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불렀는지는 몰라도.
‘혈문과 마종보도 움직였겠군.’
그들이 도착한다면 상황이 달라질 터.
정파연합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북궁천 일행이 화정루로 들어가자 엉덩이 큰 화예가 그를 보고 달려왔다. 이번에는 커다란 엉덩이뿐 아니라 가슴까지 출렁거리면서.
“어머어어어! 오늘은 일찍도 오셨네요, 공자니이임! 호호호호호.”
“령주는 안에 계셔?”
북궁천은 최대한 무뚝뚝하게 물었다.
“물론 계시죠. 그런데…….”
분이 범벅된 얼굴로 환하게 웃던 화예가 북궁천 뒤쪽에 서 있는 호양곽과 적광을 보고 말을 흐렸다.
얼굴에 칼자국이 선명한 호양곽. 거친 늑대 같은 기세를 지닌 적광.
절로 기가 죽은 그녀는 웃음이 사라진 얼굴로 미적거렸다.
속이 시원해진 북궁천은 그녀의 곁을 휙 스쳐서 안으로 들어갔다.
‘앞으로 이런 곳에 다닐 때는 호양곽을 데리고 다녀야겠군.’
적주원은 갑자기 찾아온 북궁천을 보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허허, 어서 오시게나. 어쩐 일이신가?”
“적 령주를 찾는 손님이 있어서 안내해 왔소.”
“나를 찾는 손님?”
적주원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북궁천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 때 적광이 앞으로 나오며 고드름이 뚝뚝 떨어지는 느낌으로 입을 열었다.
“나야.”
“나? 당신이 누군데……?”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처음 보는 사람 같소만.”
“그래? 처음 본단 말이지?”
적광의 으스스한 목소리가 바닥으로 깔렸다.
적주원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낭인처럼 생긴 저놈은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본 놈이었다. 그런데 왜 자신을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일까?
더구나 왜 자신을 향해서 오한이 들 정도로 차갑게 말하는 걸까?
기분이 상한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서 상대를 노려보았다.
“이름이 뭔가?”
“광.”
“뭐라고?”
“광. 어떤 사람은 소광이라고도 불렀지.”
“소…… 광?”
이름을 되뇌는 적주원의 얼굴이 아주 천천히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이십 년의 세월이 길긴 긴가 보군. 하긴 그 지옥에서 이십 년을 지냈으니 몰라볼 정도로 변한 것도 당연하지.”
적주원은 부르르 몸을 떨고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튀어나올 것처럼 눈이 커진 그는 적광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을 더듬었다.
“서, 설마…… 네가…… 소…… 광?”
“변명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봐. 조금 있으면 말하기 힘들어질 테니까.”
몸을 사시나무처럼 떠는 적주원의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호수처럼 고였다.
“저, 정말 내 동생 소광이냐?”
“동생? 혼자 살겠다고 어린애를 지옥 같은 마옥(魔獄)에 내팽개쳐 놓고 도망친 사람에게 동생이 있긴 있었나?”
“그땐 어쩔 수 없었다. 정말로…….”
“어쩔 수 없었다? 변명치곤 더럽게 유치하군.”
“어차피 그곳에 남았으면 둘 다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 했어. 그래야 부모님의 한을 풀고 네 복수를 해 줄 수 있으니까.”
“오랜만에 정말 웃기는 이야기를 들어 보는군.”
“진짜다, 소광!”
“그래서? 부모님의 한을 풀어 드렸어? 내 복수를 했어?”
“그, 그건…….”
“내가 마옥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알아? 처음 오 년은 개처럼 지냈어. 그리고 그다음 오 년은 마옥 무사들의 시험 대상이 되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신세로 살았지. 봐!”
쫘아악!
적광이 가슴 옷자락을 잡아 찢듯이 벌렸다.
가슴이 그물처럼 갈라진 상흔으로 가득해서 성한 곳을 찾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한두 가지 형태의 상흔이 아니었다. 가늘고, 넓고, 거칠고, 갈지자로 꺾어지고…….
적어도 다섯 가지 이상의 병기에 당한 상흔이었다.
“그렇게 십 년이 지나서야 겨우 능력을 인정받고 노예에서 풀려나 그들의 일원이 될 수 있었어. 당신은 모를 거야. 그 기간 동안 내가 몇 번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는지. 그런데 죽으려 할 때마다 오기가 생기더군. 그래서 결심했지. 날 버리고 도망간 사람을 찾아서 피눈물 흘리며 후회하게 만들자! 그렇게 말이야.”
음울한 목소리로 한을 씹어뱉은 적광은 적주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날 버리고 도망간 사람은 여기서 이렇게 잘 살고 있군. 다행이야. 혹시라도 어렵게 살고 있으면 마음이 약해질까 봐 걱정했는데 부담이 덜어졌어.”
거리가 일 장으로 줄어든 순간, 적광의 몸이 앞으로 쭉 늘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피할 마음이 없는지 적주원은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퍽!
발에 얻어맞은 적주원의 몸이 저만치 나가떨어져서 굴렀다.
갑작스런 상황에 적주원의 좌우호법이 대경해서 앞으로 나섰다.
“무슨 짓이냐!”
“물러서!”
적주원이 황급히 소리쳤다.
“령주.”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하지 말고 물러서라니까! 누구도 이 일에 끼어들지 마! 내가 죽더라도!”
좌우호법을 물리친 적주원은 참담한 표정으로 적광을 바라보았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소광.”
적광은 적주원이 고의로 피하지 않았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손을 멈출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걱정 마. 그럴 생각이니까.”
스윽, 한 걸음에 일 장 거리를 좁힌 그는 손발을 번개처럼 내질러서 적주원을 두들겨 팼다.
퍼버버버벅!
한 대 맞을 때마다 적주원의 커다란 덩치가 몇 자씩 들썩이고, 이리 털썩 저리 털썩 나가떨어졌다.
그럼에도 적광은 멈추지 않았다. 정말로 죽을 때까지 때릴 작정을 한 것처럼.
“나는 내 힘으로 그곳을 나왔어.”
퍼버벅!
“마흔일곱을 죽였더니 무릎을 꿇더군.”
뻑!
“그때부터 자유가 되었지.”
청해와 감숙의 경계, 기련산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마옥은 강호에 크게 알려지지 않은 세력이었다.
무사의 숫자라고 해 봐야 다 합쳐서 백여 명.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마옥은 무사 개개인이 고수인 데다가 성격이 잔혹해서 청해와 감숙의 어느 세력도 그들을 무시하지 않았다. 아니, 무시하기는커녕 두려워하면서 마찰을 피하려 노력했다.
그런데 이십 년 전, 적주원과 적광 형제의 가문인 적가보가 그들에 의해서 멸망했다.
그 때 부모는 그들에게 죽고 두 형제는 노예로 잡혀갔다.
그런데 마옥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 생각지 못한 적의 습격을 받아서 대열이 흐트러졌다.
적주원은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탈출했다. 하지만 상황이 워낙 위험해서 동생을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혼자 탈출하는 것조차 성공할 가능성이 일 할에 불과한 상황. 동생은 차라리 남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래서 울며 매달리는 어린 동생을 떼어 놓고 혼자서 도망쳤다.
적광은 자신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가는 형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두들겨 팬 지 얼마나 지났을까, 혼백이 빠진 사람처럼 때리는 대로 맞은 적주원이 해파리처럼 늘어졌다.
“일어나. 아직 반도 풀리지 않았어.”
적광은 바닥에 엎어져 있는 적주원을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호양곽이 그 모습을 보고 북궁천의 눈치를 살폈다.
북궁천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끼어들 때가 아니었다.
“더, 더 때려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적주원에게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퍽!
적광은 기다렸다는 듯 적주원을 걷어찼다.
적주원의 몸뚱이가 떼굴떼굴 굴러갔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그만둘 줄 알았어?”
콜록, 콜록!
마른기침을 뱉어 내는 적주원의 입에서 핏물이 튀었다.
“미, 미안…… 하다, 소광…… 정말…… 미안…….”
비록 미미하긴 했지만 적광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죽든 말든 분이 풀릴 때까지 패고 싶었다. 그렇게 할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마옥이라는 지옥에서 지낸 세월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가슴은 이미 마옥에서 만년빙처럼 얼어붙었으니까.
그런데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병신. 이 정도에 흔들리다니.’
한번 흔들린 마음은 쉽게 추슬러지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다시 각오를 다지고 팰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제는 몸이 말을 안 들었다.
게다가 손끝은 또 왜 바보같이 떨린단 말인가?
‘제기랄!’
홱, 몸을 돌린 그는 근처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탁자 위에 있는 술병을 들고 주둥이를 목구멍에 처박았다.
단숨에 술병을 비운 그는 빈 술병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쨍그랑!
술병이 깨지면서 날카로운 소음이 방 안을 울렸다.
지난 이십 년간 바위처럼 꽁꽁 얼어 있던 분노가 그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났다.
“바보같이 울지 말고 앉아!”
호위무사들의 도움으로 겨우 의자에 앉은 적주원은 입가의 피를 닦았다.
퉁퉁 부은 눈과 코, 입술은 당장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욱신거리는 전신은 적어도 삼사 일은 지나야할 움직일 만할 것 같았고.
그나마도 그의 몸이 워낙 강골이어서 그 정도로 그친 게 다행이었다.
반 각.
숨을 안정시킨 적주원이 적광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적광이 한 말은 몇 마디에 불과했다.
자신은 천사교로 갈 것이니 앞으로 아는 척하지 말라는 말이 전부였다.
적주원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였다.
바로 옆에 천사교라면 이를 가는 마제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정말 천사교로 갈 거냐?”
“신경 쓰지 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가지 마라. 그들은 마옥 놈들보다 더한 놈들이다.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지옥 속에서도 살아남은 나야. 그들이 아무리 사악하다 해도 나를 어떻게 하진 못해. 그만 가 봐야겠어.”
적광이 냉랭히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였다. 묵묵히 팔짱을 끼고 있던 북궁천이 그를 보며 말했다.
“자신만만하군.”
적광의 눈이 북궁천을 향했다.
“솔직히 나는 천사교보다 네가 더 궁금해.”
“궁금하다기보다 손이 근질거리는 것 아닌가?”
“잘 아는군.”
두말할 필요 없다는 듯 순간적으로 대답이 튀어나온다.
북궁천은 나름대로 고심한 표정을 지으며 적광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