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9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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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78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94화
194화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 보시지요.”
“그에게 자중하라 했더니 오히려 나를 위협하더군. 원단에 본 교를 위해서 써 달라며 악동초가 건네준 돈이 있었는데, 그 돈을 내가 사욕으로 쓴 줄 알고 말이야.”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숙야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몰랐다는 듯.
방철산은 쓴웃음을 지으며 거짓 반, 진실 반을 섞어서 사정을 설명했다.
“여기저기 말하면 괜한 오해를 살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았네. 그런데 그 돈은 본 교에 충성하고 있는 간부와 열혈 교도들을 위해서 모두 썼네. 물론 교주님께 보고하지 않은 점은 나도 잘못이지만, 내 사욕을 위해서 쓰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목을 걸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네.”
“그러셨군요. 그런 일이라면 교주님께서도 심하게 뭐라 하진 않으실 겁니다.”
“내 어찌 교주님의 넓으신 마음을 모르겠나? 그런데 그는 그 일이 마치 대역죄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몰아붙이더군. 자기 등에 똥 묻은 줄은 모르고 말이야.”
방철산은 짐짓 분개한 표정을 지었다.
숙야돈은 그의 기분을 대충 맞춰 주며 넌지시 물었다.
“그분이 그러실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그럼 원주께선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하시길 바라십니까?”
“그런 자가 교주님의 호법들을 총괄하는 총령 자리에 있다는 게 영 불안하네. 해서 말인데…… 정파 놈들과의 중요한 싸움을 앞둔 만큼, 교도들의 마음을 하나로 뭉치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 정리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
숙야돈이 왜 방철산의 말뜻을 모를까?
내심 가소로웠지만 방철산은 이용할 만한 가치가 충분한 자.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동의하는 투로 말했다.
“교주님께서 선뜻 승낙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자네를 찾아온 것 아닌가? 자네만 찬성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흐으음.”
숙야돈이 수염을 비비 꼬며 대답을 미루자, 방철산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교주님의 혜안을 어지럽히는 자들이 교주님 곁에 있는 꼴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네. 자네와 나의 뜻만 맞으면 어느 누가 감히 교주님의 눈을 어지럽힐 수 있겠는가?”
“허허허,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무슨 소린가? 교주님의 모든 것을 대신하는 자네야말로 진정한 본 교의 이인자라고 할 수 있지. 이번 일만 잘 처리되면 이 늙은이는 자네가 하려는 일을 전적으로 밀어줄 생각이네.”
“허…… 그거 참. 원주께서 저를 너무 잘 봐 주신 것 같군요. 하긴 그분이 최근 들어서 지나치게 독선적인 면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요. 소존의 일만 해도, 그분이 호법 중 두어 명만 더 보내 줬어도 그렇게 당하진 않으셨을 겁니다.”
“자네의 생각이 옳네. 그 바람에 우리 장로원의 장로들만 죽어 나갔지.”
숙야돈은 방철산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를 표했다.
“좌우간 원주께서 정 뜻이 그러시다면 제가 따라야지요. 다만 한 가지, 손을 쓰는 것은 한 사람으로 그쳐야 합니다.”
“나 역시 많은 사람이 다치는 것은 원치 않네. 지금은 한 사람이 아쉬운 때가 아닌가?”
“그런데 이 정도 증거만으로 교주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숙야돈이 그 말을 한 순간, 방철산의 두 눈에서 싸늘한 살기가 번뜩였다.
“자네만 협조해 준다면 나에게 생각이 있네. 마제가 침입한 날 평사전에서 수상한 놈 하나를 잡았는데, 아무래도 뇌옥의 금가 꼬마가 사라진 일에 마제와 주가의 제자가 관련된 것 같아.”
* * *
황금빛 햇살이 구름을 뚫고 화살처럼 쏟아지는 아침.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도 우영산장의 분위기는 활기찼다.
사형제와 친구, 동료를 잃은 슬픔을 가슴에 묻은 정파연합 무사들은 금천장 공격을 앞두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수뇌부는 섬서연합이 자신들과 보조를 맞춰 천사교를 공격하겠다는 소식에 사기가 한껏 올랐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마제의 일이 마음에 걸려서 표정이 펴지지 않았다.
“아우, 그가 정말 호연도광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우리를 공격할 거라고 보는가?”
백리진이 침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임강령은 대답하기 전에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리하지 말고 누워 있게.”
“괜찮습니다, 형님. 이제 움직일 만합니다.”
침상에 걸터앉은 임강령은 담담히 답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야 백리진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를 우리 상식으로 생각해선 안 됩니다.”
백리진도 북궁천에 대해서 남보다는 잘 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깊은 내면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럴까?”
“그에게 천하의 안녕 따위는 아기의 안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아기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기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단 말이군.”
“그렇습니다. 헌원 소저를 구하기 위해서 북천의 주인 자리를 내팽개치고 만 리를 달려온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후우, 답답하군.”
“어쩌면 천사교를 상대하는 방법을 생각하기 전에 그를 상대할 방법부터 생각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 정도란 말인가?”
“아무도 정확히 그를 모르고 있습니다. 어쩌면 저조차도 그를 정확히 모르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가 강하다는 걸 내가 왜 모르겠나?”
“그냥 강한 것이 아닙니다.”
“구양환과 등조립, 선우명이 합공하고도 이기지 못했다는 말은 나도 들었네. 하지만 그도 그들을 이기지 못했지.”
솔직히 백리진은 북궁천이 구양환 등 세 사람과 비등하게 싸웠다는 말을 온전히 믿지 않았다.
싸움이 중단되어서 패하지 않은 것일 뿐, 끝까지 싸웠다면 혼자서 어찌 그들 셋을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설령 소문대로 비등하게 싸웠다 해도 그 정도의 고수 넷, 다섯이 공격하면 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
‘내가 그 말을 하면 사람들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 모르겠군.’
문득 그 생각이 들자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그런데 임강령이 그 모습을 보고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백리진조차 저러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랴.
“형님, 그는 그때보다 더 강해졌습니다.”
백리진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저도 그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제가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럼 세 사람으로는 그를 이길 수 없단 말인가?”
“다섯. 현재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최소 인원입니다. 그것도 이길 확률은 반반입니다.”
“말도 안 되네!”
눈이 휘둥그레진 백리진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높아졌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좌우간 중요한 것은 그를 그만큼 강하게 생각하고 대응할 방법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으으으음.”
임강령은 허튼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다. 그걸 누구보다 백리진이 잘 알기에 침음이 절로 나왔다.
임강령의 짐작이 절반만 사실로 드러나도 가슴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와 상의해 봐야 할 것 같군. 아우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도 형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시간이 너무 없습니다. 지금으로선 그가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 주기만 바랄뿐이지요.”
그런데 그 때, 밖에서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임 대협,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임강령은 목소리의 주인이 사공강후라는 걸 알고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들어오게.”
안으로 들어온 사공강후는 백리진을 보고 포권을 취했다.
“백리 대협께서도 계셨군요.”
“무슨 일인데 그러나? 표정을 보니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사공강후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도성 영허진인께서 무림맹 맹도들을 이끌고 오셨습니다.”
* * *
북궁천이 영허진인에 대한 소식을 들은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영서로 간 임표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담운을 보낸 것이다.
“무당파의 영허진인?”
“예, 주군. 그와 함께 온 오십여 명 모두 무림맹 산하 각 문파의 주력 고수들입니다. 무림맹이 지난 세월의 치욕을 만회하기 위해서 전력을 투입하는 것 같습니다.”
영허진인은 천하제일을 다투는 고수다.
무당에서 지난 백 년 이래 태극혜검(太極慧劍)을 완성한 단 한 사람.
백리진이나 관호명 등 내로라하는 고수들도 한 수 접어주는 진정한 절대고수.
그가 우영산장의 정파연합에 합류했다면 간단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공격이 예상보다 빨라질 수도 있겠군.”
“예, 주군. 영허진인이 합류했다는 소문이 돌자마자 금천장을 공격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북궁천의 눈빛이 깊어졌다.
영허진인의 합류가 정파연합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마땅한 구심점이 없던 차에 든든한 기둥이 생긴 셈이니까.
하지만 그로 인해서 감정대로 움직인다면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사실 그동안의 승리는 힘의 우위보다 천사교의 심리를 역으로 이용한 치밀한 계획에 의한 성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힘 대 힘의 싸움이 된다면 정파연합으로선 얻은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상대는 천사지존. 머리 하나로 무림맹을 와해시킨 천사종 호연도광이 아닌가 말이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소존과는 격이 천양지차인 자.
정파연합이 그를 소존처럼 생각한다면 치명적인 실수가 될 것이다.
‘호연도광 같은 자가 그 점을 그냥 지나칠 리 없어. 흥분을 가라앉히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승리가 물거품이 될 거다.’
반면 자신에게는 도움이 되는 상황.
지독한 모순이다.
북궁천도 그 점을 모르지 않기에 깊어진 눈빛이 암울하게 가라앉았다.
* * *
소식은 호연도광의 귀에도 들어갔다.
호연도광은 영허진인을 잘 알았다. 무림맹이 붕괴되던 이십삼 년 전 당시 무당파의 장로였던 영허진인은 무림맹 장로이기도 했다.
상대하기 가장 껄끄러웠던 자.
호연도광은 무림맹을 와해시키기 전에 간세들을 움직여 영허진인을 쫓아내다시피 무당으로 보냈다.
아마 그 당시 영허진인이 남아 있었다면 무림맹이 그토록 쉽게 와해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림맹의 발언권을 강화하기 위해 보낸 것 같습니다, 교주.”
“나이 팔십이 다 된 늙은이를 전쟁터로 보내다니. 무림맹도 어지간히 급했군.”
숙야돈의 말을 듣고 가볍게 비웃긴 했지만 호연도광도 영허진인을 무시하진 않았다.
천하의 누가 그를 무시할 수 있으랴.
더구나 그는 사공이 여럿인 정파연합을 아우를 자격이 있는, 천하에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어쩌면 바로 그 점이 무공의 강함보다 더 위협적이었다.
“영허진인의 합류로 사기가 오른 놈들이 공격 시기를 앞당길 것으로 보입니다. 해서 모든 교도들에게 비상령을 내리고 적의 공격에 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적절한 조치였다.
그런데 호연도광이 그 말을 듣고 푸르스름한 안광을 번뜩였다.
“놈들도 본 교가 그 정도 조치는 기본적으로 취할 거라 예상하고 있을 거다. 그렇지 않느냐, 숙야돈?”
“그럴 것입니다.”
“놈들의 뜻대로 움직여 주는 것은 재미없지.”
“하오면……?”
“희생이 따르더라도 역공을 해서 놈들을 최대한 흔들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