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9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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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67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93화
193화
진평천 등은 그가 나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이제 아는 것이다. 조금 전 광오하게 한 말이 사실이라는 걸.
* * *
주서광은 등잔불 아래에 누런 종이를 펼쳤다.
종이에 적힌 글을 읽어 가던 그의 하얀 눈썹이 잘게 떨리고, 주름진 입술이 길게 늘어지며 웃음이 번졌다.
“좋군, 아주 좋아. 악동초가 흉악한 놈인 줄로만 알았더니 글도 잘 쓰는군.”
그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서찰에서 눈을 뗐다.
오지관이 돌아오지 않아서 짜증이 나던 터에 말썽만 부리던 소이정이 오랜만에 밥값을 했다.
이것이라면 방철산의 그 오만한 얼굴이 구겨지는 걸 볼 수 있으리라!
그 생각을 하니 십 년 묵은 체증이 한순간에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지관이가 내일 아침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사람을 보내서 알아봐야겠군.’
오지관에 대한 것도 대충 넘긴 그는 밖으로 나갔다.
방철산의 방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웬일인가?”
방철산은 찾아온 주서광을 웃으며 반겼다.
주서광은 접힌 종이를 탁자 위에 놓고 담담히 말했다.
“저번에 방 원주가 주신 선물에 대한 답례외다. 아무래도 그냥 지나가면 예의가 아닐 것 같아서 말이오. 그럼 저는 이만.”
주서광은 즐거운 마음을 최대한 감추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슬쩍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오자마자 가려는가? 차라도 한잔하고 가지 그러나?”
“제가 좀 바빠서요.”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방철산은 주서광이 방을 나간 후에야 탁자 위의 누런 종이를 바라보았다.
왠지 기분이 싸했다.
하지만 그는 설마 별일이야 있겠냐 하는 마음으로 누런 종이를 집어 들고 펼쳤다.
그리고 잠시 후.
“이, 이런 찢어 죽일 놈이……!”
방철산은 종이를 읽으며 찢어질 것처럼 눈을 치켜떴다. 얼마나 분노했는지 손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종이가 쭉쭉 찢겨 나갔다.
종이에 써진 글의 작성자는 악동초. 그가 쓴 일지의 일부분이었다.
오늘 늙은 돼지에게 이천 냥을 주었다. 욕심 많은 돼지 새끼는 좀 더 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 똥물에 튀겨 죽일 돼지 새끼가 죽으면 내 반드시 그 늙은 돼지 새끼의 입에 가래침을 뱉을 것…….
와락!
종이를 움켜쥐어서 짝짝 찢어발긴 방철산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주서광! 이따위 것을 감히 나에게 가져다주었단 말이지? 네놈이 끝내 내 인내심을 무너뜨리는구나!”
내용을 보고도 가져왔다면 주서광 본인이 자신에게 욕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라 생각되었다.
갑작스럽게 닥친 위기로 인해서 주서광에 대한 공격을 늦추었는데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교주가 끌어들인 마제가 제 역할만 해 준다면, 늙어서 능력도 제대로 발휘 못 하는 한물간 살수나부랭이인 주서광 하나쯤 없다 해서 무슨 영향이 있으랴.
‘네놈은 이걸 가져올 때 몇 번 더 생각했어야 했다, 주서광!’
8장. 북천의 하늘이 보고 싶다
밤이슬이 머리를 적신다.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어깨가 축축하다.
벽성장으로 돌아와 석상처럼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상념에 잠긴 지 반 시진째.
북궁천의 눈빛은 하늘의 별빛을 모조리 빨아들여도 변하지 않을 것처럼 어두웠다.
여차하면 천하가 적이 될 판이다.
진아를 무사히 빼낸다 해도 천하가 자신을 노릴 터. 최소한 진아만큼은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놓아야 했다.
소이정과 종남파에 손을 썼으니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그들만으로는 부족했다.
‘최악의 경우가 닥쳤을 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해.’
그 때였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깼다.
“주군, 다녀왔습니다.”
북궁천은 하늘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임표였다. 영서에 갔던 그가 돌아온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임표는 자신이 알아 온 사실을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전열 정비가 빠르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대로라면 하루 이틀 사이에 금천장을 공격하겠다고 나설 것처럼 보입니다.”
“바쁘게 움직여야겠군.”
이틀 안에 호연도광의 요구를 모두 들어준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정파연합 고수들이 목을 내밀고 ‘나 죽여 줍쇼!’ 하진 않을 테니까.
그런데 임표가 뜻밖의 사실을 말했다.
“일양신군 등조립이 천사교의 간자였다고 합니다.”
“뭐? 그자가?”
임강령은 구양영 외에 한두 사람 더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등조립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예, 임강령이라는 사람이 그자에게 중상을 입으면서 정체를 밝혀냈다고 합니다.”
임강령이 중상을 입었다는 말에 북궁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임표의 말을 들으니 대충 상황이 짐작되었다.
‘그 양반, 자기 목숨이 몇 개라도 되는 줄 아나?’
그래도 어쨌든 등조립을 잡아냈다는 것은 다행히 아닐 수 없었다. 천사교도 그만큼 타격이 클 테니까.
“그 외에 특별한 것은 없나?”
“철군성의 공손후와 염구악 장로가 합류했다는 것은 아십니까?”
북궁천의 눈이 커졌다.
“그들이 왔다고?”
“예, 주군. 정예무사 이백 명 정도를 이끌고 합류했다 합니다. 지금 정파연합에는 군사가 세 명 있는데 그중 하나가 공손후입니다.”
“그거 골치 아픈 일이군.”
그가 와 있다면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공손설의 오빠이기도 하고, 헌원려려가 머물고 있는 철군성의 다음 대 주인이 아닌가 말이다.
그 때 임표가 북궁천의 눈치를 보며 넌지시 말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이상한 점? 뭐가?”
“군사 세 명은 위효릉과 제갈상, 공손후입니다. 그런데 어느 쪽도 결정적인 주도권을 쥐고 있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
뭔가가 찜찜하니 마음에 걸렸다.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상황이라면 아무리 좋은 계획도 실행으로 옮기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하물며 피해가 클 수밖에 없는 계획은 서로 간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어서 더욱 쉽지 않은 게 일반적입니다.”
임표의 말을 듣고 있던 북궁천의 눈빛이 반짝였다.
찜찜함의 정체를 깨달은 것이다.
“그렇군. 확실히 이상해. 그들은 오백 무사를 미끼로 해서 천사교를 끌어들이고 뒤를 쳤어. 군사가 셋이면 그런 살벌한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맞습니다. 누군가가 그들 전체를 일사불란하게 지휘하지 않고 있다면 힘든 일입니다.”
“그들 중에 그럴 만한 사람이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동안 별일만 없었다면 구양환이 가장 유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천군호에게 전권을 넘겨줬고, 천권호는 아직 그럴 만한 힘이 없다.
천무회의 사공강후나 관호명, 무림맹을 이끄는 남궁원과 공원대사도 역시 거기서 거기다.
백검맹과 철군성의 수뇌부도 마찬가지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천무회주나 무림맹주, 아니면 무당의 영허진인이나 오군 중 제일이라는 수룡천군 정도만이 가능해. 혹시 그들 중 누가 있는 것 아냐?”
“아직 그런 소문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합류했다면 당장 소문이 났을 것이다. 정파연합에서 정파무사들의 사기를 위해 먼저 퍼뜨렸을 테니까.
“그럼 누구지?”
“현재로선 검왕 백리진이 가장 유력합니다.”
“아냐, 그 양반은 앞에 나설 사람이 아니야. 전체를 아우를 만한 힘도 조금 약하고. 게다가 그렇게 무식한 병법을 쓸 만큼 간이 크지도 못해.”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하던 북궁천이 멈칫했다.
그는 그런 간 떨리는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을 하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죽고 없지만.
“임표, 날이 밝으면 다시 영서로 가서 정파연합의 움직임을 주도하는 자가 누군지 좀 더 자세히 알아봐.”
“예, 주군.”
* * *
고구선은 수하의 보고를 받고 어이가 없었다.
“벽성장? 그게 정말이냐?”
“예, 령주.”
“젠장!”
마제가 나타나기 전부터 귀밀영 전체를 동원해서 천라지망을 펼쳤다.
마제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대낮이어서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동쪽으로 간 그가, 마제가! 빙 돌더니 상주의 벽성장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고구선은 그 말을 듣고 번쩍 한 사람이 떠올랐다.
코에 점이 박힌 덜 떨어진 자. 단천이 말이다.
얼굴이 일그러진 그는 그제야 왜 마제에 대한 추적이 번번이 실패했는지 전말을 짐작하고 이를 갈았다.
여우는 도주를 생각해서 굴을 아홉 개 파 놓는다더니, 그가 바로 여우였다.
덩치 큰 여우.
‘빌어먹을, 사교령께 혼나겠군.’
숙야돈을 찾아간 고구선은 어깨가 축 처진 채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아무래도 그가 마제인 것 같습니다, 교령.”
숙야돈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사실이라면 철저히 농락당한 셈이었다. 그런데 화가 나기보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것도 모르고 그를 다그치지 않았던가. 바로 코앞에 두고 말이다.
만약 그가 자신을 죽이려 마음먹었으면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염왕을 앞에 두고도 몰랐다니.’
문제는 그 사실을 교주가 알았을 때였다.
몇 번의 계획이 실패하고 소존마저 처참하게 죽으면서 감정이 날 선 칼날처럼 날카로워진 교주다.
그런 판에 마제의 존재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금천장을 들락거리게 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벼락이 떨어지고도 남았다.
교주가 진정으로 분노하면 사교령이라는 지위는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 이십 년 동안 곁에서 보좌한 공이라는 것도 분노 한 방에 날아갈 먼지에 불과할 뿐.
‘마제가 교주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이상 이제 마제의 정체는 중요하지 않아. 오히려 모른 척하고 철저히 이용해 먹는 게 나을지도 몰라.’
설령 교주께서 나중에 알게 된다 해도, 지금 아는 것이나 그때 알게 되는 것이나 자신에게 내릴 벌은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굳이 나서서 벌을 자초할 이유가 없었다.
“구선, 당분간 마제의 정체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고구선의 눈빛이 흔들렸다.
‘누구에게도’라는 말에 교주도 포함되었음을 아는 것이다.
“괜찮겠습니까?”
“교주님께서 알면 다른 사람들도 알게 될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이라도 더 알면 놈의 귀에 들어갈지도 모르고. 그럼 어디론가 튈지 모른다. 차라리 모른 척하고 그대로 놔두는 게 나아. 교주님께는 나중에 내가 자세히 보고할 것이니 그렇게 알아라.”
그럴듯한 말이다.
고구선도 숙야돈의 의견에 찬성했다. 그럼 숙야돈도 자신을 책망할 수 없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교령.”
그 때 밖에서 호위무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교령께 아룁니다. 장로원주께서 오셨습니다.”
숙야돈과 마주앉은 방철산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더는 참을 수 없어서 자네를 찾아왔네.”
그러고는 다짜고짜 다섯 장의 서류를 숙야돈 앞에 내놓았다. 북궁천이 준 서류 중 일부였다.
“읽어 보게.”
숙야돈은 서류를 한 장 한 장 빠르게 읽어 가며 넘겼다.
서류 안에 이름이 적혀 있진 않았지만 내용 중에 나온 사람이 누구인지 그도 모르진 않았다.
잠시 후, 서류를 다 읽은 그의 눈에서 기광이 반짝였다. 하지만 고개를 드는 사이 눈빛을 감춘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방철산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