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9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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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47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90화
190화
그때 북궁천이 고저 없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혈도를 풀어 주는 것 외에 한 가지 조건을 더 들어주겠다. 다시 말해서 지금 너에게 청부를 하는 거야. 천하제일살수라면 그 정도 일은 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솔직히 천하제이살수야. 조부님이 살아 계시는 한은.”
그게 그거지.
지금 제일, 제이를 따질 땐가?
“할 수 있어, 없어? 그것만 말해 봐.”
빠르게 머리를 굴린 소이정은 눈을 두어 번 깜박이며 생각을 정리하고 넌지시 물었다.
마치 전문적인 살수처럼.
“청부 대가는?”
“원하는 걸 말해 봐.”
“당신을 공격해도 한 번만 그냥 놓아줘. 저번처럼 패지 말고. 그럼 그다음에는 반드시 당신을 죽일 수 있을 거야.”
참으로 해괴한 청부 대가가 아닐 수 없다.
북궁천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으며 쾌히 승낙했다.
“좋아. 그렇게 하지.”
소이정은 그 모습을 보고 후회 막심했다. 아무래도 한 번으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아, 씨발! 두 번 놓아 달라고 할걸.’
* * *
영서에서 참패 소식이 전해진 것은 축시가 지나갈 무렵이었다.
보고를 받은 호연도광은 불같이 노했다.
“뭐야? 놈들에게 거꾸로 포위되어서 당했다고?”
숙야돈은 몸이 덜덜 떨렸다.
“그렇다 하옵니다.”
생각지도 못한 패배였다.
자식인 호연유는 물론 사야승과 구황까지 미끼로 던져 놓고 반전을 꾀했거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다니.
일천오백이 출동해서 살아남은 자는 칠백 정도. 그나마도 포위망을 겨우 빠져나와서 정파연합에 쫓기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호교이령은 일이 그렇게 될 때까지 뭐 하고 있었단 말이냐!”
“임강령이 판 함정에 걸려서 정체를 들켰다 합니다.”
호연도광은 불길이 이는 눈으로 숙야돈을 내려다보았다.
호교이령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그는 천사교의 교도를 죽여도 되었고, 지존을 모욕해도 용서받았다.
완벽한 정파의 명숙.
그는 철저히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행동했다.
그런 호교이령마저 함정에 빠져서 당했다면 분노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자세히 말해 봐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숙야돈은 보고받은 내용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말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호연도광의 표정이 몇 차례나 변했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표정 변화였다.
그렇게 일각.
“놈들이 설마 그런 계책을 펼칠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교주. 모두 속하가 미력하여 생긴 일이옵니다.”
숙야돈이 그렇게 말을 맺자 호연도광이 이마를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이상하군. 공성계(空城計)에 이대도강(李代桃僵)이 섞인 연환계는 제갈상이나 공손후처럼 정의협사 운운하는 놈들은 결코 펼칠 수 없는 계책이야.”
그의 말대로, 약한 것처럼 위장하는 공성계나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이대도강, 모두 정파인들이 즐겨 쓰는 병법은 아니었다.
“하오면……?”
“그러한 병법은 대규모 군사 작전에서나 쓰이는 것이다. 잘못 쓰면 피해가 워낙 크고, 때로는 정정당당하지 않게 느껴져서 정파 놈들은 함부로 그런 병법을 쓰지 않아. 그런데 놈들은 그러한 병법을 아주 능숙하게 이번 싸움에 써먹었어.”
대규모 군사 작전이란 말에 문득 어떤 생각이 든 숙야돈이 눈을 크게 떴다.
“서, 설마……?”
호연도광이 새파란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정말 유원당이 죽었느냐?”
“물론입니다, 교주. 주 총령의 제자가 직접 손을 썼고 죽음을 확인했습니다.”
“죽은 자가 확실히 유원당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네 목을 걸 수 있느냐?”
숙야돈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이제는 물러설 수도 없었다.
“제 목을…… 걸겠습니다, 교주.”
찝찝함은 여전했지만 숙야돈이 목까지 내건 판이니 호연도광도 더 추궁하지 못했다.
“좋다, 네 마음이 그렇다며 믿어 보지. 그래, 놈들을 막을 방법은 생각해 봤느냐?”
숙야돈은 미리 준비하기라도 한 듯 즉시 대답했다.
“변성에 가 있는 교도들 중 절반 정도를 불러들이고, 상주의 마도세력을 적절히 이용한다면 밀리는 전력은 아닙니다. 고수의 숫자에서 약간 밀린다는 것이 문제이긴 합니다만…… 본 교에서 초청한 고수들 역시 이삼 일 사이에 도착할 것이니, 철저히 방어를 취하면서 그때까지만 버틴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북천마제를 끌어들인다면?”
고개를 번쩍 든 숙야돈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자만 이용할 수 있다면 승산은 팔 할 이상입니다, 교주.”
북천마제에게는 본인 외에도 뛰어난 수하들이 있다. 모두 일곱. 그들이 정파연합을 괴롭힌다면 그 효과는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좋아, 그럼 서둘러서 그부터 끌어들여야겠군.”
* * *
정파연합은 대승을 거두고도 환호하지 않았다.
중상을 입거나 죽은 무사가 삼백이나 되었다.
적에 비하면 반도 되지 않는 피해지만 죽거나 중상을 입은 사람들 중에는 사형제가, 친구가 섞여 있었다.
환호보다는 애도의 마음이 더 깊어서 분위기가 깊숙이 가라앉았다.
게다가 삼성궁의 봉공이며 우내오군 중 하나인 일양신군 등조립이 간자로 밝혀진 사실은 모두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삼성궁은 입이 열 개라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특히 구양환은 벙어리가 된 것처럼 입을 꾹 닫았다.
반면 자신의 몸을 던져서 등조립의 정체를 밝혀낸 임강령은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백리진은 무척이나 못마땅했지만.
“멍청하기는, 꼭 그런 방법밖에 없었는가?”
그는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임강령을 타박했다.
임강령도 할 말은 있었다.
“제가 피했다면 그를 몰아붙일 수 없었을 겁니다.”
그는 갈비뼈 세 대가 부러지고 내장에 심한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나마도 미리 예상하고 대비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진짜로 죽을 뻔했다.
“저건 언제 둘렀나?”
백리진이 한쪽에 있는 걸레쪽처럼 찢어진 천을 눈으로 가리켰다.
임강령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충격을 줄일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방에 쳐져 있던 휘장이 보이더군요.”
싸움이 벌어지기 전, 그는 남몰래 휘장을 몇 겹으로 덧대고 그 사이에 이불에서 빼낸 솜을 넣어서 몸을 감쌌다.
등조립이 머리를 공격하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는 처음부터 등조립이 공격할 경우 자신의 등을 노릴 거라 생각했다. 남들 눈을 피해서 공격하기에 가장 좋고, 면적이 넓은 만큼 머리보다 피하기가 어려우니까.
그렇게 몸을 감싸고 장력이 밀려드는 곳에 공력을 집중해서 최대한 충격을 완화시켰다.
그로 인해서 일장을 맞았을 때, 이를 악물면 견딜 수 있었지만 고의로, 자신이 크게 당한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등조립에게 당한 것을 확실하게 인식시키기 위함이었다.
“아우의 연기가 너무 완벽해서 나도 깜박 속았네.”
“형님을 속이려고 한 것은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당분간 무리하지 말게. 그 정도면 아우도 할 만큼 했어.”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서 가만있을 수가 없습니다.”
백리진도 임강령이 누구를 말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의 아들에게 이상이 생기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입니다.”
“그러지 않기만 바라야지. 일단 전열이 정비되면 금천장 공격에 대해서 말이 나올 것이니 그 일은 그때 가서 상의해 보세.”
“알겠습니다.”
“그럼 쉬게나.”
임강령은 백리진이 방을 나가자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리진이 북궁천 문제를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는 걸 느꼈다.
‘형님은 그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모르는군요.’
백리진뿐만이 아니다. 정파연합 사람들은 그가 강하다는 걸 알면서도 얼마나 강한지는 정확히 모른다.
기껏해야 구양환 정도만이 짐작할 뿐.
하지만 그마저도 떠나기 전의 그를 상대해 본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문제는 그때보다 더 강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무공만 강한 것이 아니라 두뇌 역시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가 젊은 나이에 북천을 거머쥔 것은 운 때문이 아니었다. 북천의 무인들이 약해서도 아니고.
사람들은 잊고 있다.
그가 북천을 피로 물들인 패왕이라는 것을!
‘어쩌면 또 한 번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군.’
그런데 이번에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목숨이 두 개면 얼마나 좋을까?
임강령은 소리 없이 실소를 지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미안하네.’
7장.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아침 해가 밝자마자 금천장에서 전해진 소식이 북궁천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머리카락?”
“예, 주군. 소군의 머리카락이 금천장 정문 앞에 내걸렸다 합니다.”
“그게 전부냐?”
장추람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소군의 피로 썼다는 혈서가 정문에 붙었습니다.”
“진아의…… 피라고?”
북궁천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움켜쥔 주먹에서 튀어나온 핏대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호연도광의 성격으로 봐서 거짓은 아닐 것이다.
결국 진아의 몸에 상처가 났다는 뜻.
하지만 그는 사력을 다해 마음을 다스리며 물었다.
“내용은?”
“오늘 사시 초까지 오지 않으면 손가락이 내걸릴 거라고 합니다.”
남은 시간은 반시진.
소이정을 이용해 보려고 했는데 그럴 시간조차 없다.
북궁천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추람이 흠칫하며 그를 불렀다.
“주군…….”
그러다 북궁천의 표정을 보고 말끝이 희미해졌다.
북궁천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추람. 어제 진아를 봤다. 아주 예쁘더군. 나는 그 아이가 나로 인해서 더 이상 다치는 걸 원치 않는다.”
그 때 냉호가 말했다.
“호연유와 교환하자고 해 보십시오.”
“이미 해 봤다고 했잖아. 놈은 내 말에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세상에 그런 자가 있다는 걸 어제 처음 알았지.”
“앞에 있을 때와 말로만 했을 때와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그의 앞에서 호연유의 팔다리 중 하나를 자른다면 그도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자신이 본 호연도광은 상황에 따라서 달라질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신처럼 생각하기에 감정을 속일 생각이 없다. 인간은 감히 신을 다그칠 수 없으니까.
그런데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피어났다.
“과연 그럴까?”
“천사교주가 아무리 악독해도 아들이 죽어 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보겠습니까?”
그래, 뭐든 해 보자. 가능성이 백에 하나밖에 안 된다 해도.
그는 신이 아닌 인간이니까.
“좋다, 냉호. 어디 해 보는 데까지 해 보자.”
* * *
금천장 정문에서 동쪽으로 오 리 떨어진 곳.
북궁천은 자신의 뜻을 금천장에 전하고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드넓은 초원에 혼자 서서 호연도광을 기다렸다.
오늘도 복면을 쓴 채.
지금쯤은 자신이 단천인지 알지 모르지만 하는 데까지 해 볼 작정이었다.
‘빌어먹게도 굼뜨군.’
일각이 여삼추라 했던가?
지금 그의 심정이 그러했다. 반 각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몇 년은 지난 듯했다.
그렇게 그가 기다린 지 이각이 되기 직전. 호연도광이 천사팔혼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초원으로 나왔다.
품 안에 진아를 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