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8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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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7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83화
183화
“저희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함께 지낸 시간이 짧아서 자세히 물어보진 못했습니다.”
“실력도 괜찮아 보이고, 마음도 악한 것 같지 않고. 공짜로 괜찮은 무사 하나 얻었군.”
반 각이 지날 즈음, 장추람과 냉호가 곽태문을 따라가서 석정산을 구해서 언덕으로 돌아왔다.
그는 산공독으로 인해 공력을 쓰지 못하고 혈도를 짚여서 움직이지 못할 뿐 정신은 들어 있는 상태였다.
“왜 이곳에 잡혀 있었던 거지?”
북궁천은 그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오늘 밤 할 일이 많은 그였다. 돌려서 묻기에는 시간이 아까웠다.
석정산은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그의 눈에 걸레쪽처럼 널브러져 있는 호연유가 보였다.
“설마…… 호연유……?”
북궁천의 무심하던 눈빛이 이채를 발했다.
소존의 이름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연이라는 성만 알 뿐.
그런데 석정산은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오른 그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명화회 회원이었나?”
석정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처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는 죽어도 싼 놈이오.”
“알긴 아는군.”
“설마 술에 취해서 멋모르고 저지른 잘못이 이렇게까지 흐를 줄은 생각도 못 했소.”
“나는 네 변명을 듣고 싶은 생각이 없다. 명화회에 든 놈들은 모두 죽어 마땅하니까.”
“나도 변명할 생각은 없소. 지금은 그저 죽고 싶은 생각뿐이오.”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가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내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했소. 나를 죽일 때 죽이더라도 내 말을 종남 사람들에게 전해 주시오.”
“무슨 말을 했다는 거냐?”
석정산이 덜덜 떨며 참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미친놈이 그만…… 섬서 강호의 고수들이 변성을 공격할 거라는 걸 말해 버렸소.”
* * *
숙야돈은 고구선의 보고를 받고 눈을 치켜떴다.
귀안당을 통해서 영서 우영산장에 있는 사야승의 보고가 전해진 것이다.
“그게 사실이냐?”
“종남파 장문인의 제자인 석정산이 직접 한 말이라 합니다.”
“빌어먹을. 일이 묘하게 꼬이는군.”
숙야돈은 이마를 잔뜩 찌푸렸다.
금천장의 무사 중 일천오백을 영서로 보냈다. 거기다 수상한 무리가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 그들을 확인하기 위해서 무사 이백이 출동한 상태였다.
그것까지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런데 화산파와 종남파를 비롯한 섬서 강호의 고수들이 변성을 공격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들을 확실하게 막으려면 정예무사로 오백은 보내야 한다. 그럴 경우 삼분지 일의 전력이 빠져나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적의 공격을 알면서도 변성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는 일.
그는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변성에서 놈들을 처리하고 돌아오면 대략 한 시진 전후. 그 정도면 늦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동안 빈 공간을 상주의 마도세력을 이용해서 메우면 큰 탈은 없을 듯했다.
“구선, 북혈회와 남패령, 서마련을 찾아가서 괜찮은 놈들로 이백씩 내놓으라고 해라.”
“예, 교령.”
고구선에게 명령을 내린 숙야돈은 방철산을 찾아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화산과 종남을 비롯해서 섬서의 고수들이 대대적으로 나섰다면 장로급 이상의 고수들이 대거 나왔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쪽도 그만한 고수들이 필요했다.
4장. 혈풍이 부는 밤
협곡 입구에 진을 치고 있던 사야승은 호연유가 정체불명의 복면인들에게 납치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머리가 멍해졌다.
“소존께서 납치되었다고? 그게 사실이냐?”
“예, 혈교령.”
침입자는 여덟 명. 그들에게 근 백 명에 가까운 자들이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떤 자들이…….’
그 정도의 능력을 지닌 자들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 중 유력한 용의자를 알고 있었다.
“설마 마제가?”
그 때 한쪽에 앉아 있던 철탑처럼 커다란 체구의 거인이 물었다.
“마제가 정말 그렇게 강하단 말이오?”
그가 바로 천귀군을 이끄는 거령신마(巨靈神魔) 구황이었다.
나이 마흔아홉으로 중원마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절대강자!
천하의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은 그로선 사야승이 마제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사야승은 자신의 느낌을 그대로 말해 주었다.
“내가 아는 한 당금 강호에서 그와 일대일로 대적할 수 있는 자는 많아야 다섯 정도요.”
“흥! 믿기 힘들군. 아직 서른도 안 된 애송이가 그렇게 강하다니. 혈교령이 너무 높게 평가한 것 아니오?”
사야승은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는 구황의 말투에 기분이 상했다.
“장로 셋이 그에게 죽었소. 그것도 합공을 했는데도 말이오. 천하에 그런 고수가 몇이나 된다고 보시오?”
“놈을 얕보고 덤빈 것일지도 모르지.”
구황이 비웃음 섞인 어조로 말하자,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여립이 냉랭히 쏘아붙였다.
“장로들이 다 멍청이들만 있는 줄 아나?”
구황이 투덜대며 슬그머니 눈길을 돌렸다.
“누가 멍청하다고 했소? 제길, 마제가 대체 어떤 괴물인데 그렇게 강하다는 거야?”
사야승은 더 이상 쓸모없는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소존이 납치되었다는 것이오. 산장에 있던 교도들은 반 가까이 죽었고.”
여립이 사야승을 바라보았다.
“교령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그 때 저 멀리서 붉은빛을 발하는 화살이 천공으로 솟구쳤다.
“제기랄.”
그걸 본 사야승의 입에서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정파연합 무사들이 십 리 이내로 들어섰다는 신호였다.
“이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갈래뿐이오. 계획대로 싸우든가, 아니면 물러나서 소존을 찾아보든가. 어떻게 하시겠소?”
구황이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이곳의 지형이면 천 명의 공격도 막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소? 그렇다면 물러설 때 물러서더라도 한바탕 싸우고 가야지.”
여립도 그 말에 찬성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소존을 마제가 납치했다면 찾는 것도 쉽지 않을 거네. 일단 적부터 막고 보세.”
불길한 예감이 든 사야승은 곧장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교도들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 싸움을 택한 이상 다른 방법이 없었다.
“좋습니다. 계획대로 놈들을 여기서 최대한 막고 상황을 봐서 다음 행동을 결정하지요. 그 전에 소존의 납치 사실을 교주께 전해야겠습니다.”
그는 여동생인 사미산을 불렀다.
만약의 경우 자신은 죽더라도 여동생만큼은 살리고 싶었다.
* * *
화산파 제자 구십이 명, 종남파 제자 팔십일 명, 섬서 강호의 협의지사 오십삼 명.
도사들도 도복을 벗어 던지고 머리에 건(巾)과 관(冠) 대신 무명띠를 둘렀다.
사문의 영명과 강호의 협을 지키겠다는 절박한 각오를 다지는 마음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세상이 고요해진 해시 말 천사교 권역으로 들어섰다.
목적지는 금천장에서 오십 리 떨어진 변성.
그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양민 오백여 호가 사는 그저 그런 마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천사교의 북부 방어막 중 가장 중요한 요충지로 변해 있었다.
북동쪽으로는 화산이, 북서쪽으로는 종남이 근접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런 이유 때문에 변성에 상주하는 천사교도의 숫자는 삼백여 명에 불과하지만 고수들이 즐비했다.
화산과 종남은 한때 천하를 아우르던 무림맹의 중추 세력.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천사교로서도 강력한 무력을 집중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화산파와 종남파 제자를 비롯해서 섬서 강호의 고수들까지 망라된 공격진은 모두가 고르고 고른 고수들이었다.
숫자가 조금 모자라긴 해도 전체적인 전력은 배 차이가 날 정도로 강력했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자신이 있었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설욕할 수 있으리라!
사악한 천사교를 섬서에서 몰아낼 수 있으리라!
자신감이 충만한 섬서연합 무사들은 변성이 십 리 앞으로 다가오자 부챗살처럼 쫙 펴져서 전진했다.
쏴아아아아!
그들은 어둠 속에서 파도가 밀려가듯 변성을 향해 내달렸다.
“오늘만큼은 자비의 마음을 버려도 된다!”
“사악한 자 하나를 제거해 양민 열을 살린다는 마음을 가져라!”
“악에 물든 종자들을 쓸어 내자!”
화산파와 종남파의 장로들이 제자들을 독려했다.
사기가 검게 물든 하늘 끝까지 솟구쳤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각.
숙야돈이 보낸 오백 무사가 한 발 먼저 변성에 들어서고 있었다.
변성으로 진입한 섬서연합 무사들은 곧장 천사교 무사들이 운집해 있는 변성의 부호 관가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이 관가장에 도착하기도 전 곳곳에서 천사교 무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적이다!”
“정파 놈들이 쳐들어온다!”
삐이이이익!
호각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섬서연합 무사들은 멈추지 않고 적을 향해 돌진했다.
급습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기긴 했지만 공격을 멈출 수는 없었다.
곧 어둠 속에서 처절한 격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비명과 악다구니가 변성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 * *
금천장에서 동쪽으로 이십 리 떨어진 율하촌.
북궁천 일행이 마을 입구로 들어서자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호양곽이 달려왔다.
그에게서 상황을 전해 들은 북궁천은 표정이 굳어졌다.
자신이 움직인 서마련과 남패령 무사들을 조사하기 위해서 이백 명이 나왔다고 했다. 그 일이야 바라는 대로 되었으니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 후 오백여 명에 달하는 자들이 금천장을 나와 변성 쪽으로 달려갔다고 했다.
석정산의 말이 전해졌다는 뜻.
시간상 어느 쪽이 먼저 변성에 도착할지 모르지만, 설령 천사교도들이 조금 늦게 도착한다 해도 섬서연합 무사들이 피해를 입을 것은 분명했다.
문제는 자신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이다.
오늘 밤의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던가.
정파를 돕기 위해서 절호의 기회를 헛되이 보낼 수는 없었다.
그로서는 천하보다도 진아를 구하는 게 더 중요했다.
“현재 금천장 안에 남은 무사의 숫자는 얼마나 되는가?”
“저희가 계산한 바로는 칠팔백 정도 됩니다.”
그 정도라면 금천장이 휑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런데 호양곽이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천사교에서 상주의 각 세력에 무사 이백씩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무래도 빠져나간 사람들을 대신하려는 것 같습니다.”
순간적으로 북궁천의 칼날처럼 눈빛이 번뜩였다.
“보냈나?”
“아직 준비 중입니다.”
“잘됐군. 양곽, 지금 즉시 사람을 보내서 연 회주와 적 령주, 설문을 은밀하게 벽성장으로 데려와라.”
“예, 주군.”
* * *
벽성장은 동마장의 괴멸 후 한산했다.
워낙 많은 사람이 죽어서인지 음산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현재는 북혈회의 적수당주 영호신이 무사 오십여 명을 데리고 관리하는 상태로, 천사교의 눈을 피해서 사람을 만나기에는 적당한 장소였다.
북궁천이 그곳에 도착한 지 이각쯤 지났을 때 흑운대가 연풍척과 적주원, 설문을 데려왔다.
그들은 천사교도 두려웠지만 북궁천도 두려웠다.
천사교는 멀리 있었고, 북궁천은 바로 옆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