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2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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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3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207화
207화
난감해진 임강령은 눈을 내리깔았다.
유원당이 예상한 대로다. 그래도 다른 사람에 대한 요구를 하지 않을까 했거늘.
“총군사께 듣기로는 어젯밤에 만났다고 하던데.”
“만났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만, 영허진인과의 일은 단둘이 해결할 생각입니다.”
“어떻게 말인가?”
“방법이야 하나밖에 없지요.”
이기는 사람이 목숨을 가져가는 것.
북궁천의 말뜻을 눈치챈 임강령은 나직이 탄식하며 유원당의 말을 전했다.
“하아아, 알겠네. 그 일은 어차피 자네가 알아서 할 일이니 내가 뭐라 하겠나? 다만 그 전에 알아 둘 일이 있네.”
“말씀해 보시지요.”
“금천장을 공격할 거네. 사기가 오를 대로 올라서 더 늦출 수가 없네.”
북궁천도 어느 정도 짐작했던 바다.
“지금 상황에선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하는 말이네만, 우리의 목숨을 가져가는 시간을 조금 늦추었으면 하네. 천사교가 궁지에 몰릴 때까지. 물론 영허진인의 일도 마찬가지네.”
그 말을 들은 북궁천의 눈빛이 반짝였다.
“유 원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던가요?”
임강령이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총군사가 한 말씀이지.”
“그분이 그런 말씀을 하셨을 때는 그만한 뜻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같은 음식이라 해도 배부를 때보다는 배고플 때 더 가치가 있는 법이네. 천사교가 어려워지면 우리의 목숨 가치도 그만큼 올라가겠지.”
북궁천은 그것만으로도 유원당의 말뜻을 깨달았다.
상황이 다급해지면 영허진인을 포함하지 않고 두 사람의 목숨만으로도 협상할 수 있는 상황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북궁천이 생각해도 일리 있는 말이었다.
문제는 그동안 호연도광이 기다려 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만약 그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면?
진아가 고통을 겪을 것이다.
북궁천은 두 가지 상황을 신중하게 판단하며 저울질해 보았다.
하지만 진아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겠다는 두 사람이다. 그런 사람 앞에서 자신의 욕심만 챙길 수는 없는 일.
한편으로는, 자신이야 진아만 구해서 떠나면 되는데 남 걱정할 필요가 뭐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임강령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 우리 두 사람 목숨은 걱정 말게. 언제든 자네가 원하면 줄 테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북궁천은 자신이 왜소해지는 것만 같았다.
아니, 자신이 작아지는 것보다는 임강령이 크게 보였다.
임강령과 눈 마주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서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돌아갔다.
처음 느껴 보는 이질적인 감정.
그는 갑작스런 그 느낌에 충격을 받고 눈빛이 흔들렸다.
무엇이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흔드는 걸까?
‘대협의 마음이라는 게 이런 것인가?’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북궁천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진아야, 미안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다오.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너를 데려가고 싶구나.’
결정을 내린 그는 임강령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는 웃으면서 목숨을 거는데 잠깐을 참지 못할까.
려려도, 진아도 이해해 주겠지.
“알겠습니다,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말해 보죠. 그런데 공격은 언제 시작하실 겁니까? 보아하니 곧 시작할 것 같던데…….”
“오늘 저녁에 움직이면 내일 오전쯤 시작되지 않을까 싶군.”
* * *
“놈들이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하옵니다, 교주.”
호연도광은 숙야돈의 보고를 듣고 붉은 입술을 비틀었다.
“사기가 올랐을 때 끝장을 보겠다는 생각이군.”
예상했던 터였다.
“숙야돈, 손님맞이할 준비는 다 되었느냐?”
“혈문과 마종보에서 오기로 한 자들이 오늘 밤 안으로 도착할 것입니다. 그들이 도착하면 교주께서 명하신 혈망지계(血網之計)가 완벽해질 것입니다.”
“좋아, 너를 믿겠다. 이번에도 실망감을 안기면 더 이상의 용서는 없을 것이니라.”
가슴이 싸늘하게 식은 숙야돈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속하가 어찌 그 점을 모르겠습니까. 하온데, 교주님께 한 가지 허락을 청할 일이 있습니다.”
“말해 봐라.”
“강적과의 전쟁을 앞둔 이때 교의 화합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특히 최상층 간부들의 화합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화합하기는커녕 이간질에 여념이 없는 자가 있습니다.”
숙야돈은 잠깐 숨을 쉬며 슬쩍 호연도광의 눈치를 살펴보고 말을 이었다.
“그 일을 정리하지 않으면 중요한 순간에 엇박자가 날지 모르는 만큼…… 교주께서 허락하신다면 속하가 그 일을 정리하겠습니다.”
호연도광은 숙야돈이 누구를 말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단순한 이견이라면 문제 될 것 없다. 그러나 교를 위험에 빠뜨리는 이전투구는 용납할 수 없느니라.”
“속하 역시 같은 마음이옵니다.”
“너는 누구를 남겨 놓는 것이 나을 거라 보느냐?”
“주 총령은 뛰어난 분입니다. 공적 역시 어느 누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원당 제거에 실패해서 엄청난 피해를 입힌 것으로도 모자라, 화합보다는 암중에 방 원주를 제거할 궁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그게 전부냐?”
“최근에는 그의 제자인 소이정이 뇌옥에 침입해서 금가린을 빼돌린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그래?”
“유원당에 대한 암살 실패만 해도 소이정은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또 교의 법을 어기고 중요 죄수를 빼돌렸습니다. 주 총령에게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서 다른 교도들에게 반면교사로 삼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합니다.”
장로원주 방철산과 총령 주서광.
두 사람은 누가 더 큰 공을 세웠다고 비교하기가 어려울 만큼 천사교의 공신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암중쟁투가 수그러들 생각을 하지 않고 더욱 격해지고 있었다.
더 이상 이대로 놔둘 수 없는 상황.
숙야돈의 말대로 둘을 화합하게 만들든지, 아니면 어느 한쪽을 제거해야 한다.
문제는 전쟁을 앞둔 상황인지라 화합을 유도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다는 점이다.
자신이 말하면 싸움이야 멈추겠지만 그저 듣는 척하는 것일 뿐. 그것은 진정한 화합이라 할 수 없다.
결국 어느 하나를 제거해야 할 터. 그렇다면 당연히 죄를 진 자를 처단하는 게 옳았다.
“죄를 지었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법. 숙야돈, 네가 천사지존의 위엄을 받들어서 그 일을 해결해라.”
마침내 호연도광이 결정을 내리자, 숙야돈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존명!”
* * *
늦가을 홍시처럼 시뻘건 석양이 서산으로 떨어질 무렵.
“출발!”
일갈이 용호산을 울리고, 우영산장의 활짝 열린 정문을 통해서 무사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삼성궁, 천무회, 무림맹, 백검맹, 철군성, 그리고 각지에서 몰려든 군웅들이 육백씩 사 로로 나누어져서 금천장이 있는 서북쪽을 향해 전진했다.
그로부터 한 시진이 지날 즈음.
북궁천은 우영산장을 살펴보던 냉호로부터 정파연합이 이동을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고 눈빛을 겨울 밤하늘의 별빛만큼이나 싸늘하게 번뜩였다.
“드디어 시작이군.”
북궁천은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우영산장에서 사십여 리 떨어진 계곡에 머물며 정파연합의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정파연합이 움직이면 호연도광이 찾을 터. 서둘러서 일을 처리하라고 재촉할 게 분명했다.
그도 아니면 정파연합의 주력을 공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질 수도 있고.
지시가 떨어지면 이행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 차라리 연락을 끊고 상황을 엿보는 게 나았다.
“정파연합의 움직임을 따라서 이동하자. 일 차 격돌의 상황을 봐서 호연도광을 만나야겠다.”
북궁천의 말에 장추람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소군께서 괜찮겠습니까? 호연도광, 그 미친놈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요.”
걱정되는 마음이야 북궁천 자신이 더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을 다잡았다.
“호연도광도 나와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마음대로 못 할 거다. 자, 그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고기나 먹자. 다 익은 것 같은데…….”
그는 짐짓 가벼운 어조로 말하고 모닥불 위에서 익어 가는 노루고기를 뒤적였다.
향긋한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기다렸다는 듯 적광이 소도를 빼 들고 익숙한 솜씨로 고기를 잘랐다.
냉호와 철교신도 심각한 표정을 최대한 자제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중원의 노루는 기름기가 너무 많아.”
“그러니까 북해의 얼음덩이 같은 네가 자꾸 능글거리게 되는가 보군.”
“웃기고 있네. 돌덩이 같은 네놈 얼굴에 화색이 도는 건 어쩌고?”
“너도 나중에 내 입장이 되어 보면 알게 될 거다. 안 그래, 추람?”
장추람은 피식 웃으며 노루의 다리를 쭉 찢었다.
그는 눈치채고 있었다. 철교신이 연소랑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냉호 얼굴에 화색이 돌 때쯤 되면 인생 다 산 거지, 뭐. 주군, 드시죠.”
북궁천은 장추람이 내민 고기를 받아 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지? 교신 얼굴에 화색이 도는 이유가 따로 있기라도 하단 말이냐?”
그는 아직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장추람이 소동동을 여자로서 좋아하고 있다는 것도.
하긴 그걸 눈치챌 정도면 공손설을 애 취급하지도 않았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장추람 등의 노력 덕분에 북궁천의 표정도 조금 풀어졌다.
그때 적광이 물었다.
“주군, 오전에 만났다는 기련검마 위지완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해 주쇼. 한 수 나눠 봤다면 대충이나마 그의 실력을 알 것 아뇨?”
그가 지옥으로 생각하며 지낸 마옥도 기련산 줄기에 있었다.
기련검마와 마옥은 강물과 바닷물처럼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지내던 사이.
산세가 천 리나 뻗은 기련산이 워낙 넓어서 기련검마의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그에 대한 소문은 귀가 따갑도록 들은 터였다.
언제고 기회가 되면 그와 승부를 내보고 싶었다.
“그는 강하다. 최소한 적광 너보다는 강해.”
북궁천은 기련검마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말해 주었다.
적광의 얼굴에 불만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그런데 북궁천이 몇 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제까지의 일일 뿐이야. 네가 지금 상태에서 반 단계만 더 올라선다면 그도 너를 이길 수 없을 거다. 그리고 그 단계를 넘어선다면 그를 네 발아래 무릎 꿇릴 수 있겠지.”
그제야 적광의 표정이 풀어졌다.
자신은 아직 젊었다. 게다가 채찍질을 가할 수 있는 고수가 곁에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자신은 더 강해질 터. 기련검마를 꺾을 수 있는 날도 머지않은 것이다.
“나중에 싸울 일이 생기면 그자는 나에게 맡겨 주쇼.”
“그렇게 하지.”
* * *
어둠이 짙게 깔린 해시 초.
주서광은 숙야돈이 호위무사 둘을 대동하고 자신을 찾아오자 이마를 찌푸렸다.
“무슨 일인데 사교령이 나를 다 찾아온 건가?”
숙야돈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총령의 제자에게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좀 불러 줄 수 있습니까”
“이정이는 임무 때문에 밖에 나갔네.”
숙야돈은 소이정이 없다는 게 아쉬웠지만 어차피 주목적은 그가 아닌 주서광이었다.
“그래요? 그럼 별수 없이 총령께서 대신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어디를 말인가?”
“교주님께서 저에게 두어 가지 조사를 명하셨습니다. 교주님의 명으로 조사하는 일이니 불편하시겠지만 저와 함께 교화전으로 가 주시지요.”
“교주님께서?”
주서광이 흠칫하며 숙야돈을 바라보았다.
숙야돈이 왔을 때부터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자신의 생각과 어긋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사교령, 교주님께서 나에 대해 무슨 조사를 하라고 하셨단 말인가?”
“첫째는 소이정의 임무 실패를 총령께서 알고 계셨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그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