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비서 9화
무료소설 신의비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8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의비서 9화
제4장 은혜는 하해와 같고 (1)
흑묘는 조윤을 안고 필사적으로 달렸다. 상처의 통증이 심하고 피를 많이 흘려서 의식이 가물가물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몇 번이나 머리를 흔들었으나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대로를 지나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뒤에 둘, 좌측 담장에 둘, 그리고 우측 지붕에 하나, 어느새 다섯 명이 따라붙었다. 그들은 흑묘를 주시하며 같은 방향으로 달렸다.
이당오괴였다. 실수였다. 선선히 물러날 자들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놔두다니.
차라리 조윤을 안전한 곳에 숨겨놓고 뒤따라오지 못하게 처리했었어야 했다. 저들은 지금까지 몰래 따라오며 기회를 보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쉬익! 텅!
우측 지붕에서 달리던 사내가 단검을 던지자 흑묘의 머리를 스치며 담벼락에 꽂혔다. 흠칫 놀라는 사이에 뒤쫓아 오던 사내 한 명이 거리를 바짝 좁히며 유엽도(柳葉刀)를 휘둘렀다.
“죽어!”
흑묘가 몸을 띄워 담장을 박차는 순간, 사내의 유엽도가 아슬아슬하게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때를 맞춰 좌측 담장을 따라서 달리던 사내 둘이 덮쳐 왔다.
허공에서 몸을 틀어 한 명이 휘두른 칼은 피했으나 다른 한 명이 내지른 발길질은 피할 수가 없었다. 어깨를 맞은 흑묘는 그만 조윤을 놓치고 말았다.
“아!”
땅에 떨어진 조윤은 숨이 턱하니 막혀 왔다. 뒤쫓아 온 사내 두 명이 동시에 조윤을 향해 유엽도를 휘둘렀다. 그러나 유엽도를 완전히 휘두르기도 전에 눈앞까지 날아온 여섯 개의 단검을 막아내야 했고, 그러느라 뒤이어 날아오는 단검을 보지 못했다.
“컥!”
“크윽!”
한 명은 목에 단검이 꽂혀서 즉사했다. 또 한 명은 팔에 맞아 들고 있던 유엽도를 놓쳤다. 그 틈에 거리를 좁힌 흑묘가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키며 그의 가슴을 찼다.
쾅!
“커헉!”
흑묘는 밑으로 내려섬과 동시에 단검을 뽑아서 한쪽에서 날아온 단검을 쳐냈다. 그러자 옆에서 두 명이 박도를 휘둘러 왔다.
막아내기에는 박도에 실린 힘이 너무 강했다. 그렇다고 피하자니 조윤이 다친다. 이에 다급히 단검을 내던졌다.
다치지만 않았다면 여덟 개를 던졌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네 개가 한계였다.
두 사람이 단검을 쳐내면서 박도를 휘둘렀다. 가슴을 스치며 피가 솟았다. 그 와중에도 흑묘는 다른 한 명의 공격을 단검으로 막아냈고, 자세를 바짝 낮춰서 그들의 다리를 쓸어 찼다.
두 사람이 그것을 피해 급히 뛰어올랐다. 지금이 기회였다. 허공에 있으면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한다.
흑묘가 고통을 참으며 열 개의 단검을 날렸다. 처음에는 여섯 개, 그다음은 네 개였다.
상처 때문에 위력이 약했지만 거리가 가까웠다. 두 사람이 단검을 쳐내기 위해 박도를 휘둘렀으나 모두 막아내지 못했다.
“크헉!”
“컥!”
두 사람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다행히 치명상은 면했지만 고통이 심해 바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헉헉!”
‘남은 건 한 명!’
흑묘가 나머지 한 명을 표독스러운 눈으로 노려봤다.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더 이상 덤비지 않았다.
“과연……. 그런 상태에서 우리를 상대하다니, 대단해. 진심으로 감탄했다.”
잠시 숨 돌릴 틈이 생겨서 다행이었으나 출혈이 심했다. 서 있기도 힘들었다. 남은 단검을 확인하니 두 개가 다였다. 이거면 아쉬운 대로 숨겨둔 비전절기를 펼칠 수가 있었다.
사내가 그 기세를 느끼고 인상을 썼다.
“해보자는 건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아이를 넘기고 물러나라.”
“흥! 동료가 죽었는데 그냥 놔준다는 말을 어떻게 믿지?”
“저들이 죽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내 목숨이라도 건져야 할 것 아닌가?”
“그럼 당신이 이대로 물러나면 되잖아.”
“그럴 수는 없지. 꼴을 보니 나는 기다리기만 해도 될 것 같거든. 선택은 내가 아니라 네가 하는 거다.”
그때였다. 뒤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사내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여기에 있었군.”
흑묘가 고개를 돌리자 짙은 녹의(綠衣)를 입은 중년 사내가 두 명의 장정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단목도유!’
낭패였다. 첩첩산중(疊疊山中)이라더니,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 * *
흑묘는 그제야 눈앞에 있는 자가 시간을 끌기 위해 대화를 유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단목도유가 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단목도유가 나타났으니 이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몸이 정상이어도 그를 상대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중상을 입어서 의식까지 가물가물한 상태였다.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이제 곧 한계였다.
조윤을 안고 도망칠 수도 없고, 저들과 싸울 수도 없다. 숨겨둔 비전절기를 펼친다고 해도 눈앞에 있는 놈에게나 통하지 단목도유한테는 어림도 없었다.
‘어쩌지?’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조윤을 넘기고 곱게 물러나면 된다. 그럼 백모연의 체면을 봐서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백모연이 이번 일을 알고 얼마나 기뻐했던가?
그런 모습은 몇십 년 만에 처음이었다. 흑묘는 백모연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바람을 이뤄주고 싶었다.
‘그분을 위해서라면…….’
흑묘는 준비해 둔 최후의 방법을 생각했다. 그 방법을 쓰면 자신은 죽는다.
하지만 백모연을 위해서라면 이깟 목숨쯤 언제든지 버릴 수가 있었다. 흑묘는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를 넘겨라.”
단목도유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람을 찍어 누르는 눈빛이었으나 흑묘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럴 순 없어요.”
“그런 몸으로 나한테 맞서겠다는 거냐? 일을 번거롭게 하지 마라.”
“전 가모님에게 세 가지 명령을 받았어요. 첫째, 아이를 찾을 것, 둘째 찾은 아이를 데려올 것, 셋째 방해하면 그것이 설사 가주님이라 해도 망설이지 말고 검을 휘두를 것.”
단목도유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백모연이 그 정도까지 각오하고 흑묘를 보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다 늙어서 이제야 뭔가를 해보려는 건가?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는군.’
단목도유는 코웃음을 쳤다. 단목세가는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세력도 없이 아이를 얻었다고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군. 죽어라.”
단목도유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마치 살모사가 먹이를 노리는 것 같았다.
흑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다가 힐끗 조윤을 봤다.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으나 죽지는 않았다.
또한 거리도 충분했다. 흑묘는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걸 본 단목도유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흑묘의 주특기가 비검술이라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흑묘는 방금까지 단검을 손에 들고 있었다. 저렇게 손을 넣어서 또다시 단검을 꺼낼 필요가 없었다.
더구나 흑묘의 표정!
저 표정은 모든 것을 각오한 얼굴이었다.
‘설마…….’
단목도유는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피해라!”
단목도유가 크게 소리치며 급히 몸을 날렸다. 거의 동시에 흑묘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땅에 던졌다. 그러자 작은 섬광과 함께 녹색의 연기가 확 일며 사방 이 장(二 丈 : 약 6미터) 정도를 순식간에 덮쳤다. 독이었다.
“크아아악!”
“으아아악!”
살과 뼈가 타는 소리와 함께 처참한 비명 소리가 울렸다. 부상을 입고 있던 이당오괴는 전부 부들부들 떨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단목도유를 따라왔던 두 사람도 독에 중독됐다.
제때에 눈치를 챈 단목도유만 무사했다. 그나마 바람이 안 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바람에 독이 실려 왔다면 단목도유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끄으윽…….”
“커허어억!”
함께 온 두 사람과 이당오괴가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 가는 것을 보며 단목도유는 마른침을 삼켰다.
화룡지독(火龍之毒)!
사천당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지독한 독으로, 녹색의 연기에 스치기만 해도 산화독(酸化毒)이 살과 뼈를 태우고 부시독(腐屍毒)이 파고들어 몸을 썩게 만든다.
중독되면 즉사요, 내공이 강해도 살 수 있는 건 겨우 일다경(一茶頃)이다. 그 안에 해독제를 먹지 못하면 몸이 계속 썩어 들어가 숨이 끊어진다. 해독제를 먹는다 해도 며칠 동안은 고열에 시달려야 했다.
문제는 그 해독제를 당가의 중요 인물 몇 명만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제길!”
녹색의 연기가 조금씩 가라앉자 단목도유는 흑묘를 찾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어야 할 흑묘는 물론이고, 조윤도 보이지 않았다.
* * *
화룡지독은 정말 최후의 수단이었다. 미리 해독제를 먹고 터트려야 하건만 이번에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몸을 피한 후에 곧바로 해독제를 먹었지만 중독된 것이 쉽게 해독되지 않았다. 이당오괴와 단목도유 모두를 중독시키기 위해 화룡지독을 발밑에 터트렸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몸의 상처를 통해 독이 깊게 스며들었다.
“하악……. 하악…….”
숨을 쉴 때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이 가물가물하니 금방이라도 감길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앞이 흐릿하게 보였다.
지나가는 사람, 길에 있는 나무,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집, 그리고 푸른 하늘까지 모든 것이 흐릿했다. 그러다 피눈물이 나자 모든 것이 붉은색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하악……. 하악…….”
불에 달군 새빨간 인두로 살을 지지는 것 같은 통증이 계속 전신을 훑었다. 입에서는 꾸역꾸역 피가 넘어왔다. 숨 쉬기도 힘들 정도로 지독한 고통이었다. 살아생전에 언제 이런 고통을 당해 봤던가?
흑묘는 문득 백모연을 만나기 전이 떠올랐다. 추위와 배고픔에 치가 떨리던 그때의 고통이 이랬던 것 같다.
“추워.”
흑묘는 계속 걸었다. 오로지 백모연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에게 조윤을 데려다줘야만 했다.
백모연이 기뻐하는 모습을 떠올리니 힘든 와중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나이가 들었어도 그녀는 아름다웠다. 흑묘에게는 여전히 선녀였다.
지금까지 백모연만을 마음에 품고 살아왔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했다. 그것이 그때의 지독한 고통에서 구해준 보답이었고,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전할 수 있는 길이라 믿었다.
일을 해냈을 때 그녀가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좋았고,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면서 잘했다고 보듬어 줄 것이다.
그럴 것이다, 아마도.
* * *
백색의 궁장이 아주 잘 어울리는 중년 여인이 달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 단목세가의 둘째 가모인 백모연이었다.
“하아…….”
다시 한숨을 내쉬는 백모연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이리 마음이 불안하기는 처음이었다. 흑묘는 강하고 똑똑한 아이였다.
자신이 그렇게 키웠다. 당문에 부탁해서 혹독한 수련을 겪게 했고, 어린 나이에 고수가 되었다. 덕분에 그녀가 시키는 일을 항상 무사히 완수했다.
당연히 이번에도 무사히 잘 해낼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쿵!
정자에서 조금 떨어진 담장에서 난 소리였다. 백모연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가 쓰러져 있었다.
달이 밝지만 어두운 밤이었다. 거리도 그리 가깝지 않았다. 그런데도 백모연은 쓰러진 사람이 흑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묘야!”
백모연이 그리로 달렸다. 동시에 담장 너머에서 십여 명의 사내들이 날아왔다. 이곳 단목세가의 내원을 지키는 무사들이었다.
“물러나십시오!”
그들 중 하나가 백모연을 향해 소리쳤다.
“내가 부리는 아이다.”
“일단 먼저 확인을 하겠습니다.”
“내가 부리는 아이라 했거늘!”
백모연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러자 그들이 놀란 눈으로 백모연을 봤다. 그녀가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내가 세가 내에서 힘이 없다고 너희까지 무시를 하려는 게냐!”
서릿발 같은 기세로 나무라자 그들이 주춤거렸다. 백모연은 무서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다가 흑묘에게 다가갔다.
흑묘는 엉망이었다. 상처에서 흘린 피로 인해 입고 있는 옷이 붉게 젖었고, 독에 중독되어 살색이 푸르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한데도 그녀는 품에 아이 하나를 꼭 안고 있었다. 조윤이었다.
백모연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흑묘를 살폈다. 가망이 없었다. 실낱같은 호흡만이 간신히 이어지고 있었다. 벌써 죽었어야 정상이었다.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상처가 터지고 독에 의해 살과 뼈가 썩어 들어가는 고통을 어떻게 참았을까?
흑묘를 잡고 있는 백모연의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아이였다. 아들이 죽고 나서 심장이 찢겨 나갈 것 같은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게 해줬던 아이였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목숨조차도 헌신짝 버리듯이 할 수 있는 아이였다.
친딸처럼 사랑했건만.
백모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슴이 꽉 막혀 오는 슬픔을 어떻게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보내지 말 것을 그랬다. 한이야 버리면 그만인 것을. 살아 있는 사람이 중요하지, 마음속에 묻어둔 한이 무에 그리 중요하다고 이리 되게 만들었을까?
“가서 의원을 불러오너라. 며칠 전에 신의문에서 온 의원이 별채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소리 죽여 울던 백모연이 힘없이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내원을 지키는 무사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흑묘를 쫓아 여기까지 왔다. 그녀에게 몇 번이나 멈추라고 경고를 했지만 듣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손을 썼다.
한데 흑묘는 그것을 몸으로 다 받아내며 이곳의 담을 넘었다. 그제야 잡았다는 생각을 했건만 설마 백모연이 아는 사람이었을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