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비서 7화
무료소설 신의비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1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의비서 7화
제3장 흑묘 (2)
“아니요. 사실 있는 그대로를 말하라는 거예요. 내가 먼저 온 건 사실이잖아요. 잘 생각해봐요. 죽는 것보다 차라리 욕을 좀 얻어먹는 것이 낫지 않아요?”
“음…….”
흑묘의 말대로였다. 흑묘를 상대하려면 적어도 세 명은 죽는다. 그렇게 해서 아이를 죽인다고 해도 백모연의 손에 죽을 수밖에 없었다.
백모연은 흑묘를 굉장히 아낀다. 그런 흑묘를 죽이고 무사할 수는 없었다. 백모연이 세가 내에서 세력이 없다고 해도 어쨌든 가모였다. 자신들을 죽이고자 마음먹으면 충분히 가능했다.
“가라. 우리는 아무것도 못 봤다.”
“후우……. 고마워요. 좋은 판단이에요.”
흑묘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조윤을 안아 들었다.
“잠깐!”
“뭐죠?”
“혹여 다음에 만나면 이렇게 양보하는 일은 없을 거다.”
“기억해두죠.”
흑묘는 조윤을 안고 재빨리 자리를 떴다.
* * *
흑묘는 산길을 따라 달렸다. 대로를 이용하면 훨씬 빠르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조윤을 노리는 자들은 이당오괴만이 아니었다. 셋째 가모가 움직였으니 첫째 가모 역시 손을 썼을 것이다.
“하아! 하아!”
장시간 동안 누군가 쫓아오지 않는지 경계를 하며 쉬지 않고 달리자 숨이 찼다. 가볍게 느껴지던 조윤도 이제는 천근처럼 무거웠다.
흑묘는 조금 쉬어 갈 생각으로 잠시 멈췄으나 곧 힘껏 뛰어올랐다. 그리고 옆에 있는 아름드리나무를 발로 차고 그 힘을 이용해서 굵은 가지 위로 내려섰다.
품에 안겨 있던 조윤은 갑자기 주위 환경이 확확 바뀌자 정신이 없었다. 속이 울렁거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잠깐…….”
“쉿! 조용히 해야 해요. 나쁜 사람들이 쫓아왔어요.”
흑묘가 조윤을 바짝 끌어안고 입을 막으면서 속삭였다. 혹여 소리를 냈다가는 들킬지도 모른다.
잠시 후 나무 아래의 수풀이 흔들리면서 세 사람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들을 보고 흑묘가 놀란 눈을 했다.
‘설마 저 사람까지 왔을 줄이야.’
가장 선두에 있던 사내는 첫째 가모인 당이주를 따르는 단목도유였다. 그는 마을에서 만났던 이당오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심계가 깊고 무공이 뛰어났다.
정면으로 부딪치면 흑묘도 이길 자신이 없었다. 혹여 운이 좋아 그를 죽인다고 해도 단목세가의 직계라 문제가 된다.
‘무조건 피해야 해.’
흑묘는 나무 위에서 한참이나 더 웅크리고 있다가 그들이 다시 돌아올 기미가 없자 그제야 밑으로 내려왔다.
“우앗!”
급격하게 몸이 뚝 떨어지자 조윤이 놀라서 소리쳤다. 흑묘에게 그 정도의 움직임은 예사라 조윤을 생각하지 못했다. 이에 당황하며 조윤을 감쌌다.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전혀 괜찮지 않았다. 간신히 가라앉힌 속이 다시 울렁거렸다. 그러나 약한 소리를 하기가 싫었다. 흑묘가 그런 조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린데도 강하네요.”
조윤은 흑묘가 계속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자 기분이 묘했다. 이두가 귀여워했을 때와는 달리 느낌이 간질간질했으나 그게 싫지 않았다.
“방금 그건 어떻게 한 거죠?”
“뭐를 말하는 거죠?”
“저렇게 높은 데까지 뛰어올라 갔었잖아요.”
“아아. 그건 경공이라고 해요. 무공을 익히면 할 수가 있어요.”
“그럼 혹시 검기나 장풍 같은 것도 가능한가요?”
“물론이에요. 열심히 수련해서 경지가 높아지면 가능해요.”
‘맞구나.’
혹시나 했는데 정말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흑묘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렸었다. 묘령의 아가씨가 아이 하나를 안고 그렇게 빠르게 달린다는 건 현대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방금 흑묘가 뛰어오른 나무의 높이는 적어도 삼 미터가 넘었다. 아무리 나무를 발로 차서 도움닫기를 했다지만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조윤은 나무 위에 있는 동안 나름 추론을 했었다. 여기가 혹시 동기가 가지고 있던 무협 소설에 나오는 그런 세상이 아닌가 하고.
한데 검기나 장풍을 쓸 수 있다고 하니 그 생각이 맞는 것 같았다. 옛날에도 무술을 잘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렇듯 사람의 한계를 넘어선 경우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곳은 전에 살던 곳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그걸 확인한 조윤은 문득 두려움이 일었다. 원시적이고 포악한 이곳이 무섭게 느껴졌다. 어쩌면 이두와 대호, 육예까지 전부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두 아저씨의 비명 소리가 들렸었는데 혹시 죽었나요? 거기에는 동생들도 있었어요.”
“걱정 말아요. 모두 무사해요.”
“정말요?”
조윤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묻자 흑묘는 속으로 뜨끔했다. 사실 그녀는 조윤 말고는 관심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공소가 남았으니 모른 척하지는 않을 거라 여겼다.
어쨌든 일단은 속여야 했다.
“저, 정말이에요. 말 잘 듣고 있으면 금방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 사람들한테 죽은 거 아니죠?”
“에? 그, 그럼요. 공소가 남았었잖아요. 그가 구하는 걸 봤어요. 분명 무사할 거예요.”
흑묘의 표정만으로는 진위 여부를 알 수가 없었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다 해도 조윤은 그 말을 믿고 싶었다. 하연이를 잃었을 때의 슬픔을 다시 겪기는 싫었다.
“언제 볼 수 있죠?”
“지금은 안 돼요. 우선은 나쁜 사람들한테서 벗어나야 해요. 그럼 나중에 공소가 연락을 해 올 거예요.”
“그 사람들은 누구죠? 나를 죽이려고 온 거 맞죠?”
“나중에 차차 알게 될 거예요.”
조윤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흑묘의 말대로 우선은 살아남아야 했다. 그래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도 있고 동생들도 만날 수가 있었다.
그때까지는 흑묘를 믿고 따라야 했다.
* * *
얼어붙은 냇가와 구름다리 위로 눈이 수북이 쌓였다. 세상이 온통 새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풍경이 아름답게 보일지 모르나 소녀에게는 아니었다.
이제 예닐곱 살이나 되었을까?
소녀는 다 떨어진 넝마를 걸치고 추위에 몸을 떨며 쉴 새 없이 손을 비비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애처롭건만 오가는 사람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하아, 추워.”
매년마다 겪는 지독한 추위였다. 소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따뜻하게 겨울을 난 적이 없었다. 너무 춥고 배가 고파서 차라리 죽어버리면 더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몇 번이나 들었다.
사박사박.
누군가가 눈을 밟는 소리가 났다.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아!”
선녀였다. 눈앞에 서 있는 여자는 선녀가 분명했다. 그녀는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은 백색의 궁장을 입고, 그 위에는 하얀 털이 끝단에 둘러져 있는 포(袍)를 두르고 있었다.
하얀 옷만큼이나 피부도 하얗고, 커다란 눈으로 내려다보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녀의 옆에는 짙은 녹색의 옷을 입은 남자가 바짝 붙어서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이름이 뭐지?”
선녀가 물었다.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소녀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이름이 없니? 음……. 생긴 게 마치 고양이 같아. 그래, 흑묘가 어떠니? 너는 이제부터 흑묘야.”
소녀는 가만히 선녀를 쳐다봤다. 그러다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녀도 소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나와 함께 갈래?”
선녀가 손을 내밀었다. 소녀는 망설임 없이 그 손을 잡았다. 소녀의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 * *
“아!”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니 산속의 동굴이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후우…….”
아주 오래된 일이라서 잊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때의 꿈을 꾼 것일까?
품 안의 조윤을 보니 쌕쌕거리면서 아직도 자고 있었다. 먼 길을 쉬지 않고 왔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조금만 더 가면 단목세가로구나.’
흑묘는 조윤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백모연이 목숨을 버려서라도 데리고 오라던 아이다. 늘 명령을 내릴 때면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서 돌아오라고 하던 그녀가 그렇게 말할 정도로 이번 일은 중요했다.
흑묘는 주변의 흔적을 없애고 다시 조윤을 안아 들었다. 몸이 들썩이자 조윤이 눈을 떴다.
“깼어요?”
조윤은 말없이 눈을 비비다가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지금까지는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몰랐는데 조금 자고 나서인지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흑묘는 늘씬하니 키가 크고 가슴도 컸다. 한데 자꾸 품에 안으니 심장이 쿵쾅거렸다. 정수현은 이십육 년 동안 동정이었다.
‘만져 볼까? 안 되지. 목숨을 구해준 사람한테 그런 짓을 하면.’
생각은 그랬으나 자신도 모르게 손이 움직였다. 말랑말랑한 감촉에 조윤은 뒤늦게 정신이 들며 그대로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