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비서 1화
무료소설 신의비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2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의비서 1화
서 장
어느 날 장자는 꿈을 꿨다.
나비가 되어서 꽃밭을 훨훨 날아다니는 꿈이었다.
그러다 잠에서 깨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지금이 현실일까?
혹시 나비가 꾸는 꿈이 아닐까?
나는 장자일까, 아니면 나비일까?
알 수가 없었다.
제1장 장자지몽(莊子之夢) (1)
오늘도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환자의 나이는 서른셋, 사내이고 위암 초기였다.
내시경으로 수술을 할 수도 있었으나 암이 자리 잡은 위치가 조금 미묘했다. 그래서 개복을 하고 간단히 절제를 했다.
보통은 그렇게 배를 열어서 수술을 하면 세 시간에서 네 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그런데 정수현은 정확히 두 시간 만에 끝냈다.
그와 함께 수술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그걸 보고 모두 혀를 내둘렀다. 빠르기도 빠르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성과 손놀림, 그리고 상황에 따른 재빠른 판단은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레지던트 삼 년 차가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동기들은 대부분 어시스턴트로 참여를 하거나 집도의로서 직접 수술을 주관해도 아주 간단한 수술뿐이었다. 그런데 정수현은 전문의가 하는 수술을 벌써부터 하고 있었다.
편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으나 정수현이 수술하는 것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감히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의 실력은 현역에서 뛰는 웬만한 전문의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일반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의대에서 육 년을 보낸 후에 인턴 과정을 일 년 거치면 레지던트가 된다. 그리고 레지던트 생활을 사 년에서 오 년 정도 하면 전문의가 되는데, 이후로도 한 이 년 정도는 또다시 경험을 쌓아야 했다.
결국 의사로서 제구실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되려면 서른 중반이나 되어서나 가능했다. 그런데 정수현은 이제 스물여섯 살이었다. 고등학교에 갓 들어갔을 때 자퇴를 하고 검정고시를 본 후 대학에 갔기 때문이다.
동기들이 대부분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사오 년 정도 빠른 셈이었다.
단순히 실력만 따지자면 그들보다 십 년 정도 차이가 났다. 그러니 천재라고 불리는 것이 당연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정수현은 그 모든 것을 순전히 노력으로 일궈냈다. 오로지 여동생인 하연이를 위해서였다.
두 살 터울인 여동생은 날 때부터 심장이 약해서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천사같이 예쁜 아이건만 평범한 일상생활은 꿈도 꿀 수가 없었다.
“끝났어. 이제 마무리해.”
수술을 마치고 도움을 줬던 어시스턴트들에게 말했다. 그들 모두 정수현의 동기였으나 오히려 자청해서 어시스턴트로 참여했다. 그만큼 정수현의 실력이 뛰어난 까닭이다.
“수고했어.”
동기가 건네는 말에 정수현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하고 수술실을 나왔다.
피곤해서 쉬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복도에 있는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천천히 들이켰다.
덕분에 갈증이 좀 가시자 방금 전 끝낸 수술의 모든 과정을 머릿속에서 다시 한 번 되풀이했다. 수술이 끝나면 늘 하는 이미지 트레이닝이었다.
다른 사람의 수술에 참여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보고 기억한 후에 직접 집도의가 되어서 몇 번이나 머릿속에서 수술을 반복했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보다 실력이 훨씬 빨리 느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역시 정수현이야. 대단하지 않아?”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약간 들뜬 모습으로 동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강혜원이 보였다.
웨이브 진 단발머리 사이로 보이는 커다란 눈과 적당히 솟은 코, 작지만 두툼한 입술, 갸름한 얼굴과 하얀 목덜미, 그리고 품에 쏙 들어올 것 같은 작고 아담한 몸, 그 모든 것이 정수현의 이상형이었다.
“대단하기는 하지만 생긴 걸 보면 정이 뚝 떨어지지 않니?”
“그런 말 마. 의사가 실력만 있으면 되지 생긴 게 무슨 상관이야?”
강혜원이 편을 들어주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사실 정수현은 이 년 전부터 강혜연을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녀와 제대로 대화조차 나눠 본 적이 없었다. 어쩌다가 업무상 나누는 몇 마디가 다였다.
혹시라도 좋아하는 마음을 들킬까 두려웠고,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능력이 뛰어나도 사람들, 특히 여자들은 일단 외모부터 따진다. 그런 점에서 정수현은 평균 이하였다.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 나름 잘생긴 얼굴에 몸도 호리호리했었다.
하지만 의대를 가고자 마음먹고 공부를 시작하면서 점점 엉망이 되어 갔다. 영양 불균형과 운동 부족으로 인해 얼굴에는 여드름이 가득했고, 살이 쪄서 몸무게가 남들보다 배는 나갔다.
이후로도 수면 부족과 불규칙적인 생활 때문에 여전히 보기에 안 좋았으나 정수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럴 여유도 없거니와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오로지 한 길만 보고 달려온 덕에 교수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가 있었고, 그 때문에 여동생의 치료 환경이 좋아졌다.
그거면 된 거다.
미련을 떨쳐버리듯이 남은 음료수를 마저 마시고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조금 쉴 생각으로 숙직실로 가자 책상이며 침대에 가득 쌓인 의학 서적이 눈에 들어왔다.
침대에 걸터앉아 아무 생각 없이 책을 한 권 집었다. 두툼하고 고풍스러운 재질의 책이었다.
‘신의비서(神醫秘書)? 이런 책도 빌렸던가?’
제목을 보니 소설책이 분명했다. 요즘 동기 중 한 명이 무협 소설에 빠져 있는데, 아마도 그 녀석이 빌려 온 책 같았다.
정수현은 지금껏 소설책은 단 한 권도 읽은 적이 없었다. 장르 소설은 더더욱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단 일 분 일 초도 허비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동기 녀석이 틈만 나면 자신이 본 책의 내용을 열심히 떠들어 댄 것이 이유였다.
뭐라더라?
무협 소설에서는 내공으로 웬만한 내상(內傷)은 전부 치료를 할 수가 있다고 한다. 또한 신의(神醫)라 불리는 사람들은 모든 병을 침 한 방으로 뚝딱 고치고, 만년설삼(萬年雪蔘)이니 공청석유(空靑石乳)니 하는 전설의 영약은 죽어 가는 사람도 살린단다.
만약 현실에 그런 게 있다면 여동생인 하연이의 심장병을 고치는 것도 훨씬 쉬웠을 것이다.
첫 장을 펼치자 힘 있고 유려한 필체의 한자가 눈에 가득 들어왔다. 정수현은 한의학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자를 보는 데 문제가 없었다.
서장.
어느 날 장자는 꿈을 꿨다.
나비가 되어서 꽃밭을 훨훨 날아다니는 꿈이었다.
그러다 잠에서 깨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지금이 현실일까?
혹시 나비가 꾸는 꿈이 아닐까?
나는 장자일까, 아니면 나비일까?
알 수가 없었다.
내용을 보니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이었다. 장자는 중국 전국시대에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장하던 사람으로,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聖人)이었다.
정수현은 속독으로 순식간에 앞부분을 읽었다. 어이없게도 현대에 사는 사람이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중국의 명나라 시대로 가서 살아간다는 내용이었다.
너무 허황된 이야기라서 와 닿는 것이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손에서 책을 놓지 못했다. 읽다 보니 다음 장면이 궁금해서 계속 보고 있었다. 그때 다급한 외침과 함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선생님! 큰일 났어요! 빨리요!”
순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설마 하연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정수현은 정신없이 달려가면서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나쁜 예감은 어김없이 들어맞는다. 하연이가 수술실로 실려 가고 있었다.
“하연아! 어떻게 된 겁니까?”
매달렸지만 소용없었다. 하연이는 곧 수술실로 들어갔고, 정수현은 홀로 남겨졌다.
“걱정 마라. 내가 꼭 살린다.”
하연이의 담당 의사가 정수현의 어깨를 다독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 사람이라면 믿을 수가 있었다. 그는 심장 전문의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였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아무 일 없을 거다. 믿자. 믿는 거다.’
그렇게 마음먹었음에도 초조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다섯 시간이 지나고 굳게 닫혀 있던 수술실의 문이 열렸다.
“미안하네.”
하연이의 담당 의사가 피곤에 지친 얼굴로 힘없이 말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여동생이, 하연이가 죽었다. 정수현은 단 한 번도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살지 않았다. 오로지 하연이를 살리기 위해, 그 일념으로 지금껏 노력해 왔다.
한데 그 모든 것이 허사가 되어버렸다. 한순간에 삶의 의미를 잃자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비틀거리며 벽을 짚었다. 속이 울렁거리며 구토가 치밀었다. 어딘가로, 어딘가로 가야 했다.
발걸음을 옮겼다.
소식을 들었는지 동기 몇 명이 다가왔다. 하지만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그중에는 강혜원도 있었다.
‘하, 나를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나를 실패자처럼 보지 마라.’
눈물이 차올랐다. 가슴이 답답했다. 북받쳐 오르는 슬픔에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그토록 가까워지고 싶었던 강혜원이 품에 안고 다독여 줬지만 아무 감흥이 없었다.
한 시간 후, 정수현은 스스로 생을 포기했다.
* * *
“으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니 자신의 방이었다. 창을 막아놓은 허름한 판자때기 사이로 찬바람이 들어와 땀을 식혀 줬다.
덕분에 정신이 좀 들자 어색하니 자신의 손을 봤다. 이렇게 작았던가?
얼굴을 만져 봐도 역시나 작았다. 땀으로 흥건한 이마를 소매로 훔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은 낡은 방은 지금까지 그가 살던 곳이 분명했다.
“꿈……인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의 이름은 정수현이 아니라 조윤이었다.
남궁조윤.
나이도 스물여섯 살이 아니라 이제 열 살이었다. 정하연이라는 여동생도 없었다. 두 살 터울의 남동생과 연년생인 여동생이 있었다.
결정적으로 이곳은 대한민국이 아니었다. 중국이었다. 그것도 현대가 아니라 옛날 명나라 시대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단순히 꿈이라고 여기기에는 정수현으로 살아온 시간이 너무나 생생했다. 특히 마지막이 그랬다. 하연이를 잃은 지독한 공허감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문득 소설책에서 본 호접몽이 생각났다.
장자가 말했다.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내가 되는 꿈을 꾼 것인가?
정수현으로서 살았던 것이 꿈이 아니라, 지금 이 모든 것이 꿈일 수도 있었다. 자살을 했지만 아직 숨이 붙어 있어서 가사 상태에서 꾸는 꿈일지도 몰랐다.
혹시나 해서 볼을 꼬집어 봤다. 아팠다.
“이게 뭐야……. 제길!”
무릎을 끌어안고 거기에 머리를 묻었다. 그는 살아갈 의미를 잃고 자살했었다. 어떤 이유로든 또다시 주어진 삶이 반갑지가 않았다. 하루가 지났으나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앉아있기만 했다.
‘나는 정수현인가, 조윤인가?’
알 수가 없었다. 또다시 하루가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혼란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침마다 조윤이라는 걸 확인할 때마다 머리가 복잡했다.
거기에 더해 하연이를 잃은 상실감이 그를 괴롭혔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지독한 감정이 한순간에 사라질 리가 없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다가 감정이 북받쳐 다시 죽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게 된 건 동생들 때문이었다.
조윤과 동생들은 천민에 고아였다. 하루 벌어 하루 먹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조윤이 넋을 놓고 며칠을 앉아만 있자 동생들이 산에 먹을 걸 찾으러 갔다가 사고가 났다. 여동생인 육예가 독버섯을 먹은 것이다.
옆집에 사는 이두가 육예를 안고 왔다. 이두는 서른 살의 노총각이었다. 같은 천민이고, 아이들을 좋아해서 종종 찾아와 도움을 줬었다.
“이 녀석!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산에 갈 생각을 하다니. 조윤! 뭘 멍하니 있는 거야?”
“어?”
“가서 잿물을 가져와라.”
조윤은 무슨 상황인지 몰라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그러자 이두가 성큼성큼 다가와서 멱살을 잡아 올렸다.
“네가 그러고 있으니까 동생들이 산에 간 거 아냐? 정신 차려!”
알까 보냐? 이 모든 게 꿈일지도 모르는데.
조윤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자 이두가 한 대 칠 기세로 주먹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조윤의 남동생인 대호가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때리지 마! 우리 형, 때리지 마!”
“응? 아니다. 때리기는 누가 때린다고 그래. 그런 거 아니다.”
이두가 애써 변명을 했으나 대호는 다시 소리쳤다.
“우리 형 때리려면 가! 우리 집에서 나가!”
“허 참. 아니라니까.”
덩치는 커다란 이두가 이제 여덟 살인 대호에게 쩔쩔매는 모습은 상당히 웃겼다.
조윤은 두 사람을 놔두고 육예에게 다가갔다. 얼마나 안 씻었는지 머리는 떡이 지고 얼굴에는 땟국물이 가득했다. 옷도 넝마나 다름없었다.
이마에 손을 대보니 열이 약간 있었다. 입가에는 토를 한 흔적이 보였고, 복통이 심한 듯 양손으로 배를 쥐고 있었다.
전형적인 식중독 증상이었다. 상태를 보고 심하면 위세척을 해야 하지만 여기는 현대의 병원이 아니었다. 의료 장비가 하나도 없었다.
“비켜라.”
이두가 다가와서 조윤을 밀어냈다. 그리고 대접에 받아 온 잿물을 육예에게 먹이려고 했다.
“그게 뭐죠?”
이곳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말을 하는 것이었으나 자연스럽게 중국어가 흘러나왔다. 조윤으로 살아온 세월이 무려 십 년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보면 모르냐? 잿물이지.”
“그걸 왜 먹이는 겁니까?”
“이걸 먹여서 독버섯을 토하게 하려는 거다. 그래야 몸 안의 독이 사라지지.”
잿물은 나무나 콩대 등의 재를 우려낸 물이었다. 기름기와 때를 잘 흡수하기 때문에 빨래에 많이 쓰인다. 한마디로 비누나 다름없었다. 한데 그걸 먹여서 토를 하게 만든다니, 조윤은 어이가 없었다.